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창의와 열정은 계속됩니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끝내 쓰지 않았다. 마지막 광고였으되, 끝이라고 여기진 않은 탓이다. 앞으로 2주 안에 기적처럼 기업 인수·합병(M&A)이 성사되지 않는 이상, 팬택의 24년 역사에 마침표가 찍힌다. ‘단언컨대’ 팬택의 마지막 광고가 될 테다. 5월27일치 2면 하단에 실린 9단짜리 광고에는 팬택 직원 1200여 명의 이름 하나하나가 새겨졌다. 파산을 앞둔 회사에 대한, 그동안 팬택 제품을 써준 고객을 향한 직원들의 작별 인사였다. “지금 팬택은 멈춰서지만, 우리의 창의와 열정은 멈추지 않습니다. 팬택을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을, 우리는 잊지 않겠습니다.”
광고가 실리기 전날인 5월26일, (주)팬택은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폐지를 신청했다. 스스로 ‘산소호흡기’를 떼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지난해 8월19일 법정관리를 신청한 지 10개월 만의 일이다. “어려운 경영 상황을 타개하고자 월급을 자진 반납하고 휴직을 실시하는 등 비용 절감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M&A를 통한 경영 정상화를 목표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10개월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팬택의 기업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주는 적합한 인수 대상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법정관리인을 맡고 있는 이준우 팬택 대표이사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주주, 채권단 및 협력업체를 포함한 이해관계자 여러분께 머리를 조아려 사죄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에 때맞춰 직원들이 ‘마지막 광고’를 준비했던 건 아니다. 지난 4월 말께 팬택 사내 익명게시판에 제안이 하나 올라왔다. 직원들 이름으로 신문에 광고를 내자는 아이디어였다. 당시 1200여 명에 이르던 직원 상당수는 무급휴직에 들어간 상태였다. 지난해 9월부터 급여 반납운동을 하고, 지난 4월22일 “회사를 살릴 수 있다면 고용 유지도 포기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하면서 간절히 회사의 M&A를 기다리던 직원들의 마음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 사람당 5천원씩 모으기로 했다. 힘든 시기였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싶다는 마음은 순식간에 통했다.
‘팬택! 힘내요!!’ ‘다시 일어서자 팬택’ ‘팬택 사랑해’ ‘나의 청춘 팬택’ ‘잘 싸웠다 팬택’ ‘끝은 없는 것이다’…. 통장에 찍힌 ‘보낸 분’ 자리에는 이름 대신 직원들의 절절한 마음이 담겼다. “통장에 찍히기 시작한 희망 메시지에 가슴이 울컥했다. 5월부터 팬택은 겨울잠에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4월 말이면 직원들 마음이 제일 많이 안 좋을 때였는데 광고비 모금운동을 하면서 ‘끝까지 같이 해보자’는 마음으로 집에 갔다. 우리들끼리는 인정이 있고, 진정성이 있고, 열정이 있는 ‘삼정’(三情) 기업이라고 이야기해왔는데 그래서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광고기획 실무를 맡았던 김진희 차장의 말이다. 은 팬택 직원들의 마음을 알고는 광고비 받기를 마다했다.
직원들은 마지막 발자국을 하나 더 찍었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팬택 본사 건물 2층 유리창에는 ‘I ♡ 팬택’이라는 문구가 붙었다. 지난 4월30일 마지막 출근날, 직원들이 소박하게 꾸민 일종의 카드섹션 퍼포먼스였다. 포스트잇 7천여 장을 공수해와서 직원 20여 명이 글자를 꾸몄다. 노란색 종이로 바탕을, 파란색으로 글자를, 분홍색으로 하트를 만들었다.
지난 5월28일 찾은 팬택 본사 2층 접견실 뒤쪽 유리창에는 여전히 색색의 종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건물 유리창은 쨍한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하지만 32℃까지 치솟은 바깥 날씨와 달리, 팬택 본사 건물 안은 스산할 지경이었다. 5월부터 인사·회계팀 등 100여 명의 필수 인력만 출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층짜리 건물 안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본사 건물은 2008년 경영난에 부닥쳤을 때 네덜란드 부동산개발회사에 매각한 상태다.
