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투기자본에 ‘국적’은 없다

‘외국계 투기자본=먹튀’ 프레임, 국내외 자본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 저해하고 때로는 재벌의 애국 마케팅에 악용된다는 비판 나와
등록 2015-08-27 16:49 수정 2020-05-03 04:28
‘론스타 문제’가 한창이던 2012년 1월30일, 민주통합당과 한국노총이 ‘국부 유출 론스타 (외환은행) 매각 승인 규탄대회’를 국회 본청 앞에서 열었다. 강창광 기자

‘론스타 문제’가 한창이던 2012년 1월30일, 민주통합당과 한국노총이 ‘국부 유출 론스타 (외환은행) 매각 승인 규탄대회’를 국회 본청 앞에서 열었다. 강창광 기자

“투기자본을 ‘먹튀’라고도 부른다. 이는 단기간에 고수익을 챙겨서 튄다는 의미인데, 투기자본감시센터가 만든 신조어다.” (론스타에 대한 10년의 투쟁의 의미, 장화식 전 공동대표)

“‘먹튀’라는 표현이 투기자본 문제의 일단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이 문제가 가진 다양성을 보여주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

은 제1073호 표지이야기<font color="#991900">‘‘탄원서-8억’ 거래, 김앤장이 중개했다’</font>를 통해, 장화식 전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의 이야기를 다뤘다. ‘먹튀’라는 신조어를 만든 장씨를 다룬 것은 그가 한국 사회에서 의미심장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해고 원인이 된 외환은행-외환카드 인수·합병 과정에서 외국 사모펀드인 론스타 문제를 파헤쳤다. 지속적인 그의 활동은 구조조정을 하고, 배당금을 외국으로 가져가고, 기업을 다시 팔아치우는 사모펀드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사모펀드 등 외국자본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뒤 물밀듯이 한국에 들어왔다. 유동성 부족으로 기업들이 망하면서 외국자본이 살 만한 기업이 넘쳐났다. 정부도 외국자본 유치를 환영했다. 환영 세례 속에 감춰져왔던 부작용을 장씨가 물 위로 올린 셈이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도 “투기자본감시센터는 론스타 문제를 한국 사회에 중요한 이슈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삼성’은 토종 자본이라 지켜야 한다?</font></font>

하지만 ‘먹튀자본’을 비판한 그가 유회원 전 론스타코리아 대표로부터 8억원을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는 사이, 한국 사회는 론스타 이후 또 다른 외국자본 엘리엇매니지먼트를 맞닥뜨렸다. 헤지펀드인 엘리엇이 삼성물산의 주식 지분 7% 이상을 쥐고 삼성그룹이 추진하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주식 가치가 과도하게 낮게 평가돼 삼성물산 주주의 이익을 해치는 한편, 제일모직의 주식을 가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만 이익을 보는 구조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해 5월 쓰러진 뒤 숨가쁘게 진행되던 삼성그룹의 사업 조정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삼성은 미래 경쟁력을 위해 계열사들을 매각하고 합치는 과정이라 했고, 그 과정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그룹에 대한 지배권은 커져가던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투자자 중 누구도 이견을 내놓지 않았는데, 엘리엇이 느닷없이 등장한 것이다.

이후 전개 과정은 삼성의 희망대로 흘러갔다. 국내 언론은 삼성의 경영권이 흔들려 국부 유출이 염려된다며 엘리엇을 ‘융단폭격’했다. 언론들은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을 향해 삼성 편을 들라고 촉구했다. 국민연금은 의결권 자문기관의 합병 반대 권고에도 불구하고 불투명한 의사결정 과정 속에서 합병에 찬성했다.

삼성은 엘리엇이 외국 투기자본임을 암시하는 자료를 만드는 등 ‘국내 자본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수박을 들고 소액주주를 일일이 찾아다니는 노력 끝에 삼성은 엘리엇과 주총 표 대결에서 승리했다. 국민연금이 삼성 쪽으로 돌아선 것도 크게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묻혀진 것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합병하면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 일가의 그룹 경영권이 더 확실히 다져진다는 사실이었다. 오로지 삼성 대 엘리엇, 국내 자본과 외국 투기자본의 대결로 보는 구조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렇다면 장씨가 주도적으로 내건 ‘먹튀’자본 논리는 현재도 유효한 것일까.




