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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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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위험천만한 ‘돈장난’

통화 풀어 경기 부양하려는 일본 정부… 투기 부추겨 거품과 변동성만 키울 수도
등록 2013-05-01 11:06 수정 2020-05-03 04:27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일본 정부의 과감한 경기 부양 노력에 세계의 시선이 온통 집중되고 있다. 디플레이션(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 불황의 진원지인 일본에서 과연 경기 활력이 되살아날 수 있을지, 또 일본의 실험이 역시 불황의 늪에 허덕이는 세계경제에 새로운 활로가 될 수 있을지 관심이 크다.
일단 주요 20개국(G20)으로 대변되는 국제사회는 일본의 디플레이션 탈피 노력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반응에는 1930년대 대공황의 경험이 안겨다준 교훈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세계경제의 위기 극복을 사실상 진두지휘해온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벤 버냉키 의장은 대공황 기간에 금본위제의 구속에서 벗어나 먼저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하고 통화 확대를 추진한 나라일수록 경기회복이 빨랐다는 데 주목한다. 또 집단적으로 볼 때, 이처럼 연이은 금본위제 이탈과 평가절하가 사실상 국제적 차원의 리플레이션(통화 재팽창) 정책 공조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당시와 달리, 지금은 세계경제가 동일한 디플레이션 충격에 직면한 것이 아니다. 금융위기와 재정위기의 연이은 충격에 시달리는 선진국 경제와 달리, 신흥국 경제는 대부분 잠재적 신용 과잉이나 인플레이션 위험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선진국의 통화 확대가 자칫 신흥국의 거품을 부추길 가능성이 문제가 된다. 이른바 ‘전염효과’를 둘러싸고 선진국과 신흥국 간에 마찰이 빚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변국 희생 강요할 ‘아베노믹스’
문제는 일본의 대규모 통화 완화 정책이 결국 일방적인 엔화 약세로 이어지면서 ‘근린궁핍화’를 야기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경기 회생 노력이 주변국의 희생을 대가로 삼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엔저의 파급효과, 특히 일본과의 수출 경쟁에서 낙오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미국 증시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일본 증시가 폭등세를 타는 와중에도 우리 증시가 부진을 면치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갈등 유인에도 불구하고, G20은 당장 이 문제를 현안으로 부각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시장에서는 G20이 사실상 엔저를 용인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물론 우리 정부는 최근 G20의 성명 내용을 두고, 일본의 디플레이션 극복 노력에만 동의한 것이지 ‘경쟁적 평가절하’의 일환으로서 엔저를 용인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한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해명만으로 엔-달러 환율의 추가적 상승을 점치는 시장의 기대심리를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제 엔-달러 환율 120엔 시대, 심지어 150엔 시대를 내다보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하지만 통화 확대가 반드시 엔저로 연결된다고 볼 이유는 없다. 이미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국을 비롯해 세계 주요국은 너도나도 양적 완화를 포함해 대규모 통화부양책을 시행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돈 풀기가 대규모 자금 유출과 통화 약세로 반영되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그저 시장의 ‘테마’로서 각종 투기 행위의 소재가 되면서 금융시장의 변동성을 키웠을 뿐이다. 사실 지금도 자금이 일본에서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2000년대 초반 일본의 1차 양적 완화는 이른바 ‘엔캐리 트레이드’(저금리의 엔화를 차입해 해외에 투자함으로써 금리차익과 환차익을 동시에 도모하는 전략)를 통해 엔화 약세는 물론, 나머지 나라들의 신용 거품에 일조한 것으로 평가된다. 지금도 글로벌 통화부양책에 따른 신용 과잉의 위험은 잠복해 있다. 하지만 엔캐리 트레이드 같은 연쇄적인 자금 이동 현상은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금리 격차 등 전형적인 환율 결정 요인으로 볼 때 국제적 차원의 광범위한 자금 이동에 필요한 유인을 찾기 힘든 탓이다.
OECD·S&P “재정위기 올 수 있다”
이뿐이 아니다. 대규모 돈 풀기 혹은 엔저를 통해 과연 일본 경제가 수혜만 누릴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같은 국제신용평가기관은 일본의 대규모 통화부양책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재정위기의 가능성을 경고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일본의 국채금리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행이 국채 보유 규모를 배로 늘리는 것을 결정했음에도, 정작 일본 국채금리는 최근 급격한 변동성을 보이며 불안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국가채무가 국내총생산(GDP)의 240%에 이르는 일본에서는 이자 상환 비용만 세수의 4분의 1에 이른다. 따라서 국채금리가 흔들리는 것은 일본의 재정건전성에 실로 골치 아픈 문제다. 게다가 일본 국채의 60% 이상을 보유한 금융기관들마저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경기 부양을 노리다가 자칫 재정위기나 금융위기를 초래할지 모를 일이다.
물론 아베노믹스는 통화 확대나 엔저 외에도 재정정책과 구조개혁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구성된다. 그간 일본의 경험을 보면, 재정 투입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회의론이 지배적이다. 결국 남는 것은 구조개혁인데, 이 역시 어떤 내용의 구조개혁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매개로 신자유주의의 취약성이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는 지금, 과거 일본의 금융개혁을 주도했던 고이즈미식의 구조개혁 열풍이 아직도 유효한지 의구심이 크다.
따지고 보면, 아베노믹스는 일본은행의 새로운 실험에 의존한 ‘외끌이 장세’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통화 확대가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을 개선시키기보다 주식 등의 자산가격 상승만을 이끌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는 또 다른 거품, 즉 펀더멘털과 자산가격 간의 극심한 괴리 위험이다. 최근 국제 금융시장에서 번지고 있는 훈풍 역시 이처럼 국제 리플레이션 공조에 의존한 새로운 거품 키우기는 아닌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FRB가 점진적으로나마 출구전략을 고민하기 시작한 마당에, 그 대타로 일본이 나선 꼴이다.
“일본 성장률 1% 넘어가면 거품”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엔화정책을 좌우하며 ‘미스터 엔’으로 불렸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는 최근 한국을 방문해, “‘성숙경제’인 일본에는 1%대의 성장률이 적절하며 그 이상은 거품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면서 성숙 단계에 걸맞은 ‘패러다임 시프트’가 필요하다며 생태·환경과 안전, 보건을 지속 가능한 성장의 3가지 축으로 제시했다. 일본 경제의 화려한 부활에 이목이 집중되는 상황에서 발본적인 문제제기인 셈이다. 아마도 지금 일본에 필요한 구조개혁의 요체는 이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최근 일본 경제의 부활이라는 담론은 오히려 다분히 정치적 언사에 그치는 모습이다. 특히 일본 집권여당에서는 경기 회생 노력의 한켠에서 영토 분쟁이나 군비 재무장 등 국수주의 행보에 힘이 실리고 있다. 경제의 새바람이라는 게 실은 정치적 선동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되는 대목이다. 새 정부를 맞은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의 아베노믹스와 맞물려 혁신적인 경기 부양의 필요성에 관심이 크다. 하지만 거듭되는 외풍에다 가계부채의 내홍을 앓고 있는 우리 경제에 진정으로 무엇이 중요한지 따져보는 것이 선결 과제 아닐까?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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