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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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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자본에 오염된 ‘판타지’

한국 정치·경제 권력과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해온 스포츠… 회장님의 아주 비싼 여가활동은 어떻게 ‘구원투수’ 되나
등록 2013-11-06 14:59 수정 2020-05-03 04:27
‘호플리스’는 의학적으로 더 이상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된 환자를 가족의 원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떼고 집으로 모셔가는 ‘희망 없는 퇴원’을 뜻한다. 서울시립동부병원의 진료 모습.김명진

‘호플리스’는 의학적으로 더 이상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된 환자를 가족의 원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떼고 집으로 모셔가는 ‘희망 없는 퇴원’을 뜻한다. 서울시립동부병원의 진료 모습.김명진

운동화를 신은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 잠실야구장 마운드에 올랐다. 왼손엔 태극기가 그려진 파란 글러브를 꼈다. 당일 아침에야 갑작스레 결정된 ‘깜짝 시구’였다. 하늘색 셔츠 차림의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일반 관중석에서 이 모습을 지켜봤다. 박 대통령이 경기장을 떠난 뒤에 도착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딸과 함께 VIP석에 자리잡았다. 지난 10월27일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삼성 라이온즈와 두산 베어스의 3차전이 열리던 날의 경기장 풍경이다.

왜 기업들은 프로야구에 목 매는가

다음날 신문에는 환하게 웃는 박 대통령과 두 재벌 총수의 얼굴이 나란히 실렸다. 박 대통령에게선 ‘신관권선거’를 둘러싼 정치적 긴장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경기는 나라님과 기업을 위한 ‘잔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이름을 딴 ‘박스컵’(Park’s Cup)이란 국제축구대회를 만들어 시축했고(197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은 6개 대기업에 할당하는 방식으로 6개월의 준비 만에 프로야구리그를 출범시켜 개막식에서 첫 번째 공을 던졌다(1982년). 박근혜 대통령이 시구한 올해 프로야구의 타이틀 스폰서는 한국야구르트였다. 한국야쿠르트 창업주 윤덕병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 출신이다. 얄궂은 우연이다.

한국 정치·경제 권력과 스포츠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해왔다. 특히 프로야구와 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을 통해, 9개 프로야구 구단의 지난해 매출액과 당기순이익을 확인해봤다. 롯데 자이언츠(95억원), 두산 베어스(82억원), 한화 이글스(70억원), SK 와이번스(4억7천만원)만 이익을 냈지, 나머지 5개 구단은 적자였다. 그나마도 한화는 류현진 선수의 미국 이적료로 받은 280억원 덕분에 전년도 적자에서 일시적인 흑자로 돌아섰을 뿐이다. 재벌가를 등에 업지 않은 NC 다이노스(-6억5천만원)와 넥센 히어로즈(-45억원)의 출혈은 컸다. 사실 프로야구 구단은 해마다 대부분 손해 보는 장사를 한다. 전용구장 입장료와 용품 판매 등의 수익원이 있긴 하지만, 그룹 계열사들이 광고비 등으로 매출액의 절반가량을 떠받쳐주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구조다. 삼성 라이온즈만 해도 지난해 매출은 534억원으로 업계 최대였지만, 당기순손실 1억3천만원을 기록했다. 삼성의 선수 연봉 총액은 9개 구단 중 최고(2013년 67억원)다.

그런데도 왜 기업들은 프로야구에 목을 매는 걸까? 지금까지 프로야구 구단을 소유해본 기업은 17곳에 이른다. 해태·쌍방울·태평양·현대 등은 비용을 감당치 못해 떠났다. 2015년엔 KT가 10구단으로 새롭게 합류한다. “국민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일종의 사회공헌 활동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의 설명이다. 꼭 야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축구·농구·배구 등 국내엔 모두 50여 개의 프로스포츠 구단이 존재한다. 사격·승마(한화), 양궁(현대·기아차), 핸드볼(SK), 탁구(대한항공), 사이클(LS) 등 비인기 종목을 개별 기업이 거의 책임지다시피 맡기도 한다. 스포츠 지원을 ‘봉사’처럼 여기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엔 “체력은 국력”이라며 각종 체육협회장에 기업인을 앉혀 스포츠 부흥에 강제 동원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프로야구 출범 때 기업의 팔을 비틀다시피 구단을 맡겼다. 애초 출발점이 돈 벌 목적이 아니었던 셈이다. 다른 대기업 관계자는 “일단 스포츠 구단을 시작한 이상 기업 이미지나 팬, 연고지를 생각해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배 프로야구’ 따내려면 50억 이상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 효과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TV로 야구 경기가 생중계되는 동안, 선수들 몸과 경기장 곳곳은 ‘광고판’으로 변신한다. 올해 프로야구 한 경기당 평균 관중 수는 1만1183명. 2006년 이후 줄곧 이어져온 상승세가 7년 만에 감소세로 돌아서긴 했지만, 여전히 야구는 최고 인기 스포츠다. ‘○○배 프로야구’라는 타이틀 스폰서 자리를 얻기 위해, 매년 한국야쿠르트·팔도·롯데카드 등의 기업이 50억원 이상을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내놓는다.

