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새로운 문화이론 전문지의 출현에 열광했던 독자들은 물론, 잡지의 발행인과 편집위원들도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이 잡지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 몰랐다.” 월간·계간을 막론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들은 예외 없이 단명하던 시절이었다. . 이제는 이름조차 희미해진 숱한 좌파 매체가 공안 당국의 탄압과 만성적인 재정난에 간판을 내렸다. 문화전문지·문화비평지를 표방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보인 도 폐간의 운명을 피해갈 수 없었다.
전통 마르크시즘 바깥의 알튀세르에 주목
이런 점에서 계간 의 스무 돌은 하나의 문화적 사건이다. 전성원 계간 편집장은 “그저 존경스럽다”고 말한다. 척박한 한국의 출판 현실에서 비상업적 계간지가 정부나 비영리 공익재단의 후원도 받지 않은 상태로 20년을 끌어온 건 차라리 기적에 가깝다는 것이다. 실제 국내에서 현재 발간되는 종합 계간지는 정도다. 이 가운데 보다 역사가 오래된 것은 출판사 창비가 발간하는 뿐이다. 과 창간 시기가 비슷한 (1993년 창간)는 인천 지역의 비영리 공익법인인 새얼문화재단이 발행한다는 점에서 과는 성격이 다르다. (1999년 창간)은 발간 역사가 에 한참 못 미친다.
창간은 급박한 정세적 요청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 점은 잡지가 창간된 1992년이 한국 진보 진영이 안팎의 위기에 포위된 시기였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오창은 중앙대 교수는 당시를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가 만들어낸 ‘외풍’과 1991년 5월 대중투쟁의 실패가 가져온 ‘내풍’의 영향으로 진보 진영이 ‘이론적·실천적 아노미’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창간 당시 내걸었던 ‘과학적 문화론의 정립’은 이런 안팎의 위기 상황에 내몰린 진보 진영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전략적 출구이기도 했다는 얘기다. 창간을 주도한 강내희 중앙대 교수의 회고도 다르지 않다. “1991년 이른바 ‘열사정국’의 종결과 함께 사회운동이 힘을 잃기 시작한 시점에서, 우리는 세상의 변화, 특히 사회 구성에서 문화가 중요해진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사회이론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즈음 강 교수를 위시한 편집진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1918~90)의 구조주의 마르크시즘이었다. 이 점은 잡지 창간의 계기가 된 1991년 중앙대 학술 심포지엄의 기조 발제가 ‘문화운동의 이론적 접근-그람시와 알튀세르를 중심으로’(도정일 경희대 교수)였던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이들이 알튀세르에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1980년대 한국 급진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전통 마르크시즘의 정치경제학적 분석 틀로는 자본주의의 오랜 흥성과 사회주의의 이른 몰락을 설득력 있게 해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볼 때 알튀세르 이론의 매력은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한다는 데 있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문화는 경제적 관계에 의해 형식과 내용이 규정되는 ‘상부구조’의 차원을 넘어, 과학적이고 능동적인 개입이 필요한 첨예한 계급투쟁의 영역으로 재정의된다. 창간호의 특집 주제였던 ‘과학적 문화론을 위하여’는 이런 문제의식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참신하고 과격했던 언어·욕망·육체·공간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이런 의 위상이 독특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노동운동이 퇴조하고 경제성장과 더불어 자본주의적 소비문화가 확산되던 시기에, 1980년대 문화운동 전통을 계승하해 확산 일로에 있던 자유주의적 문화연구에 각을 세우며 독자 영역을 개척해간 ‘문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동인지’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유사한 선례를 이 교수는 마거릿 대처의 신보수주의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1980년대 영국에서 출현한 좌파 문화연구집단(버밍엄학파)에서 찾는다. 이 교수는 “이 초창기 도입한 알튀세르의 이론 역시 테리 이글턴, 스튜어트 홀 등으로 대표되는 영국 마르크스주의의 프리즘을 통과한 변종 이론들이었다는 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알튀세르 이론의 우산 아래서 초창기 이 다룬 주제 역시 당시로선 대단히 참신하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2호부터 5호까지 연속해서 다룬 언어·욕망·육체·공간이란 테마가 그렇다. 당시 학부생으로 을 처음 접했던 김항 연세대 교수는 “그런 식의 테마를 통해 변혁적 담론을 생산할 수도 있다는 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 이 주제들은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생산(노동) 패러다임’에 긴박돼 있던 당시의 한국 좌파 진영에는 매우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편집진은 당시까지 부르주아 학문의 관심사로 치부되던 이 테마 영역들을 자본주의적 지배관계의 해체와 전복을 위해 과학적 해부와 개입이 필요한 핵심 영역으로 인식했다. “한국 사회가 소비자본주의 단계로 전환하면서 자본의 논리가 일상생활로 침투하기 시작했고, 1980년대와 달리 ‘넓은 의미’의 문화(적 소비)가 계급투쟁의 새로운 장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판단”(심광현 교수)했던 것이다.
