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에서 매년 9월 열리는 유럽 최대의 가전전시회인 IFA의 상징색은 빨간색이다. 공식 로고도 빨간색이고, 매년 뽑는 ‘미스 IFA’는 머리를 빨간색으로 물들이고 빨간 드레스를 입는다. 하지만 올해 IFA가 열리는 ‘베를린 메세’ 정문 앞을 채운 것은 파란 삼성 깃발의 물결이었다. 정문 앞의 깃대 160개는 159개의 삼성 깃발과 1개의 유엔 깃발이 채웠다. 정문을 들어가서 바로 오른쪽, 메인 전시홀이나 마찬가지인 20번 홀은 삼성전자의 텔레비전과 새 스마트폰 갤럭시노트3, 갤럭시기어가 전시됐다. 전시장 왼쪽 건물에는 LG의 붉은 깃발과 스마트폰 G2의 커다란 광고가 걸렸다. 유럽 가전시장을 거세게 공략 중인 한국 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 선봉에 UHD가 있었다.
가격 인하시 교체 수요 폭발 가능성
IFA는 미국의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스페인의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와 함께 세계 3대 전자쇼로 불리기는 하지만, 생활가전에 특화된데다 연말이 다가오는 시기에 열리기 때문에 새로운 제품이 쏟아지는 전시는 아니다. 대부분의 새 제품은 연초에 CES에서 화려하게 데뷔한다. 하지만 올해는 양상이 조금 달랐다. 현재 급박하게 벌어지고 있는 초고화질(UHD) 시장 선점을 위한 기술 경쟁이 불붙었기 때문이다.
포문을 먼저 연 것은 삼성전자로 9월5일 저녁(현지시각) 65인치의 곡면(커브드) 액정표시장치(LCD) UHD TV를 깜짝 공개했다. 이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LG전자다. LG전자는 그날밤 최고경영진이 모여 회의를 거듭한 끝에 혹시나 해서 가져온 현존 최대 77인치 UHD 곡면 올레드 TV의 박스를 열기로 했다. LG전자 권희원 사장은 “뭔가를 하나 내놓으면 곧 다른 업체들이 따라오게 된다. 이번에 공개 안 하고 내년 CES 때 하려고 했는데…”라며 못내 아쉬워했지만 기술 경쟁에서 뒤진다는 인상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UHD는 풀HD보다 4배 이상 화질이 좋은 텔레비전을 총칭한다.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시장이지만 가전업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고 있다. 현재 평판 TV 시장은 거의 완전한 포화상태다. 전세계 TV 시장에서 LCD TV의 침투율(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0% 정도로 추산된다. 10명 중 9명은 이미 LCD TV를 구입했다는 말이다. 그동안 텔레비전 업체들은 다시 텔레비전 구입 붐을 일으키기 위해 스마트 TV니 3D TV 등의 개발에 몰두해왔지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UHD는 다르다. 화질이 크게 좋아지기 때문에 UHD가 대세가 된다면 예전 브라운관 TV에서 평판 TV로 바뀔 때처럼 엄청난 수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가전업체들의 기대다. 반면 그동안 IFA 전시장을 채웠던 3D TV는 쑥 들어갔다. 삼성전자는 IFA에서 풀HD와 UHD를 비교전시했는데, 언뜻 봐도 화질 차이가 상당했다. 신문 10여 개를 찍은 화면에서 풀HD는 본문 글자가 뭉개져 보이지만 UHD는 또렷하게 보였다. 가격만 어느 정도 내려온다면 UHD로의 교체 수요가 폭발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소니의 무기는 UHD 콘텐츠 환경
UHD 기술 경쟁에서는 한국 업체들이 한발 앞서는 모양새다. 삼성은 지난 CES 때 공개했던 110인치 UHD를 비롯해 98인치, 85인치, 65인치, 55인치까지 다양한 제품군을 선보였고 이번에 65인치 곡면 제품까지 내놓았다. 삼성의 곡면 UHD에서 눈에 띄는 점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가 아니라 LCD를 휘었다는 것이다. 자체 발광하기 때문에 화면을 밝게 해주는 백라이트가 필요 없고 얇게 만들 수 있는 OLED에 비해 LCD는 훨씬 휘기가 힘들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일본 소니도 이번에 ‘세계 최초’ 타이틀을 달고 휘어진 LCD TV를 내놓았는데, UHD 화질까지 구현한 삼성에 밀려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LG는 현재 올레드에서 구현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인 77인치를 내놓으며 곡면 TV의 크기 경쟁에서 한발 앞서나갔다.
