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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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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업자의 비리 폭로 협박을 돈으로 무마한 삼성물산

삼성물산 임직원의 비리 폭로 협박해 거액 뜯어낸 조 아무개씨 감옥에 갇혀… 협박 내용 사실로 드러났는데도 검찰이 삼성물산 수사하지 않아 실체적 진실은 미궁에 빠져
등록 2012-04-11 15:55 수정 2020-05-03 04:26
» 재벌 계열 건설사가 협력업체와 거짓 계약서를 쓰고 향응 접대를 받는다는 소문이 많았지만 드러나지 않았다. 공갈범의 범죄행위로 삼성물산 직원들의 비리가 뒤늦게 밝혀진 셈이다. 서울 서초동 삼성물산 본사 전경. <한겨레21> 탁기형

» 재벌 계열 건설사가 협력업체와 거짓 계약서를 쓰고 향응 접대를 받는다는 소문이 많았지만 드러나지 않았다. 공갈범의 범죄행위로 삼성물산 직원들의 비리가 뒤늦게 밝혀진 셈이다. 서울 서초동 삼성물산 본사 전경. <한겨레21> 탁기형

비밀이 돈을 낳는다. 공갈범은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2008년 2월28일 공기엔 아직 냉기가 섞여 있었다. 조아무개(56)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성물산주식회사 본사 로비에 들어섰다. 보안요원들이 앞을 막아섰다. 조씨의 언성이 높아졌다.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폭로해서 회사를 망하게 할 거다. 너희들 비리를 언론에 다 까발릴 테니 한번 해보자. 내가 모든 사실을 검찰에 이야기하면 내가 접대한 직원들뿐만 아니라 삼성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아직 쌀쌀했지만 조씨는 웃옷을 벗고 보안요원들과 몸싸움을 했다. ‘삼성건설 저승사장은 물러가라. 영세업체 금품수수 향응접대에 죽어간다’는 구호가 적힌 손팻말도 들었다. 조씨는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삼성물산의 협력업체를 운영했다. 벽돌쌓기(조적)와 미장공사를 담당했다. 조씨는 2008년 2월 말부터 6월26일까지 38차례에 걸쳐 삼성물산 본사를 찾아 소리를 지르고 손팻말 시위 등을 했다.

“폭로가 두렵다면 돈을 달라”

삼성물산 박기성(57) 전 전무는 조씨의 1인시위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조씨의 주장이 뭔지 파악해야 했다. 그러나 삼성물산은 직접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을’의 손을 빌렸다. 박 전무는 또 다른 협력업체인 ㅇ건설사 사장 이아무개씨를 불렀다. 조씨의 요구사항이 뭔지 파악하도록 요구했다. 이씨는 2008년 6~7월 조씨를 만났다. 조씨는 돈을 요구했다. “삼성물산의 현장에서 일하다 현장 직원들을 접대하느라 손실이 났다. 삼성물산이 그 대가로 6억원을 내놓을 때까지 계속 찾아가서 난동을 부리겠다. 돈을 주지 않으면 언론에 제보하는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삼성물산을 크게 다치도록 만들겠다. (대신) 3억3천만원 정도를 주면 협박과 난동을 그만두겠다.”