경기도 김포에 있는 공장도 썰렁하긴 마찬가지다. 570여 명에 이르는 생산인력 가운데 이날 공장에 출근한 인원은 30여 명뿐. 생산직의 80%가량은 무급휴직 중이다. 지난해 7월부터 공장은 사실상 셧다운 상태다. 출근 중인 직원들도 월급은 절반밖에 받지 못한다. 협력업체 550여 곳 가운데 절반 이상은 이미 도산했다. “막막하다. 이제 올 데까지 왔구나 싶다. 그나마 팬택이라는 회사가 살아남으면, 무급휴직이든지 뭐든지 재기할 여지가 있으리라 믿었는데….” 박덕규 노조위원장은 말끝을 흐렸다. 그나마 해외 주문 물량 등을 위해 부분 가동되던 공장도 6월부터는 전면 가동이 중단된다.
매각 무산, 6월께 파산 선고될 듯팬택이 산소호흡기를 뗄 시점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법원은 채권자 등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물어 2주 안에 ‘회생계획안 인가 전 폐지’(임의적 파산선고) 결정을 하게 된다. 법원이 파산을 선고하면, 채권자들은 파산법이 정한 기준에 따라 팬택의 남은 자산을 나눠갖고 그 뒤 법인 해산(청산)이 완료된다. 각종 특허권과 김포공장 매각대금 등 팬택의 청산가치는 1500억원 정도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해 팬택의 부채는 9961억원에 이르렀다.
앞서 팬택은 세 차례 공개매각을 시도했으나, 모두 무산됐다. 적당한 임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팬택의 매각주간사인 삼정회계법인과 KDB대우증권은 몇 군데로부터 인수의향서(LOI)를 받았지만, 법원은 이들 업체가 자금 여력이 충분하지 않거나 회사를 운영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2차 매각 때 인수 의향을 밝혔던 미국 자산운용사는 인수대금을 최종 입금하지 못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탄생과 소멸은 당연하다.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버티지 못하는 기업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팬택의 실패는 안타깝다. 한국 사회 제조업체 가운데 대기업과 맞서 버텨온 거의 유일한 벤처기업인 까닭이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회사를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재벌 틈바구니에서 샐러리맨이 맨손으로 일궈낸 기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벤처 신화’를 증명한 회사다. 팬택 직원들이 느끼는 좌절과 억울한 감정의 뿌리도 결국 여기에 있다.
팬택의 창업주는 맥슨전자 영업사원 출신의 박병엽 전 팬택 부회장이다. 그는 1991년 아파트를 팔고 남은 돈 4천만원을 종잣돈 삼아 회사를 설립했다. 직원은 엔지니어 4명을 포함해 6명이었다. 팬택은 이듬해 무선호출기(삐삐) 사업을 시작했다. 1997년 회사의 매출은 762억원까지 성장했다. 그러나 시장은 삐삐에서 휴대전화로 빠른 속도로 옮겨가고 있었다. 팬택은 영리하게 시장의 변화를 포착했다. 휴대전화 생산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모토롤라로부터 1500만달러 투자를 받아내고, 하이닉스전자(전 현대전자) 휴대전화 사업부가 분사한 현대큐리텔을 2001년 인수했다. SK텔레콤 전용 브랜드인 ‘스카이’ 휴대전화를 생산하던 SK텔레텍도 2005년 인수해, 2006년 연매출 3조원의 글로벌 기업으로 몸집을 불렸다.
팬택은 기술력으로 승부를 걸었다. 2001년 국내 최초 카메라폰, 2002년 국내 최초 슬라이드폰, 2004년 세계 최초 지문인식폰, 2010년 국내 최초 안드로이드폰 출시 등 팬택 제품에는 항상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하지만 위기도 함께 찾아왔다. 2005년 SK텔레텍 인수 뒤 공격적으로 해외에 진출하면서 경영난을 겪게 된 것이다. 2006년 1차 워크아웃(기업구조 개선작업)에 들어갔다가 5년 만인 2011년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그 가운데서도 2010년 휴대전화 시장에서 LG전자를 제치고 국내 2위로 올라서기도 했다. 21분기 연속 흑자도 기록했다.
