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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달난 ‘철도민영화’ 뒤에 외국자본 숨어 있다

등록 2012-10-09 18:20 수정 2020-05-03 04:26

거센 반대 여론에도 이명박 정부가 ‘철도산업 민영화’를 강행하고 있다. 정권 말기에 왜 국가 기반시설을 민간에 넘기지 못해 안달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다들 고개를 갸웃거린다. 지난 3월 체결한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GPA) 개정의결서가 최근 공개돼 그 의문이 다소 풀렸다. 역시, 외국자본이 숨어 있었다.

전국 광역 자치단체의 지하철에도 진출
박원석(무소속) 의원실이 공개한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의 WTO 정부조달협정 번역 초안을 보면 △일반 철도시설의 건설 및 조달 △일반 철도의 설계 등 엔지니어링 서비스 △일반 철도시설의 감독 및 경영의 조달 계획을 개방 대상으로 명시했다. 철도의 설계·건설·감독을 비롯해 시설 경영·관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외국자본이 진출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2015년부터 서울메트로·도시철도공사·인천메트로 등 전국 광역자치단체의 지하철 등에도 외국자본이 진출하도록 새로 길을 터줬다. 외국자본이란 정부조달협정에 참여한 유럽연합(EU), 일본 등 총 42개국의 철도산업체들을 말한다.
철도시장 개방을 왜 확대했을까? 이 박주선(무소속)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외교부와 국토해양부, 행정안전부에서 주고받은 2011년 11∼12월 정부조달협정 관련 공문들을 분석해보면 궁금증 퍼즐이 맞춰진다.

지난 4월 서울 세종로에 모인 ‘KTX 민영화 저지와 철도 공공성 강화를 위한 범대위’ 회원들이 KTX 민영화 정책 전면 폐기를 촉구하는 100만인 서명 용지를 청와대에 전달할 채비를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태형

지난 4월 서울 세종로에 모인 ‘KTX 민영화 저지와 철도 공공성 강화를 위한 범대위’ 회원들이 KTX 민영화 정책 전면 폐기를 촉구하는 100만인 서명 용지를 청와대에 전달할 채비를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태형

2011년 11월25일 외교부가 먼저 공문을 띄운다. ‘정부조달협정 4차 양허(개방)안’에 대한 검토의견을 보내달라고. 핵심 내용은 외국자본에 코레일 입찰과 지하철 산업을 추가로 개방할지를 국토부와 행안부가 결정해달라는 거였다. 이는 세계 철도산업을 주름잡고 있는 유럽 국가들의 요구 사항이기도 했다. 한 해 300억달러 수준으로 추산되는 세계 철도시장의 50% 정도를 현재 프랑스 알스톰, 독일 지멘스, 독일과 스웨덴의 합작기업인 아드트란츠 등 유럽 철도산업체들이 나눠먹고 있다. 이들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한반도로 이어, 일본까지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 물류산업에 2000년대 초부터 눈독을 들여왔다.

국토부는 2011년 12월1일 회신을 보냈다. “고속철도(KTX)는 개방하지 않고 일반 철도와 도시철도(지하철)는 상호 동등한 수준에서 개방한다.” 개방 범위는 차량·부품·장비조달을 포함한 물품, 서비스, 건설서비스 등으로 정했다. 다만 운영 부문은 제외하기로 했다. 외국 업체가 철도를 운영하면 추석과 설 명절 때 비상수송 대책을 세우기 어렵고, 고령자 등의 무료 승차를 국가가 메워 추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행안부는 지하철 개방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첫째, 지하철의 운영·청소·경비 용역은 개방할 수 없다. 둘째, 지하철 산업을 개방하면 부품이나 애프터서비스(A/S)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셋째, 국제 입찰로 전동차의 국산화 노력에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자 ‘개방 전도사’인 외교부가 설득에 나선다. 12월7일 외교부가 보낸 공문은 이렇다.

