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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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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범이 일깨운 ‘체첸의 비극’

체첸계 차르나예프 형제가 환기한 잊혀진 ‘체첸전쟁’… 전쟁과 협상, 파기와 테러 뒤 친러파 ‘젊은 독재자’ 통치
등록 2013-05-05 15:59 수정 2020-05-03 04:27

타메를란과 조하르 차르나예프 형제는 가공할 범죄를 저질렀다. 타메를란 차르나예프는 이미 죽음으로 ‘죗값’을 치렀다. 조하르 차르나예프는 온몸에 총상을 입은 채, 최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혐의로 기소됐다. 키르기스스탄·다게스탄·체첸 등지를 떠돌다 2002년 미국에 도착한 차르나예프 형제의 비극은 그들 민족의 역사와 기이하게 닮아 있다. 그들의 범죄가, 철저히 잊혀졌던 ‘체첸전쟁’의 기억을 되살려낸 것도 이 때문이다.
92년, 의회와 두다예프 정권 간 내전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낀 땅을 북캅카스(코카서스)라고 부른다. 다게스탄·체첸·잉구셰티아 등 러시아 남부의 자치공화국이 ‘유럽의 지붕’ 격인 그곳 험준한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다. 러시아연방 가운데 인종적으로 가장 다양한 자치공화국으로 꼽히는 다게스탄과 달리, 체첸과 잉구셰티아는 인구의 60% 이상이 각각 체첸인과 잉구슈인이다. 두 종족은 흔히 ‘바이나크’로 불리는데, 이들의 조상은 기원전 약 1만 년 전부터 캅카스산맥 북동쪽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는 게 인터넷 백과사전 의 설명이다.
지금의 체첸 땅이 러시아에 병합된 것은 19세기 말~19세기 초다. 긴 무장투쟁 끝에 무릎을 꿇긴 했지만, 체첸인들의 저항은 이후에도 그칠 줄 몰랐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44년에도 체첸인들은 잉구슈인들과 합세해 모스크바에 맞섰다. 1944년 이른바 ‘렌틸 작전’으로 이오시프 스탈린 정권이 약 50만 명에 이르는 바이나크 종족 전체를 북캅카스에서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 등지로 강제 이주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에게 ‘귀향’이 허락된 것은 1957년께다.
영국의 과 <bbc>의 자료를 종합하면, 숨죽이고 살아가던 체첸인들의 저항의식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은 옛 소련이 해체 수순으로 접어든 1980년대 말부터다. 치열한 내부 투쟁 끝에 1991년 10월 체첸공화국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옛 소련의 공군 장성 출신 조하르 두다예프가 90%의 압도적 득표율을 올리며 당선됐지만, 이내 부정선거 시비가 불거졌다.
취임 직후 두다예프 대통령은 ‘체첸 이츠케리아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러시아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한 게다. 체첸 야권은 러시아와 결탁했다. 1991년 11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체첸 자치공화국’ 일대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러시아군을 수도 그로즈니 인근 공항으로 급파했다. 두다예프 대통령은 즉각 계엄령을 선포한 뒤, 자치공화국 방위군에 전시 소집령을 내리며 맞섰다. 때맞춰 러시아 의회가 옐친 대통령의 강경몰이에 반기를 들면서, 러시아군은 곧 체첸 땅을 떠났다.
1992년 3월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연방에 남는 대신 체첸공화국에 포괄적인 자치권을 주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협정을 제안했다. 두다예프 대통령은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착 상태가 이어지는 새, 체첸 쪽은 소비에트 시절 이주해온 러시아계 주민들을 내몰았다. 이는 곧 러시아가 지원하는 체첸 의회와 두다예프 정권 간 내전으로 이어졌다. 제1차 체첸전쟁의 서막이다.
1994년 11월25일 러시아군의 헬리콥터와 탱크 지원을 받은 반군세력이 그로즈니를 때려대기 시작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9일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군에 ‘체첸 탈환 명령’을 내렸고, 이틀 뒤인 12월11일 러시아군 4만 명이 체첸을 공식 침공했다. 러시아군은 수도 그로즈니를 포함해 도시 지역에 맹폭을 가했다. 그해 12월31일부터 이듬해인 1995년 1월19일까지 파상 공세가 이어졌다. 러시아군이 그로즈니에 진주했을 때, 도시는 말 그대로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러시아, 연이은 테러에 체첸 재침공
두다예프 대통령 쪽이 병력을 재정비하는 사이, 러시아군은 체첸 정부군의 거점 지역을 초토화했다. 숱한 이들이 스러져갔다. 러시아가 체첸에 이른바 ‘국가재건 정부’를 수립한 것은 1995년 3월이다. 그해 7월30일, 이제는 ‘반군’이 된 두다예프 대통령 쪽과 러시아 사이에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석 달도 지나기 전에 깨졌다.
