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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의 적, 뭉쳐서 잡는다

[특집2]금융기관에 300억원 손해배상 청구한 5만2천 명 등 대기업 불공정행위에 집단 대응 나선
소비자들… 9대 국회서 집단소송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전망
등록 2012-05-11 19:11 수정 2020-05-03 04:26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들이 지난 3월19일 서울 서대문 농협중앙회 앞에서 비료 제조업체들의 입찰 담합에 항의하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이들이 내건 플래카드에 “농민들의 피땀을 빼앗은 비료 담합 주범 농협중앙회 규탄 및 농민 집단소송 선포 기자회견”이라고 쓰여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들이 지난 3월19일 서울 서대문 농협중앙회 앞에서 비료 제조업체들의 입찰 담합에 항의하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이들이 내건 플래카드에 “농민들의 피땀을 빼앗은 비료 담합 주범 농협중앙회 규탄 및 농민 집단소송 선포 기자회견”이라고 쓰여 있다. 한겨레 김태형 기자

5만2천 명. 한국소비자원이 지난 2월 중순부터 한 달간 모집한 손해배상 소송인단에 참여한 사람(일부 중복)이다. 이들은 은행·저축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돈을 빌려주며 부당하게 떠넘긴 근저당권 설정료와 인지세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1인당 평균 피해보상 요구액이 53만원 정도여서, 총 손해배상 청구액은 300억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이상근 소비자원 금융보험팀장은 “소비자(대출자)들의 호응도가 이 정도로 높을 줄 몰랐다”며 “5월 안에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비료 입찰 담합 농민 피해액 10조원

소비자단체인 금융소비자연맹도 같은 사안에 대해 이미 지난해 9월 이후 두 차례에 걸쳐 4천 명에 가까운 소송인단을 모집해 72억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소송인단을 추가 모집 중인데 1만5천~2만 명 정도가 응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소비자원 소송인단까지 포함하면 최대 7만 명에 육박한다. 금융기관들은 그동안 부동산 담보대출을 해주며 고객에게 근저당권 설정료와 인지세를 물려왔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가 2008년 2월 이에 제동을 걸어 근저당권 설정비는 금융기관이 부담하고, 인지세는 고객과 절반씩 내도록 여신 관련 표준약관을 개정했다. 금융기관들이 이에 반발해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공정위의 손을 들어줬다. 금융기관들은 2011년 하반기부터 새 규정을 채택했지만, 기존 고객의 환불 요청은 거부하고 있다.

농민단체인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와 전국농민회총연맹이 각각 농민들을 대상으로 시행 중인 손해배상 소송인단 모집에도 4월 말까지 2만3천 명이 신청했다. 13개 비료업체가 과거 16년(1995~2010년) 동안 농협 등의 입찰에서 가격 담합으로 부당이득을 취해온 사실이 공정위 조사로 드러나자 농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더욱이 농협의 자회사인 남해화학까지 담합에 가담한 사실에 분노가 폭발했다. 농민들은 3월19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농협중앙회 본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연 데 이어 손해배상 소송을 추진 중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주관하는 소송의 대리를 맡은 오영중 변호사(수륜법률사무소)는 “담합에 가담한 13개 비료업체를 대상으로 5~6월 중에 손배배상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최근 대기업과 금융사들의 담합이 발생해도 손해배상 소송까지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드물게 소송을 제기해도 중간에 흐지부지돼 제대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1990년대 초반 백화점 사기세일 사건과 관련해 대법원이 52명의 고객에게 배상금 2200만원을 지급하도록 한 사례 정도가 알려져 있다. 대기업의 담합이나 불공정행위가 ‘시장경제의 공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폐해가 심각하다는 점에서 피해자들이 집단 대응에 나선 것은 오히려 때늦은 감이 있다. 농민단체들은 비료 입찰 담합으로 인한 농민들의 피해가 지난 16년간 1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금융소비자연맹은 생보사 이자율 담합으로 인한 보험 가입자의 피해액을 6년(2001~2006년)간 16조3천억원으로 추산한다. 휴대전화 가격 부풀리기의 경우도 3년(2008~2010년)간 관련 매출액이 9조원을 넘는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한 휴대전화 대리점의 창문에 각종 휴대전화 할인광고가 잔뜩 붙어 있다. 이동통신 3사와 휴대전화 제조3사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 휴대전화 가격을 부풀린 뒤 할인해주는 방식으로 고객들을 기만한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457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서울변호사회와 참여연대는 피해 소비자들을 모아 손해배상 소송을 추진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한 휴대전화 대리점의 창문에 각종 휴대전화 할인광고가 잔뜩 붙어 있다. 이동통신 3사와 휴대전화 제조3사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간 휴대전화 가격을 부풀린 뒤 할인해주는 방식으로 고객들을 기만한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에서 457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서울변호사회와 참여연대는 피해 소비자들을 모아 손해배상 소송을 추진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소비자원 등 피해 구제 지원 나서