조씨의 요구조건을 전해들은 삼성물산은 자체 감사에 나섰다. 조씨의 주장은 상당 부분 사실이었다. 조씨한테서 향응과 접대를 받은 직원 가운데 현직에 남아 있는 직원들을 조사했고, 여러 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러나 이를 언론이나 수사기관에 알리지 않았다. 삼성물산은 내부 비리를 조용히 덮고자 했다. 갑은 을의 공갈을 무마하려고 또 다른 을을 이용했다. 박 전 전무는 이씨에게 “삼성물산에서 나중에 돈을 보전해줄 테니 ㅇ건설에서 조씨에게 돈을 건네달라”고 말했다. 이씨도 삼성물산 공사 물량을 받는 처지의 중소기업체 사장이었다. 삼성물산은 ‘갑’이었고 이씨는 ‘을’이었다. 갑의 부탁을 받은 을은 공갈범이 된 또 다른 을에게 2008년 7월~10월 여러 차례에 걸쳐 3억3천만원을 지급했다. 이씨는 에 “내 개인돈으로 줬는지 회삿돈으로 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조씨는 2003년 경기도 분당 로얄팰리스 주상복합 건설 당시 자신이 뇌물을 준 삼성물산 직원도 협박했다. 당시 하도급계약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엄아무개 과장은 조씨에게서 500만원을 상납받았다. 조씨는 2008년 3월 경기도 수원시 인계동의 삼성물산 공사 현장에 찾아가 엄 과장을 협박했다. 겁먹은 엄 과장은 500만원을 돌려줬다. 조씨는 추가로 500만원을 요구하며 엄 과장에게 전화를 걸고 휴대전화 메시지를 남겼다.

비밀을 무기로 한 을의 협박은 계속됐다. 조씨는 2009년 3월께 또다시 서초동 삼성물산 본사 주변에 나타났다. 회사 임원과 면담하겠다고 요구했다. 박 전 전무는 다시 이씨를 호출했다. 이씨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조씨와 만났다. 조씨는 추가로 돈을 요구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돈을 더 받아야겠다. 지난번에 너무 조금 받았다. 돈을 더 받을 때까지 삼성물산에 찾아가서 난동을 부릴 것이다. 다른 협력업체 사람들이랑 함께 삼성물산을 찾아가겠다.” 삼성물산은 다시 이씨에게 “삼성물산에서 나중에 돈을 보전해줄 테니 ㅇ건설에서 조씨에게 돈을 건네달라”고 요청했다. 이씨는 삼성물산 대신 2009년 4월9일부터 2010년 4월8일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2억6천만원을 공갈범에게 줬다. 삼성물산은 나중에 ㅇ건설이 대신 준 무마비를 보전해줬다. 형법은 “사람을 공갈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제350조 공갈죄 항목)고 규정한다. 갑과 을 모두 위기를 넘겼다고 착각했다. 조씨는 비밀을 무기로 대가를 받아냈다고 생각했다. 삼성물산은 돈으로 향응·접대 비리를 조용히 덮었다고 생각했다.

공갈죄에 묻힌 비리

탐욕이 꺼진 불을 지폈다. 조씨가 다시 삼성물산 본사에 나타났다. 2011년 6월28일 생활비와 사업자금 명목으로 6천만원을 더 달라고 삼성물산 직원에게 요구했다. 2011년 6월부터 11월까지 24번의 1인시위를 했다. 갑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삼성물산 법인 명의로 2011년 말 서초경찰서에 공갈 혐의로 조씨를 고소했다. 경찰이 수사하고 검찰이 사건을 송치받아 다시 검토했다.