두다예프 대통령은 이듬해인 1996년 4월21일 휴대전화를 사용하던 중, 러시아군의 정밀 유도미사일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사망 당시 그는 러시아 뒤마(하원)의 진보파 의원과 평화협상을 의논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제밀칸 얀다르비예프는 곧 협상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불과 한 달여 만인 그해 5월27일, 체첸공화국의 ‘지위’에 대한 최종 결정을 2001년까지 연기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제1차 체첸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줄잡아 6만~10만 명에 이른다.
러시아군은 1997년 1월 체첸에서 철수를 마쳤다. 때를 같이해 치러진 대선에선 반군 지도자 출신 아슬란 마스카도프가 체첸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혼란은 이어졌다. 1998년 7월23일과 1999년 4월10일, 두 차례나 마스카도프 대통령을 겨냥한 미사일 공격이 퍼부어졌다. 재건·복구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1999년 9월 모스크바 도심에서 잇따라 폭탄공격이 벌어져 200여 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구 독립을 주장하는 체첸 반군의 소행이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막 총리에 임명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지체 없이 다시 러시아군을 체첸으로 보냈다. 제2차 체첸전쟁의 시작이었다. 푸틴 총리는 그로부터 8개월 뒤인 2000년 5월 러시아연방 대통령에 오른다.
개전 초기 러시아군은 일주일여 폭격을 퍼부어댔다. 수많은 이들이 다시 피란길에 올랐다. 남하를 계속한 러시아군은 1999년 12월15일 그로즈니 외곽에 도착했다. 압도적 화력 앞에서도 반군은 격렬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러시아군은 해를 넘겨 2000년 2월1일에야 그로즈니 도심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의 점령 치하에서도, ‘저강도 전쟁’은 도처에서 이어졌다. 2002년 10월엔 체첸 반군이 인질극을 벌이던 모스크바의 한 극장으로 러시아 특전사 요원들이 들이닥치면서 100명 이상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빚어졌다. 그럼에도 러시아 정부는 체첸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주는 내용을 뼈대로 한 새 헌법안을 마련해, 2003년 3월23일 국민투표에 부쳤다.
새 헌법안에 따라 그해 10월 대선이 치러졌다. 반군 진영의 참여가 철저히 배제된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80%의 득표율로 당선된 것은 이슬람 신학자 출신 아흐마트 카디로프였다. 제1차 체첸전쟁 당시 분리독립파의 선두에 섰던 카디로프는 1999년 제2차 전쟁이 시작될 무렵 러시아 쪽으로 돌아섰다. 앞서 푸틴 대통령은 2000년 6월 그를 체첸 ‘자치공화국’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한 바 있다.
‘카디로프 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집권 5개월여 만인 2004년 5월 폭탄공격을 받고 암살된 게다. 그해 8월 다시 치른 대선에선, 부정선거 논란 속에 경찰 간부 출신인 알루 알카노프가 당선됐다. 그는 1차 체첸전쟁 때부터 러시아 편에서 싸운 인물이다.
사병조직 앞세워 반대 여론 압살
알카노프 대통령은 ‘힘’을 쓰지 못했다. 실권을 쥔 것은 숨진 아흐마트 카디로프의 아들 람잔이었다. 아버지 정권에서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사병조직을 이끌었던 그는, 아버지 암살 이후 부총리를 거쳐 2005년 12월 총리 권한대행에 올랐다. 그는 즉각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따라 도박과 음주를 공식 금지했다. 2006년 3월엔 ‘권한대행’ 꼬리표를 떼냈다.
이듬해인 2007년 2월 푸틴 대통령은 알카노프 대통령을 전격 해임하고, 람잔 카디로프를 후임자로 지명했다. 람잔은 그해 3월2일 취임했다. 1976년 10월생인 그는 취임 당시 만 30살을 갓 넘긴 터였다. 러시아의 강력한 지지 아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병조직을 앞세워 반대 여론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젊은 독재자’는 지금껏 철권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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