삼성물산의  주가  변동



2015년 5월26일<font color="#008ABD"> (6만3500원, 전일에 견줘 8200원 급등)</font>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결의 및 발표
5월27일 <font color="#008ABD">(6만5700원)</font> 엘리엇매니지먼트, 주주 자격으로 삼성물산에 합병 반대 의사 통보
6월4일<font color="#008ABD"> (6만9500원)</font> 엘리엇, 삼성물산 지분 7.12% 취득 공시
6월10일 <font color="#008ABD">(7만5천원)</font> 삼성물산, 자사주 5.76%(899만주) KCC(우호적투자자)에 매각 발표
7월3일 <font color="#008ABD">(6만7200원) </font>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기관 ISS, 합병 반대 권고
7월16일 <font color="#008ABD">(6만9300원)</font> 주주총회 하루 전날
7월17일 <font color="#008ABD">(6만2100원, 주가 급락 시작) </font>삼성물산-제일모직 주총서 찬성률 6.53%로 합병 승인
8월20일 <font color="#008ABD">(4만7천원)</font> 삼성물산 주가는 2015년 2009년 12월11일 이후 가장 낮은 수준


<font size="4"><font color="#008ABD">국내외 자본, 같은 잣대로 비판하라</font></font>

삼성 등 재벌들이 3~4세 경영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은 분명 엘리엇과 같은 또 다른 사모펀드의 등장을 부를 것이다. 재벌 총수 일가가 순환출자 등을 통해 작은 지분을 가지고도 경영권을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구조의 부적절한 빈틈을 외국 사모펀드들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반면 한국 기관투자가들은 재벌의 지배구조에 적극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게 현실이다.

“외국자본을 먹튀자본으로 보는 시각은 이제 깨져야 한다.” 사회책임투자 컨설팅업체인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투기자본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외국자본은 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데, 그런 프레임은 유치하다. 국내 기관투자가의 주식 보유 기간은 더 짧다. 왜 같은 잣대로 비판하지 않나.”

류 대표는 객관적 잣대가 가동되지 않는 역사를 2003년 소버린 사태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설명한다. 당시 한국은 외환위기 뒤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풀었다. “국내 기간산업의 지분이 넘어갔고 주가가 다시 올라가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이득을 봤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정서적으로 국부가 유출된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SK에 투자했던 소버린이 9천억원을 벌고 나가니 배가 아팠던 거다.”

소버린·론스타 등 당시 한국 경제를 휩쓸고 간 사모펀드·헤지펀드는 외국자본의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었다. 투기자본감시센터도 외국자본으로 인해 노동자들이 실직하는 모습을 부각시켰다. 이대순 전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는 “기업은 주주의 것으로만 볼 수 없다. 대주주라고 멀쩡한 기업의 노동자들을 내팽개치고 기업을 팔고 나가려는 것에서 투기자본의 문제에 눈을 떴다”고 했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소액주주운동으로 재벌을 견제하고 개혁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라고 봤다. 소액주주로 활동한 이들은 진짜 풀뿌리가 아니라 외국의 헤지펀드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외국자본은 먹튀자본’ 이라는 시각이 결과적으로 한국 재벌에 의해 악용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전성인 교수는 “투기자본이라는 시각은 국내 재벌에 의해 악용된 사례가 많다. 외국자본이 국내 재벌기업의 불투명한 지배구조 문제를 지적하더라도, 삼성처럼 언제나 애국심 마케팅을 펼쳐 투기자본으로부터 토종 자본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금융업계 관계자는 이것이 한국 경제를 더 폐쇄적으로 만든다고 지적했다. “미국 내 유명한 자산가들 가운데 엘리엇에 투자하는 이가 많다. 엘리엇은 존경받는 측면도 있다. 삼성은 이런 엘리엇을 공격했고, 이게 금융 중심지인 월가에 생생하게 보도됐다. 그런 것을 보면서 외국 투자자들은 론스타에서 보듯이 한국에서 돈 벌면 욕을 먹고 가는구나라고 생각한다.”

김상조 교수는 더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김 교수는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언론이나 정치가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데 실패하게 만들었다. 론스타가 10년간 2조원 투자해서 4조5천억원 벌어갔는데, 투기자본감시센터가 10년 동안 집요한 문제제기를 해 금융감독 당국의 권위를 훼손하거나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게 만든 비용은 론스타가 가져간 것보다 더 크다”고 주장했다.