수사기관은 공갈 혐의에 대해서만 수사했다. 공갈범의 주장이 사실인지가 형량에 영향을 줄 수 있는데도, 실제로 향응·접대가 벌어졌는지 삼성물산에 묻지 않았다. 무마비가 삼성물산 회삿돈으로 지급됐는지도 수사하지 않았다. 박기성 전 전무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내지도 않았다. 500만원을 상납받은 삼성물산 직원에게 다른 상납 사례가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검찰사건사무규칙은 ‘검사가 범죄를 인지한 경우’ 수사하도록 규정한다. 언론 보도로 검찰 수사가 시작된 경우도 많다. 수사 과정에서 예상치 않은 범죄 혐의를 잡고 수사하는 사례도 많다. 검찰은 민간인 사찰 사건 1차 수사 당시 사찰 몸통에 대한 수사는 덮은 뒤, 엉뚱하게 사찰 피해자인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를 회삿돈 횡령 혐의로 기소했다. 스스로 준사법기관이라 주장하는 검찰의 인지수사 기준은 그때그때 다르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백방준 부장검사)의 수사 범위는 삼성물산의 고소장 바깥으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검찰은 2011년 12월 조씨만 공갈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2월7일 공갈 등의 혐의로 조씨에게 징역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 사실이 의 취재로 뒤늦게 확인됐다. 삼성물산은 취재가 시작되자 뒤늦게 조씨의 주장대로 삼성물산 직원들이 협력업체로부터 향응·접대를 받은 사실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지난해 언론이 공갈범이 구속 기소된 사실을 보도했을 때, 삼성물산은 이런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당시 형사16단독 판사로 판결문을 작성한 곽부규 판사(현 특허법원)는 양형 이유에 대해 “갈취한 돈이 거액인 점, 피고인이 범죄를 자백한 점 등을 두루 고려했다”고 밝혔다. 조씨가 주장하는 ‘삼성물산의 비리’ 가운데 일부가 판결문에 사실로 드러났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박기성 전 전무가 “회사 직원들의 비위 사실이 언론에 공개될 경우 삼성물산의 ‘래미안’ 브랜드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 등을 염려했다”고 밝혔다. 하도급계약 담당 엄 과장이 조씨에게서 500만원을 상납받은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

» 2003년 삼성물산의 로얄팰리스 건설 현장에서도 비리가 있었다. 당시 협력업체를 운영하던 조아무개씨로부터 500만원을 상납받았던 직원은 여전히 삼성물산에 다닌다. <한겨레21> 김경호

» 2003년 삼성물산의 로얄팰리스 건설 현장에서도 비리가 있었다. 당시 협력업체를 운영하던 조아무개씨로부터 500만원을 상납받았던 직원은 여전히 삼성물산에 다닌다. <한겨레21> 김경호

공갈범 조씨는 왜 갑자기 입을 닫았나

백방준 부장검사는 지난 2월 통화에서 이 ‘삼성물산 임원과 무마비를 건넨 ㅇ건설 대표에게 출석요구서를 보내 조사했느냐’고 묻자 “(삼성물산을) 조사할 가치가 없는 것이, 이 사건만 놓고 보면 당사자들이 (혐의를) 다 인정한다”고 말했다. 삼성물산 대신 무마비를 건넨 ㅇ건설 전 대표 이씨는 “(삼성물산) 본사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조씨가)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그래서 내가 한번 만나봤다. (삼성물산이) 나한테 만나보라고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5억9천만원에 대해 “개인돈으로 줬는지 회삿돈으로 회계 처리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ㅇ건설을 떠났다. 그는 “내가 현재 (경제적으로) 상태가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고 덧붙였다. 삼성물산은 ‘수사기관이나 언론에 알리지 않은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당시엔 (삼성물산이) 향응받은 사실이 실제로 있으니 그런 부분을 인정해 돈을 주고 상황을 종료하자고 판단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물산은 “조씨를 고소한 것은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조씨와 검찰 둘 다 지난 2월13일 항소했다. 1심 선고 당시 5년을 구형한 검찰은 3년6개월의 실형이 너무 가볍다고 주장했다. 은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있는 조씨를 3월28일과 3월30일 두 차례에 걸쳐 접견했다. 조씨는 첫 접견 당시 “죄를 인정한다”면서도 상납 관행 등 삼성물산의 비리를 알리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두 번째 접견 때 돌연 “조용히 죗값을 치르려 하니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했다. 서울중앙지법 422호 법정에서 형사항소5부(재판장 이종언) 심리로 4월6일 열린 공판에서도 조씨는 “내 행위가 이렇게 큰 죄가 될 줄 몰랐다. 50여 년 살면서 법 앞에 떳떳했다. 당시 생과 사에 서 있어 못할 짓을 했다. 크게 뉘우친다”고 말했다. 조씨의 변호인은 삼성물산에 받은 돈을 돌려주고 합의를 추진 중이니 감형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조씨는 3월14일 재판부에 반성문도 제출했다.