2012년 3분기,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영업이익은 흑자에서 적자로 돌아섰고 이후로는 쭉 내리막길을 걸었다. 직원 800여 명을 구조조정했다. 박병엽 부회장은 책임을 지고 2013년 9월 회사를 떠났다. 그는 이미 1차 워크아웃 당시 4천억원대의 회사 지분을 모두 내려놓은 상태였다.
팬택은 2014년 3월 2차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 무렵 정부는 이동통신업체들의 과열 보조금 경쟁에 대해 45일간 ‘영업정지’라는 칼을 빼든 상태였다. 휴대전화가 팔리지 않으니 돈줄은 더 꽉 막혔다. 팬택은 세계 최초로 ‘끊김 없는 금속 테두리’를 탑재한 ‘베가 아이언2’ 모델을 그해 5월 내놨으나, 준비했던 제품 20만 대 가운데 절반도 팔지 못했다. 그해 10월부터 시행된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단통법)으로 인해 휴대전화 유통시장은 점점 더 얼어붙는 상황이었다. 자금이 바닥난 팬택에는 치명타였다.
팬택의 몰락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휴대전화에서 스마트폰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팬택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기가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모토롤라, 노키아, 블랙베리 같은 휴대전화 제조업체들도 쓸쓸히 퇴장했던 터다. 더 이상 ‘하드웨어’의 혁신이나 기술력만으로는 스마트폰 시장을 주도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최근 출시한 삼성전자의 ‘갤럭시S6 엣지’나 LG전자의 ‘G4’ 등 야심작들이 별 재미를 못 보는 까닭이기도 하다. 중국 휴대전화 시장 1위인 ‘샤오미’처럼 소프트웨어에 공을 들였어야 했다. 팬택은 뒤늦게 깨달았다. 팬택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15% 안팎에서 2015년 1분기 기준 3%대까지 추락했다.
“기술력이면 다 될 줄 알았다. 우리는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했다. 제3자가 보기엔 ‘쉽지 않은 게임’이라고 혀를 끌끌 찼을지 몰라도, 팬택 구성원들은 삼성보다, 애플보다 앞서려고 도전해왔다. 내가 비록 3등이지만 1등보다 나은 3등이 될 거란 생각으로 일해왔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우리가 마케팅 전쟁에서 졌지, 기술 전쟁에서 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양율모 팬택 홍보담당 상무는 회사에 대한 여전한 자부심을 내비쳤다.
“회사가 6월 파산선고 전에 매각될 가능성은 없을까요?” 빤하면서도 잔인한 질문을 던졌다. “기적처럼 M&A가 된다면 몰라도….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30여 분 만에 처음으로 말이 끊겼다. 뜨거운 바람이 훅 치밀어올랐다. “담담하게…, 기다리거나 할 수밖에 없죠.”
회사 임원 ‘단기기억상실증’ 걸리기도
양 상무를 포함해 여전히 회사에 남아 있는 이들은 힘겹게 마지막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회사의 한 임원은 법정관리 폐지 신청을 했던 지난 5월26일 단기기억상실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직원들에게 보고를 받던 그의 기억은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이전인 2014년 여름에 멈춰서 있었다.
“우리의 꿈은 단 하나. 세상 가장 멋진 폰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정상에 오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질주를 멈출 수 없는 건, 휴대폰 하나만 바라보며 달려온 우리의 열정이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기 때문이다. 지지 않는다. 고로 존재한다.” 2013년 팬택의 기업 이미지 광고에 깔렸던 내레이션이다. 팬택은 이제 질주를 멈춘다. 벤처의 신화도 함께 멈췄다. 스마트폰 소비자들은 제3의 선택지를 잃었다. 고로 한국의 재벌 신화는 더 공고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팬택인들의 열정, 도전 정신만은 멈추지 않기를.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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