개방 결정 합의에 걸린 시간 고작 17일

“행안부가 (첫 번째로) 우려한 도시철도의 운영·청소·경비 용역은 정부조달협정의 개방 분야가 아니다. 새로 개방할 계획도 없다. (둘째) A/S 문제는 입찰 심사 기준과 낙찰 후 계약에 반영해 대응할 수 있는 사안으로 판단된다. (셋째) 국제 입찰은 외국 제품을 의무적으로 조달하는 게 아니다. (정부) 발주처가 제시한 합리적 제반 조건에 가장 근접한 응찰자를 선정하는 거다. 정부조달협정 회원국 중 도시철도 조달에서 우리나라보다 가격경쟁력이 우위에 있는 나라가 없다. (마지막으로) 국내 조달 체계를 국제 기준에 맞춰 정비한 결과 2008년 공공부문에서 10억달러, 민간부문에서 60억달러의 비용이 절감됐다. 도시철도공사도 상응하는 효과가 기대된다.” 12월8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정부조달협정 개정 협상이 열린다며 회신을 재촉했다.

닷새 만인 12월12일 행안부의 태도가 바뀌었다. “동유럽의 개발 수요 증대 등 우리 기업의 국제시장 진출 기회 확보, 국제 경쟁을 통한 비용 절감 효과, 조달 절차의 투명성 제고 등을 고려해 지방 도시철도 개방을 허용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다. 다만, 서울 및 부산의 의견을 반영해 2014년까지 개방을 유보하는 조건으로 신규 개방에 동의하는 의견을 제출한다.”

국가 기간산업인 철도산업을 외국자본에 열어주는 데 정부 부처가 합의하는 것에 고작 17일이 걸렸다. 외교부가 그려놓은 밑그림에 다른 부처는 ‘거수기’ 노릇만 한 탓이다. 이제는 마지막 관문인 정부조달협정에 대한 국회 비준 동의 절차만 남은 상태다. 철도 민영화를 가로막을 희망이 아직은 남아 있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정부조달협정을 국회가 통과시키지 않으면 유럽 자본이 한국 철도산업에 진출할 길은 좁아진다. 하지만 지난 3월 발효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탓에 미국 자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정부조달협정에서 제외한 KTX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한-미 FTA 부속서를 읽어보자. “한국철도공사만이 2005년 6월30일 이전에 건설된 철도 노선의 철도운송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 경제적 수요 심사에 따라 (주무부처) 장관의 면허를 받은 법인만이 2005년 7월1일 이후에 건설된 철도 노선의 철도운송서비스를 공급할 수 있다.” 2005년 6월30일까지는 철도공사가 운송서비스를 독점하지만 그 이후 건설된 철도 노선에 대해서는 ‘경제적 수요 심사’를 거치기만 하면 미국 자본도 자유롭게 철도산업에 참여할 수 있다는 약속이다.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계획을 이명박 정부는 이미 내놓았다. 서울 수서에서 출발하는 KTX 운영권을 민간 기업에 넘기겠다는 계획이다. 명목은 경쟁체제를 도입해 코레일의 독점을 깨고 요금을 인하하겠다는 거다. 하지만 김성희 고려대 교수(경제학)는 “영국은 민영화 이후 철도 요금이 107% 인상돼 유럽 평균에 비해 30∼40%나 더 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여론도 부정적이다. KTX 민영화 추진에 반대하는 의견(65.6%)이 찬성(22.6%)보다 3배다. 외환은행을 론스타에 헐값으로 넘겼다가 큰코다친 경험이 낳은 학습효과인 셈이다.

추석 연휴에 상정된 ‘자산처리계획’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명박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절차를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다. 추석 연휴를 앞둔 9월25일, 국토부 산하 철도자산위원회는 ‘철도자산처리계획 변경안’을 상정했다. 전국 각지의 역사와 차량기지 소유권을, 철도 민영화를 반대하는 코레일에서 국토부로 회수한다는 내용이다. 민간 기업을 철도 운영자로 선정할 경우, 역사와 차량기지 등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국토부가 사전 작업에 나선 것이다. 결국 5조원에 이르는 역사 소유권을 빼앗긴 코레일은 역사 사용료를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그만큼 늘어난 비용은 열차 운임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통상 관료가 자랑하던 한-미 FTA로 인한 ‘외국자본 유치’ ‘제도 선진화’의 참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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