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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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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식 강요하는 게 위기다

기업들 모닝커피 금지하고 주말 출근하라며 직원 ‘군기잡기’ 나서… “총수에게 열심히 한다고 보여주기만 하는 임원들의 액션”
등록 2015-07-01 13:34 수정 2020-05-03 04:28
6월25일 아침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1층 카페가 문을 닫은 모습.

6월25일 아침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1층 카페가 문을 닫은 모습.

일터로 향하는 노동자는 카페인이 필요하다. 현대자동차 로고가 새겨진 파란색 사원증 목걸이를 건 남자는 시내버스 좌석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목받이가 없는 의자에 목까지 기댄 그는 ‘하나로마트’를 알리는 안내방송에 잠이 깼다. 못내 아쉬운 듯 문이 열린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407번 버스에서 내렸다.

파란 버스에서 내린 흰 와이셔츠 차림의 직장인들은 모두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건물로 향했다. 누군가는 어제 야근을 했고, 누군가는 어제 회식을 했을 것이다. 그는 1층 로비에 있는 카페를 힐끗 쳐다보더니 그대로 게이트를 통과했다. 처진 어깨는 ‘각성 효과가 있는’ 카페인이 든 커피를 원했지만, 카페 앞에 선 줄은 20명이 넘었다. 그는 커피 한 잔 들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졌다.

카페 앞 안내판은 기초질서 확립을 알렸다. “양재 사옥 기초질서 확립 및 시업시간 준수 목적 7시50분부터 9시까지 잠시 휴장하오니 고객님의 넓은 양해와 협조 부탁드립니다.”

사내 기초질서 확립 위해 카페 휴장?
자료: 잡코리아(6월23~26일 직장인 1365명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

자료: 잡코리아(6월23~26일 직장인 1365명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

아침 7시48분이 되자 카페 점원이 카트를 밀고 나와 기다리는 사람들의 맨 뒤를 막았다. 더 이상 줄을 서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가방을 메고 다급하게 온 직원들은 스마트폰을 꺼내 점원에게 보여줬다. 7시50분이 되기 전이니 커피를 사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마스크로 입을 가린 점원 역시 시간이 다 됐다고 사정했다. 몇 명은 돌아섰고, 몇 명은 줄을 섰다. 카페는 실내 전등마저 꺼버렸다.

기다리는 이들은 거의 다 젊은 직원들이었다. 부장이나 임원급 이상 직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부하 직원이 들고 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이는 아침 커피 한 잔의 소중함을 모를 것이다. 7시50분이 되자 점원은 의자에 앉은 이들에게도 카페가 휴장한다고 알렸다. 이른 출근에 아침을 못 먹고 온 여직원 두 명이 샌드위치를 치우고 일어섰다. 마지막 주문에 성공한 이가 잰걸음으로 동료에게 다가가 커피를 건넸다.

현대자동차 홍보실 관계자는 “(회사에) 기초질서 확립이 필요하다. 일반 직원은 언론에 회사 사정이 어렵다고 기사가 나와도 체감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하면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고 설명했다. ‘기초질서’는 카페뿐만 아니라 구내식당에서도 강조된다. 현대차그룹은 본사 사옥 지하 1층 구내식당 앞에도 카메라를 설치했다. 수백 명이 몰려 붐비는 탓에 일부 직원들은 낮 12시 이전에 식당을 찾는데, 그런 직원들을 적발하기 위해서다. 현대자동차 직원들은 통제가 심해졌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원래 자율보다 ‘군대문화’로 유명한 기업이다. 이런 기업의 대리·과장들이 출근 뒤 카페에서 노닥거리거나 상사보다 먼저 식당에 갈 수 있었을까.

현대자동차는 올 1분기 118만2834대의 자동차를 팔았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6% 줄었다. 1분기 영업이익은 최근 4년 가운데 가장 낮은 1조5880억원을 기록했다. 경쟁력 약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직원들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할 때”라고 홍보실 관계자는 힘주어 말했다.