한국 업체들에 맞설 만한 유일한 업체는 일본의 소니였다. 소니는 이번 IFA 전시회에서 단일 부스로는 최대 규모의 부스를 차렸다. 삼성전자의 부스가 TV·모바일과 생활가전으로 나뉘어 차려진 때문이다. 상반기 UHD 시장 점유율 1위(디스플레이서치 기준 37.8%)인 소니는 UHD 시장에서 잡은 승기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소니의 무기는 UHD 콘텐츠 환경이다. UHD는 현재 TV는 출시됐지만 콘텐츠가 턱없이 부족하다. 하지만 소니는 소니픽처스라는 거대 영화사를 계열사로 갖고 있는 만큼 콘텐츠 확보 경쟁에서 유리하다. 이번 IFA에서 소니는 UHD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다운받아 TV에서 재생할 수 있는 전용 미디어 플레이어를 내놓았다. 일본은 2014년부터 4K(UHD의 일본식 표현) 방송을 시작할 계획을 갖고 있어 전반적인 콘텐츠 생태계에서 우리나라보다 한발 앞서 있다. 파나소닉 등 다른 일본 업체들도 UHD TV 출시를 확대하며 소니를 뒤따르고 있다.
중국 업체들은 아직 기술적으로 한발 뒤처져 있지만 가격과 물량에서는 엄청난 기세를 보였다. 올해 상반기 UHD 시장 점유율에서는 소니와 LG를 빼면, 하이센스(10.8%), 스카이워스(9.8%), 창훙(8.2%), TCL(7.8%) 등 중국 업체가 상위권을 장악하고 있다. TCL과 하이센스는 삼성과 같은 크기의 110인치 UHD를 선보였고, 창홍은 85인치 UHD TV를 내놓으며 35인치부터 85인치까지 다양한 UHD 제품군을 갖추게 됐다. 하이얼도 50인치부터 65인치까지 다양한 라인업을 공개했다. 중국산 UHD는 싸게는 150만원대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500만원이 훌쩍 넘는 한국과 일본 제품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중국산은 한눈에 보기에도 화질이 좋지 않았다. 쨍하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화질이 선명한 우리나라나 일본 제품과 달리, 중국산 UHD의 화질은 흐리멍텅했고 색깔도 번져 보였다. ‘그래도 UHD인데’ 싶어 국내 전자업체 관계자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화질을 좋게 만드는 업스케일링 기술, 화질 칩의 성능, 부품 간 연결, 패널의 품질 등이 총체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중국 업체들의 추격세는 무섭다. 한 관계자는 “올해 초 CES만 해도 중국 업체들의 수준은 저것보다 훨씬 낮았다. 반년 만에 많이 따라왔다”고 평가했다.
6시간 걸리는 ‘에너지 효율의 역습’
UHD를 제외하면 다른 생활가전은 특별히 눈이 번쩍 뜨이는 신제품이 보이지 않았다. 원전을 신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움직임이 거센 유럽에서는 이에 따라 전기요금이 매년 10% 넘게 오르고 있고, 그 때문에 에너지 효율을 크게 높인 제품이 각광을 받는 모습이었다. 전시회장 도처에 ‘A+++’ 표시가 보였다. 유럽 에너지 등급 중에서 최고인 A+++(에이트리플) 등급을 받은 제품이라는 뜻이다. 보슈는 한술 더 떠 ‘A+++-50%’ 등급의 세탁기를 내놓았다. A+++보다 50%나 에너지를 적게 사용한다는 뜻이다. 엄청난 에너지 효율을 보이는 것 같지만 그만큼 세탁 시간도 오래 걸린다. 에너지를 적게 쓰면서 옷에 묻은 때를 잘 빼내자면 세탁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단다. 최고 효율로 세탁기를 가동하면 세탁 한 번 하는 데 6시간30분이 걸린다. 세탁기를 돌리고 자면 다음날 아침에 완료되는 수준이니 말 그대로 ‘에너지 효율의 역습’인 셈이다.
베를린(독일)=이형섭 경제부 기자 sub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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