소비자의 집단적 손해배상 소송이 급증한 배경으로는 올 들어 소비자단체, 법조계, 정부가 소송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점이 꼽힌다. 소비자원이 소비자의 피해 구제를 위해 변호사 알선과 소송원고 모집 등 직접적인 지원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비자원은 올해 6대 중점 사업 중 가장 우선적으로 금융소비자 보호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금융소비자연맹, 녹색소비자연대 등 민간 소비자단체들도 공익소송에 적극적인 자세다. 이들은 소송 참여자에게 인지대와 송달비 외에 최소한의 추가 비용(1만~3만원)만 받는다. 변호사비는 승소할 때만 받는다. 소송 참여자들의 비용 부담을 최소화해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려는 배려다. 서울변호사회도 올 초 담합과의 전쟁을 선포한 데 이어 소비자 피해 구제에 나섰다. 서울변호사회는 생보사 이자율 담합과 휴대전화 가격 부풀리기 사건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공익소송으로 지원하며 변호사비를 받지 않기로 했다. 최근 서울변호사회 회의에서는 앞으로 많은 소비자가 피해를 본 공정위 제재 사건에 대해서는 무조건 손해배상 관련 공익소송을 추진하자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한다.

소비자 정책을 주관하는 공정위도 올해 처음으로 소비자 피해구제 소송 지원을 시작했다. 공정위는 현재 생보사 이자율 담합과 휴대전화 가격 부풀리기 관련 소송에 대해 피해자 모집 경비 명목으로 2천만원씩 지원하고 있다. 공정위의 최무진 소비자정책과장은 “소비자 피해 구제 활성화가 공정한 시장 질서 확립과 기업들의 법 위반을 억제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판단”이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흐름을 타고 대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하게 요구하는 분위기 탓인지 소비자의 태도도 적극적이다. “대기업에서 이렇게 (소비자를) 우롱하니 어찌 믿겠어요?” “소송을 통해 (기업들이) 대가를 치르게 해서 상도덕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서울변호사회가 공익소송을 위해 인터넷 포털 ‘다음’에 개설한 카페에는 대기업들의 불공정행위에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앞으로 소비자의 집단적인 손해배상 소송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금융소비자연맹은 현재 진행 중인 2건의 사건 외에도 은행 펀드의 이자 및 수수료 담합 혐의와 증권사의 고객 예탁금 이자 담합 혐의에 대해서도 소송을 준비 중이다. 조남희 사무총장은 “관계 당국에 두 사건을 모두 고발했다”며 “조사 결과 혐의가 입증되면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부 은행은 이미 펀드 이자 및 수수료 담합 사실을 인정하고 보상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오영중 변호사도 “소비자가 소송을 통해 손해배상을 받겠다는 것도 있지만 대기업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식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 같아 앞으로 관련 소송이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청와대, 집단소송제 도입 반대

하지만 소송을 통한 소비자의 집단적 피해 구제가 더욱 활성화하려면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동일한 사건인데도 피해자들이 함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없고 개별 소송만 가능하도록 돼 있는 현행 사법 시스템은 결정적 걸림돌이다. 예를 들어 비료 담합 사건의 경우 전국의 피해 농가가 10만 호라면 10만 건의 개별 소송을 제기해야 모두 피해 구제를 받을 수 있다. 금융사의 근저당권 설정료 및 인지세 부당 전가 사건은 관련 금융사와 피해자들이 전국에 골고루 퍼져 있다. 하지만 금융소비자연맹은 소송 비용을 최소화하려고 서울중앙지법 소관 사건에 대해서만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현행 제도에서는 다수의 소송인단을 모집하는 것도 쉽지 않다. 녹색소비자연대의 김재철 변호사는 “전체 소비자 피해 규모가 큰 사건이라도 1인당 피해 금액이 작은 경우가 많아 소비자들이 소송에 참여할 유인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한 예로 비료 담합 사건의 경우 전체 피해액은 10조원에 이르지만 1인당 피해 금액은 20만원 안팎으로 추정된다. 조남희 사무총장도 “피해자들이 수십만원씩 보상받아도 공익소송이 아닌 경우 변호사비만 적게 잡아도 수백만원이 들기 때문에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단체와 법조계는 소송을 통한 소비자 피해 구제가 본격화하려면 미국처럼 집단소송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중 일부가 해당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면 똑같은 피해를 본 나머지 투자자는 별도의 소송 없이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제도다. 미국처럼 피해 금액의 3배를 배상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도입을 주장하는 이도 많다. 마침 새누리당은 총선 공약으로 중대한 담합 사건의 경우 집단소송제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주통합당은 대기업의 하도급 중소기업에 대한 납품단가 부당 인하 등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우선 도입하고, 2차로 하도급법 및 공정거래법 위반 행위 전 분야에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공정위도 소비자 피해 구제에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함께 도입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공정위 김윤수 경제정책과장은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중심으로 소비자 피해 구제를 위한 민사적 구제 수단 확충 방안에 관한 연구용역을 공모 중”이라고 밝혔다. 공정위는 애초 올해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소비자 피해 구제를 위한 집단소송제 도입 방안을 포함시켰으나, 청와대의 반대로 막판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LPG 가격 담합 관련 소비자 손해배상 소송을 주도하는 참여연대의 김진욱 시민경제위원회 간사는 “담합 등 기업들의 불법행위를 사전에 억지하는 효과가 큰 소비자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재계가 기업 활동 위축을 이유로 집단소송제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5년 전에 도입된 증권집단소송법이 아무런 폐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면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공정위, 소비자 피해액 산출·공개해야