‘더 열심히 일한 지’ 오래된 이들은 서울 서초동 삼성 사옥에도 있다. 삼성그룹 임원들은 3년 전인 2012년 7월께 출근 시간을 6시30분으로 앞당기라는 그룹 미래전략실의 메시지를 받았다. 새벽 출근뿐만 아니라 토요일·일요일에도 회사에 나왔다. 최지성 그룹 미래전략실장이 앞장섰다. 유럽 재정위기가 지속되며 매출 감소가 우려되자 임직원들에게 위기의식을 불어넣기 위한 조처였다.

만성화된 위기의식 언제 끝날까
자료: 잡코리아(6월23~26일 직장인 1365명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

자료: 잡코리아(6월23~26일 직장인 1365명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

위기의식은 3년째 만성화됐다. 2014년 5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쓰러지면서 임원들의 새벽 출근과 주말 출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삼성그룹 커뮤니케이션팀 관계자는 “임원들이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주말 출근은 다른 기업으로도 확산됐다. 최근 ‘비상경영’을 선포한 포스코그룹의 팀장급 이상 직원들은 토요일에도 회사에 나온다. 포스코는 철강업계 불황으로 인한 매출 감소뿐만 아니라 정준양 전 회장 주변에 대한 검찰 수사 등으로 시련을 겪는 중이다. 포스코 커뮤니케이션실 관계자는 “경영 쇄신을 위한 아이디어를 논하는 등 리더급 사람들이 솔선해서 일해보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일부 포스코 협력업체도 덩달아 간부급 직원들에게 ‘1시간 더 일하기 운동’을 실천하도록 하고 있다.

이른바 ‘직원 군기잡기’는 한국 대표기업만의 모습이 아니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가 의뢰로 6월23~26일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직장인 1365명 가운데 48.8%(666명)는 ‘최근 회사가 근무기강을 더 강조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방법은 주로 사무실 의자에 잡아두는 것이었다. 근무기강을 강조하는 방법(복수 응답)으로 가장 많이 꼽힌 것은 ‘점심시간 엄수·사무실 이탈 방지’(282명)였다. ‘기강 확립을 강조하는 사장·상사의 이야기가 늘었다’ (250명)와 ‘근태가 좋지 않은 직원에 대한 불이익이 늘었다’(230명)가 뒤를 이었다.

효과는 있을까? 회사에서 일하는 설문조사 응답자들은 부정적이었다. ‘근무기강 강조 뒤 일에 대한 긴장도 등 태도에 변화가 있었습니까’라고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다르지 않다’(53.8%), ‘모르겠다’(13.2%)고 답했다. ‘예전보다 강화됐다’고 말한 비율은 27.6%였다. 경영진이 의도한 대로 ‘회사의 경쟁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는가’ 묻는 질문에 응답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40.9%는 ‘별 차이가 없다’고 했고 23.7%는 ‘효과가 전혀 없다’고 했다. 30.9%만이 ‘조금 효과가 있다’고 했다. ‘매우 효과가 있다’(4.5%)고 한 이는 극소수였다.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일하는 과장급 직원은 “오히려 직원들 사기를 저하시키는 지시”라고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경영진이 어려울 때마다 꺼내는 카드인데, 임원이 나오면 팀장도 나오거나 대기한다. 이들이 실무자 없이 할 일이 많지 않다. 그저 윗사람 눈치만 보는 식이다.” 삼성 주변에선 주말에 삼성 직원들이 쓰는 ‘싱글’ 메신저창에서 최지성 미래전략실장이 ‘오프라인’으로 표시되면 임원들이 퇴근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64.6%는 ‘군기잡기’ 효과 없다
자료: 잡코리아(6월23~26일 직장인 1365명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

자료: 잡코리아(6월23~26일 직장인 1365명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

직원들의 군기를 잡는 효과는 데이터로도 확인된다. 직장인들의 기업평가 사이트인 ‘잡플래닛’은 SK이노베이션의 2014년과 2015년 직원 만족도를 조사했다. 정유업체인 SK이노베이션은 경영 사정이 악화되자 경영진을 교체하고 올해 초부터 직원들의 야근을 허용하는 등 기존 방침을 바꾼 바 있다.