재벌 가문일수록 ‘회장님’의 스포츠 사랑은 남다르다. 구본준 부회장(LG), 신격호 회장과 신영자 사장(롯데), 박정원 회장(두산), 김승연 회장(한화)은 프로야구 구단의 사내이사다. 이건희 회장(삼성)과 김승연 회장은 구단의 지분도 갖고 있다. ‘회장님’의 관심은 구단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기업 소속 프로야구단장이었던 한 인사는 “재벌 총수들이 보통 경기장을 찾을 때는 금일봉을 가져와 힘을 북돋워준다. 어떤 때는 좋은 영향을 미치지만, 선수들이 쫄아서 경기를 더 못하는 악영향도 있다”고 말했다. “페라리 같은 스포츠카를 사듯이, 재벌 총수들의 소유욕이나 과시욕이 프로 구단 소유와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선수단에 찾아가 ‘50억원 더 지원해줄게’라고 선심 쓰며 폼도 잡고 기분도 내는, 아주 비싼 여가활동인 셈이다.” 를 쓴 정희준 교수(동아대 사회체육학과)의 비평이다.

스포츠 ‘왕관’은 멋있기만 한 게 아니라, 실용성도 있었다. ‘구원투수’ 역할을 톡톡히 해서다. 역대 양궁 금메달리스트들이 대한양궁협회장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을 선처해달라며, 2006년 정 회장을 수사 중이던 대검찰청을 찾아간 게 대표적이다. 2009년 이명박 전 대통령은 조세포탈 혐의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이건희 삼성 회장을 ‘단독’ 특별사면 시켜준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 복귀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열심히 뛰라는 격려였다. 앞서 2006년에도 박용성 전 두산 회장이 똑같은 이유로 사면된 바 있었다.

스포츠 마케팅의 역효과도 적지 않다. 재벌기업들이 툭하면 감독을 경질하고, 아껴 키운 선수를 물건처럼 이리저리 내돌리는 것에 야구팬들은 분통을 터뜨린다. LG 광팬으로 이번 LG-두산 플레이오프전 4차전을 모두 잠실경기장에서 직접 관람한 직장인 이아무개(36)씨는 “LG는 2003년부터 막장으로 구단을 운영해왔다. 난 LG 제품도 안 쓴다. 야구랑 기업은 별개”라고 말했다. 골수팬이 많은 롯데의 경우는 더 심하다. ‘짠돌이’ 구단에 불만이라서다. 롯데 연고지인 부산에선 ‘롯데’를 떼고 ‘부산 자이언츠’라고 부르는 팬들이 나올 정도다. 선수와 감독들도 ‘자본의 논리’에 분노한다. 선수협의회 창설을 주도한 마해영·양준혁 등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됐다. 태평양·삼성·쌍방울·LG·SK 등에서 구단과 갈등을 빚고 쫓겨난 김성근 감독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스포츠를 멋대로 움직이는 재벌’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김성근 감독은 현재 프로야구에서 방출되거나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명되지 못한 독립군들로 꾸린 고양 원더스를 지휘하고 있다.

원년 이름 그대로인 건 삼성, 롯데 뿐

한 현직 프로야구단장은 “30년 이상 된 프로야구 역사를 보면, 원년 이름을 그대로 갖고 있는 구단은 삼성과 롯데뿐이다. 경영학에선 기업 수명을 30년으로 본다. 모기업이 힘들면 야구도 힘들어지는 구조다. 보다 안정적인 구단 운영 방식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재벌 구단들 틈바구니에서 처음 ‘가을잔치’에 초대된 넥센, 10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LG, ‘4등’ 바닥에서 시작해 한국시리즈에 오른 두산.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고, 누군가에겐 용기를 주었다. 스포츠는 꿈이다. 비록 정치와 자본에 오염된 ‘판타지’일지라도.

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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