대기업들의 인식에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다. 삼성과 LG그룹은 올 들어 담합 근절을 선언하고 관련자에 대한 엄중 문책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이들은 담합 사건에 대한 소비자 피해배상을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소비자가 손배해상 소송을 제기했거나 추진 중인 사건 중에서 삼성과 LG가 관련된 사건은 생보사 이자율 담합, 전자제품 가격 담합, 휴대전화 가격 부풀리기 등 3건에 달한다. 담합 근절 선언을 한 대기업들의 모습이 이 정도니, 나머지 기업들에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생보사들은 손해배상 소송 추진 이후에도 아무런 연락이 없고 오히려 관련 협회를 동원해 자신들의 입장만 변명하는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익소송 대상이 되는 대기업 중 일부가 서울변호사회의 담당 변호사들에 대한 개별 관리에 착수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소비자단체들은 대기업들이 담합 근절 선언에 진정성이 있다면 대국민 사과와 소비자 피해배상에 우선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대기업들이 공정위의 제재에 불복해 소송을 제기하면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수년간 관련 손해배상 소송이 공전하는 문제도 개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참여연대가 주도하는 LPG 담합 관련 손해배상 소송은 이 때문에 1년6개월째 멈춰 있다.

정부가 올 들어 소비자 손해배상 소송 지원에 나서고 관련 제도 개선에 전향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아직 개선할 점이 남아 있다. 소비자 손해배상 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소비자의 피해액을 정확히 산정해 재판부에 제시하는 것이다. 공정위는 기업들의 담합과 불공정행위에 제재를 하면서도 관련 매출액과 부당이익 규모, 소비자 피해액 등 핵심 정보는 일절 제공하지 않는다. 공정위 관계자는 “현재의 인력 규모로는 법 위반 기업들의 부당이득이나 소비자 피해 규모를 정확히 산출할 여력이 안 된다”고 말했다. 결국 소비자 손해배상 소송을 추진하는 소비자단체가 직접 피해액 산정을 전문가에게 의뢰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다. 녹색소비자연대의 김재철 변호사는 “큰 사건에서는 피해액 감정 비용이 수천만원 내지 수억원씩 들어가기 때문에 소송에 큰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공정위가 이 문제에 대해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오영중 변호사는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기면 감정료를 피고인 기업들에 받아낼 수 있지만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려면 수년씩 걸리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공정위가 감정 비용을 미리 부담하고 소송이 끝난 뒤 피고 기업에서 돌려받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정위가 소비자단체의 손해배상 소송을 활성화하려고 피해 소비자 모집 경비를 지원하는 상황에서 더 큰 어려움을 모른 척하는 것은 명분이 약해 보인다.

2012년, 소비자 피해 구제 분기점 될까

소비자의 집단적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한 법원 판결이 이르면 올해 안에 나올 전망이다. 금융소비자연맹은 근저당권 설정비와 인지세 관련 손해배상 소송의 1심 판결이 이르면 올해 상반기, 늦어도 하반기에는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재판 결과를 속단할 수는 없지만 금융사들이 수만 명의 대출 고객에게 수백억원의 피해액을 배상하는 사태가 현실화할 수 있다. 더구나 새로 구성된 19대 국회가 처음 맞이하는 가을 정기국회에서 소비자 피해 구제와 관련한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동시에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하나는 도입될 가능성이 있다. 2012년은 소송을 통한 소비자 피해 구제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역사적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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