결과는 놀라웠다. 직원들이 회사에 준 총평점(5점 만점)은 지난해 하반기 4.08에서 올해 상반기 3.41로 떨어졌다. 경영진에 대한 평가는 3.49에서 2.47로 추락했고, 사내문화에 대한 만족도도 4.11에서 3.44로 미끄러졌다. 잡플래닛 누리집에선 그 기업의 현직 또는 전직 직원만이 ‘경영진’ ‘업무와 삶의 균형’ ‘복지 및 급여’ 항목 등에 점수를 줄 수 있다. SK이노베이션이 2013년 시작했던 ‘만성적인 야근 금지’ 방침을 철회하자 일어난 변화다.

직원들은 잡플래닛 게시판에 이렇게 썼다. “적자 한 번에 무너진 좋은 문화.” “조직 활성화를 하는 데 과거 5년을 썼으나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언제 그랬냐는 듯 과거로 회귀하는 모습은 결코 환영받는 게 아니다.” “최고 경영층의 한마디로 주말에 근무하거나 불합리하게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직원들은 연봉이 아니라 회사가 하는 일에서 메시지를 읽는다. 조직원의 건강을 걱정하는지, 가정 등 ‘일과 생활의 균형’을 배려하는지 등 때로는 사소한 것에서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얻거나 일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2008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선 구내식당 밥값을 1천원에서 2천원으로 올린 사건이 있었다. 금융위기가 닥치자 직원들에게 경영 환경의 변화를 체감하게 하려는 조처였다. 많은 연봉을 받는 삼성전자 직원들이지만 밥값 1천원에도 사기는 눈에 띄게 떨어졌다. 익명 게시판에선 경영진을 성토했다. 결국 부사장급 인사팀장이 사원 대표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사과하고 밥값을 원래대로 내렸다.

당시 수원사업장에서 일했던 전 삼성전자 직원은 “밥값을 2천원으로 올린 것은 비용을 절감하려는 게 아니라 직원들 정신을 무장시키려는 것이었다. 직원을 긴장시켜야 한다는 시대착오적 발상이었는데 경영진이 그래도 역효과가 있다는 것을 빨리 눈치챘다”고 기억했다. “점심시간을 지키라고 하거나 출근을 빨리 하라는 경영 방침을 두고 나쁘다 좋다고 할 게 아니라 이게 실제 경쟁력에 도움이 되는지 삼성은 그때 계산을 잘한 거죠.”

직장인 교육전문 업체 ‘휴넷’의 조영탁 대표는 기업의 근무기강 잡기를 고리타분한 방법이라고 비판한다. “주말에도 출근하고 야근 독려하는 게 옛날처럼 먹힐까. 애플이나 구글, 중국의 알리바바나 샤오미를 보면 직원들의 창의성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그런데 우리는 임원들이 총수에게 ‘열심히 한다’는 것만을 보여주려 한다. 기업들의 경영관리가 낙후돼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심각한 상황이다.”

경영진 반성과 사과부터 시작해야
자료: 잡코리아(6월23~26일 직장인 1365명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

자료: 잡코리아(6월23~26일 직장인 1365명 대상 온라인 설문조사)

한 철강업체에서 일하는 직원은 올해 다시 한번 회사에 실망했다. 두 달 전 회사는 팀장급 이상은 토요일마다 출근하고, 평직원들은 평일에 30분 일찍 출근하고 30분 늦게 퇴근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위기의식을 공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참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회사 내 전략적이고 굵직한 선택은 모두 윗사람이 한다. 실무자들은 그 결정을 따를 뿐이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상부 경영진이 책임을 지는 게 맞다. 진정성 어린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사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모습은 없고 ‘출근 빨리 하고 퇴근 늦게 하라’는 조처가 나온다.”

리더가 보이지 않고 비전도 보이지 않는 회사에 열정을 갖고 달려들 직원은 없다. 임원들이 강조하는 일에 대한 몰입이나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열정에서 나온다. 세계적인 기업 구글의 전 최고경영자 에릭 슈미트는 자신의 책 에서 “전문성과 창의력을 가진 직원에게는 스스로 통제할 권한을 줘라. 그러면 그들은 대개 어떻게 하면 생활의 균형을 찾을 것인지 알아서 최선의 결정을 내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기업은 ‘스스로’와 ‘최선의 결정’을 직원에게서 빼앗고 있다.

글·사진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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