투기자본감시센터  전  공동대표  이대순  변호사


“발전적  해체  고민하고  있었다”


이완 기자

이완 기자

2004년 ‘투기자본 감시’를 전면에 내걸고 등장한 투기자본감시센터는 한국 사회에 ‘투기자본’의 위험성을 알리는 데 한몫한 시민단체다. 하지만 올해 초 장화식 전 공동대표가 2011년 유회원 전 론스타코리아 대표에게서 8억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자 충격에 빠졌다. 투기자본이라고 비판하던 곳으로부터 시민단체 대표가 돈을 받은 사실은 단체에 치명적이었다.
‘장화식 사건’ 이후 공동대표를 사임한 이대순 변호사를 만났다. 이대순 변호사는 “이전부터 발전적 해체를 고민하고 있었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수명을 다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투기자본을 비판하던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니다. 이 변호사는 좀더 폭을 넓혀 ‘약탈 자본’을 반대하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그는 “저출산·고령화 등 한국 경제가 위기인 상황에서 엘리엇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냐”며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진보적 입장인 참여연대나 경제개혁연대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하는 데 반해, 그는 삼성보다 엘리엇을 더 경계하는 쪽으로 보였다.
투기자본을 ‘먹튀’라고 한 것은 투기자본감시센터가 만든 신조어다. 외국에서 들어온 자본은 모두 먹튀인가.
그건 아니다. 투기자본은 자본의 역할을 가지고 규정하는 것이지 국적을 보는 게 아니다. 외국자본이 건전하게 투자해서 적정 이윤을 가져가는 것을 왜 반대하나. 정권과 결탁해 말도 안 되는 수익을 올리는 것, 300%, 1000% 이런 식으로 수익을 가져가면서 회사를 거덜내는 자본을 투기자본이라 규정했다.
자본에 적정한 수익률이라는 게 있을까.
시장 수익률이라는 게 있다. 회사의 성장을 통해 그 수익을 가져가면 높아도 상관없다. 고용도 창출하고 선순환하면서 수익을 가져가는 걸 비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노동자를 해고하고 회사 자산을 팔고 지속 가능성을 상실하게 하면서 많은 수익을 가져가는 것은 약탈적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사모펀드 중에 긍정적인 자본도 있나.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확률적으로 보면 사모펀드가 취해온 방법들이 굉장히 공격적이다. 장기적인 회사의 발전 가능성과 역행하는 게 많았다. 주의 깊게 봐야 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7월에 투기자본감시센터가 낸 성명을 보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한다고 했다. 사모펀드인 엘리엇의 주장과 뜻이 같다.
내가 사퇴한 뒤에 나온 성명은 기존 투기자본감시센터가 말한 것과 다르다.
투기자본감시센터가 먹튀 프레임을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삼성이 엘리엇과 싸울 때 내건 이른바 ‘애국 프레임’에 이용된 거 아닌가.
우리가 만든 먹튀 프레임의 반사이익을 삼성이 본 것인데, 삼성의 애국 프레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서 삼성이 해야 할 이야기인가. 발등을 찍는 이야기다.
삼성이 이재용 부회장으로 승계되는 과정의 문제를 언론이 지적하는 기사를 써도 삼성은 별로 변한 게 없었다. 반면 엘리엇이 들어와 지배구조 문제를 지적하니 삼성의 거침없는 행동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전에 돌이켜보면 SK-소버린 때도 투기자본이 들어와서 한 역할에 대해 평가할 부분도 있지 않을까.
긍정적인 역할이 있다. 인정한다. (그러나) 시민단체가 가진 영향력이 얼마나 된다고 보나. 우리가 반대한다고 해도 투기자본은 들어온다. 그게 자본주의다.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가 문제다.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을 때 역기능이 크면 어떻게 보정할 것인가. 우리의 역할이 필요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투기자본 배척, 누구를 위한 것인가</font></font>

‘투기자본’ 논란은 한국 사회에서 현재진행형이다. 이른바 진보 진영 내에서 ‘외국자본=투기자본’ 이라는 공식은 격렬한 논란거리였다. 매듭되지 않은 이 논란은 오히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보듯 재벌의 경영권을 지키는 데 이용됐다. 투기자본을 배척하는 논리는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장화식씨와 투기자본감시센터가 남긴 숙제다.

<font color="#C21A1A">참고 문헌: (김위생·윤혜경·하준삼, 2006), (김승식. 2013), (투기자본감시센터 자료집)</font>이완 기자 wani@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