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복, 조든, 버스…. 이 단어들을 놓고 마이클 조든이 선전한 농구화를 신고 버스를 탄 교복 차림의 학생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안전지대에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세 단어를 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우스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면, 혹은 왼손이 자신도 모르게 키보드의 왼쪽 Alt키를 누르고 있다면 중증이라고 하겠다. 이 단어들은 바로 롤플레잉게임(RPG) 에서 사용되는 은어다. 교복과 조든은 인기가 높았던 게임 아이템의 별칭이고, 버스는 고레벨의 게이머가 저레벨 게이머와 파티 플레이를 통해 인위적으로 빠르게 레벨을 올려주는 행위를 말한다. 혹시 당신의 남편이나 자녀에게 비슷한 증상이 발견된다면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이 게임이 출시된 2001년, 학교와 직장에선 무더기 지각과 결석(결근)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후속작 의 발매 일정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전작이 발표된 지 11년 만의 일이다. 제작사인 블리자드는 2월 중 한국 이용자를 대상으로 베타테스트를 실시하고, 3월 중 정식 발매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미국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베타테스트가 진행되고 있다. 국내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손이 떨린다” “사양을 맞추기 위해 컴퓨터를 완전히 업그레이드했다”는 등의 글이 수천 건씩 올라오고 있다. 대략적이나마 발매 일정의 윤곽이 드러난 것은 이 게임이 지난 1월13일 게임물등급위원회의 심의를 ‘청소년 이용 불가’ 등급으로 통과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무려 다섯 차례의 심의 연기 끝에 여섯 번째 회의에서 심의를 확정지었다. 바로 가 구현하는 아이템 현금거래 시스템 때문이었다. 블리자드는 아이템 현금거래 시스템을 삭제한 버전을 제출해 가까스로 심의를 통과했다.
게임물등급위 5차례 심의 연기된
하지만 게임물에 대한 한국 정부의 과도한 규제 시도가 부른 해프닝이라는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 현금거래는 이미 그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진실’이 됐다. 이용자들은 거래 중개 사이트를 통해 아이템이나 게임머니, 계정까지 현금으로 사고판다. 아이템 중개 업계는 “이미 아이템 거래 시장은 연간 1조3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산업이 돼 있다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게임 내에서 현금거래 시스템을 삭제해도, 중개 사이트를 통한 아이템 거래까지 금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심의가 연기될 때마다 게임위 홈페이지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 규제를 시도하면서 게임 출시를 늦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누리꾼들의 항의로 도배됐다. 비난이 집중되자 이례적으로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위치한 게임위 사무실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최 장관은 이 자리에서 “외부의 오해들은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개선해야 할 점은 고쳐나가는 것이 공공기관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와 제작사인 블리자드의 파워가 재확인된 장면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전평이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도입 과정에서부터 관련 업계와 누리꾼들의 광범위한 반발을 불렀고, 결국 “원칙 없는 시행으로 ‘누더기법’이 되어버렸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셧다운제’ 논란에서다. 우리 정부가 청소년은 밤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 게임물 이용을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셧다운제를 도입하자, 블리자드는 오래전부터 서비스를 시작한 옛 버전 배틀넷( 등의 게임에서 온라인 멀티 플레이를 구동하는 서버)에서 한국 이용자 전체를 배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나 조만간 서비스를 시작할 의 경우에는 이용자의 연령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버전의 배틀넷을 탑재했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셧다운제 시행으로 한국에서는 성인들도 를 플레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루머가 퍼져나갔다. 이번에는 셧다운제 도입을 주도한 여성가족부와 문화체육관광부 누리집이 다운될 정도로 비난이 빗발쳤다. 험악해진 여론에 밀린 정부는 등의 패키지 게임은 셧다운제에서 예외로 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똑같은 패키지 게임이지만 은 셧다운제 규제 대상이 아니고, 연령 정보가 확인되는 는 규제 대상이다. 수많은 폐인을 양성한 ‘악마의 게임’ 도 역시 규제 대상이 아니다. 청소년들이 부모의 주민번호를 이용해 게임을 즐긴다면 그나마 막을 방법도 없다. 게임 과몰입 현상이 상당한 수준의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규제할 수도 없는 일을, 그것도 원칙 없이 규제하려다 되레 한국 정부가 망신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누더기’ 된 셧다운제, ‘불합리’ 비판받는 쿨링오프제
그럼에도 정부의 게임물 규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엔 교육과학기술부가 총대를 멨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은 1월26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열린 전문가 간담회에서 “학교 폭력과 관련해 주목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게임 중독”이라며 “일정 시간 게임을 하면 몇 분간 자동으로 게임이 꺼지는 식의 규제 조치인 ‘쿨링오프제’ 도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청소년이 2시간 동안 게임을 진행하면 강제로 10분간 쉬게 만들겠다는 이야기다. 업계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인기 게임 의 개발자이자 ‘한국 게임산업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송재경씨는 “항의의 표시로 게임 개발자는 전부 파업하고, 앞으로 게임은 정부가 직접 만들게 하자”고 혹평했다. 최관호 한국게임산업협회장도 “게임을 학원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해서 합리적이지 않은 규제를 하려는 분위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규제가 가능하다고 보는 정부의 몰이해가 근본적 문제라는 시각이 많다. 만일 청소년들이 2시간마다 다른 게임을 한다면? 모든 미성년자들을 정부가 개별적으로 감시라도 하려나. 블리자드는 발매를 앞두고 또다시 쿨링오프 시스템을 구현하려고 출시 일정을 미뤄야 할까. 게임물 전반을 ‘절대악’으로 취급하는 이명박 정부의 헛발질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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