해부와 개입의 도구를 찾으려고 이들이 시선을 돌린 곳은 ‘마르크시즘의 바깥’이었다. 이런 파격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해준 것이 ‘절합’(articulation)이라는 알튀세르의 독특한 방법론이다. 절합은 “마디와 마디가 관절처럼 맞붙어 둘이면서도 하나로 작동하는 상태(또는 구성체계)”로 정의되는데, 푸코, 들뢰즈, 비트겐슈타인, 복잡계 과학 등으로 대표되는 비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절합’을 통해 변화한 현실에 걸맞은 문화정치학의 무기를 마련하려는 편집진의 시도는 2007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간과해선 안 될 사실은 서로 연관이 없는 듯한 논의들을 접속시켜 새로운 논의를 만들어내려 한 이들의 시도가 적잖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론적 깊이와 엄밀성이 부족한 무분별한 절충주의’라는 비판도 그중 하나였다.
문화사회, 대안적 사회 패러다임
이에 대해 2세대 편집위원의 핵심 인물인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이론적 논의보다는 이 현실 문화운동의 장에 미친 작용과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 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몇 가지 중요한 문화적 의제들을 제시했는데, 문화공학, 문화사회론, 생태문화 코뮌주의, 사회미학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편집위원들이 가장 핵심적 의제로 꼽는 것이 문화사회론이다. 은 문화를 통한 정치적 개입을 본격화한 1990년대 말부터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제안했다. 문화사회는 한마디로 문화를 노동을 위한 부수물로 취급하지 않고, 거꾸로 노동이 문화적 삶을 위한 계기이자 수단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의미했다. 노동 중심의 근대사회를 대체할 대안적 사회 패러다임이 문화사회였던 것이다.
유념할 대목은 문화사회론이 다분히 유토피아적 기획이란 점이다. 물론 이때의 ‘유토피아적’이란 표현은 ‘공상적’이라는 속류적 의미로 이해돼선 곤란하다. 그것은 현실의 운동을 추동해가는 ‘잠재적 가능태’로서의 유토피아에 가까웠다. 강내희 교수는 문화사회를 “이론적·정치적 실천을 인도해가는 규제적 이념”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문화사회는 1999년 편집위원들이 중심이 돼 출범시킨 ‘문화연대’의 이념적 좌표 구실을 했다. 이동연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문화사회론은 개인들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삶, 규율사회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개인의 창조적 역량의 실현, 일상적 삶의 문화적 재구성 같은 실천 의제들을 함축하는데, 문화연대는 이 문화사회론의 이론적 기반 아래 만들어진 조직이다.”
하지만 문화사회론에 함축된 ‘노동거부’ 사상은 진보 진영 안에서도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리해고 등으로 삶의 뿌리를 뽑힌 노동자에게 박탈감을 안겨준다는 비판도 그중 하나였는데,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당시 노동거부 사상이 “한국 사회의 상황적 적합성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꼬집기도 했다. 하지만 문화사회론의 실천적 함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연구자도 적지 않았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은 “다소 도발적이었지만,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노동 자체를 비판적으로 대하는 시각이 부족했던 한국 노동운동 진영에 근본적 성찰과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 생산적 문제 제기였다”고 적극적 의미를 부여한다.
1997년 말 외환위기와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계기로 이론적·실천적 무게중심을 조금씩 달리해왔지만 이 한결같이 추구해온 것은 “구조와 제도 분석을 중시해온 구좌파의 문제의식과 새로운 주체 형성의 방법론을 탐색해온 신좌파의 문제의식을 결합하는 것”(심광현 교수)이었다. 이런 이 창간 20년을 계기로 편집위원진을 큰 폭으로 개편한다. 20년 동안 핵심 역할을 해온 강내희·심광현 교수는 편집위원에서 물러나고, 20여 명의 소장 인문·사회과학자들로 새 편집위원진을 꾸린다. 편집인은 2세대 편집위원으로 강내희 교수의 제자인 이동연 교수가 맡는다.
20돌 맞아 새 편집위원진 꾸려
창간 20돌과 70호 발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도 열린다. 5월25일 서울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리는 행사에선 심광현 교수가 ‘의 이론적 궤적과 쟁점’을, 이동연 교수가 ‘의 실천적 개입의 성과와 과제’를 발표한다. ‘공황과 혁명’을 주제로 마련된 2부 심포지엄에선 곽노완 서울시립대 교수, 이정구 경상대 교수, 이득재 가톨릭대 교수, 강내희 중앙대 교수가 나서 ‘20세기 공황과 21세기 공황’ ‘68혁명과 21세기 이행기의 과제’ 등을 주제로 발표한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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