삼성물산에는 책임 묻지 않아

검찰이 추가로 수사하지 않는 상황에서 조씨의 바람대로 조용히 합의가 이뤄지면 삼성물산의 비리에 관한 실체적 진실도 묻히게 된다. 삼성물산은 ‘과거와의 단절’ 의지를 거듭 강조했지만 건설업계 안팎의 시선에는 의심이 섞여 있다. 500만원을 상납받은 하도급계약 담당 엄 과장은 여전히 삼성물산에 다닌다. 박기성 전 전무는 어떤 법적 책임도 지지 않은 채 퇴직했다. 삼성물산은 1996~2007년에 향응·접대 등 비리 사실이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몇 명의 직원이 얼마나 향응을 받았고 어떤 수준의 징계를 받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한국 건설업계의 먹이사슬은 복잡하다. 재벌이 하청업체를 부리고, 하청업체가 다시 하청업체를 부린다. 그 먹이사슬 사이로 여전히 건설재벌의 비리에 관한 풍문이 돈다. 그런 풍문은 이제 과거 얘기라는 것이 삼성물산의 주장이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검찰의 삼성 덮어주기 수사
“회삿돈으로 무마 뒤 회계 처리는 불법”

삼성물산의 행위는 삼성이 표방하는 대·중소기업 상생 정신에 어긋나 부도덕할 뿐 아니라, 민형사상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의 취재로 삼성물산의 향응 비리가 사실로 드러남에 따라, 검찰과 경찰이 ‘삼성 덮어주기 수사’를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전문가들은 삼성물산이 5억9천만원의 회삿돈을 범죄자인 공갈범에게 지급하고 회계 처리했다는 사실을 핵심적인 불법행위로 판단한다. 은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 소속 변호사들에게 판결문을 보여주고, 삼성물산의 행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전문가들은 박기성 전 삼성물산 전무가 사비를 털어 무마비를 준 게 아니라 주주들 몰래 회삿돈으로 지급하고 회계 처리했다면 상법상 충실의무 위반 등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이 경우 삼성물산은 회사에 손해를 끼친 행위에 대해 주주들에게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 삼성물산은 ‘주택사업부의 다른 항목’으로 회계 처리했다고 밝혔다. 공갈범에게 돈을 주고 이를 회계 처리하라고 지시한 임원은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그러나 삼성물산은 구체적으로 어느 임원이 이를 지시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돈을 주라고 지시한 것으로 판결문에 나온 박기성 전 전무는 지난해 말 삼성물산을 퇴직했다. 삼성물산이 무마비를 건넨 2008~2010년에는 정연주 현 삼성물산 부회장이 대표이사 사장이었다.
조아무개씨로부터 향응과 접대를 받은 전·현직 삼성물산 임직원들도 접대받은 시기에 따라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삼성물산은 1996년부터 2007년 8월까지 조아무개씨에게서 향응과 접대를 받은 삼성물산 임직원이 여럿 있음을 인정했다. 하청업체로부터 향응과 접대를 받은 임직원들은 형법의 배임수재죄 적용 대상이 된다. 배임수재죄의 공소시효가 5년이므로 2007년 이후 접대받은 임직원들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그대로 살아 있어 검찰이 기소할 수 있다. 2003년 500만원을 받은 엄아무개 과장처럼 먼 과거에 접대받은 경우 형사처벌은 면한다.
삼성물산이 공갈을 무마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협력업체 사장을 부린 것도 논란거리다. 불법행위는 아니더라도 재벌 기업인 삼성물산이 어려운 처지의 중소기업을 부당하게 이용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설사 나중에 삼성물산이 돈을 보전해줬더라도, 영세한 협력업체 사장이 거액의 무마비를 마련하는 부담과 수고를 겪도록 한 행위는 재벌의 횡포라는 비난을 면키 어려워 보인다. 삼성물산은 “ㅇ건설 사장이 조아무개씨와 친분이 있어서 (중간 역할을) 요청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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