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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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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온 재벌개혁 기회, 살려야 경제 살릴 기회

빵·순대 등 골목상권 철수 재벌 이어지지만 “소나기 피하기식 조처에 개혁 고삐 늦춰선 안 된다”는 목소리 커져
등록 2012-02-02 14:40 수정 2020-05-03 04:26

“해비치호텔의 김밥·샌드위치 사업을 맡고 있는 ‘오젠’에서 손을 떼겠습니다.”(현대차그룹 1월27일 발표)
“호텔신라의 커피· 베이커리 사업인 ‘보나비’를 철수합니다.”(삼성그룹 1월26일 발표)
“순대와 청국장 사업을 그만두겠습니다.”(아워홈 1월26일 발표)
‘재벌 개혁’이 정치권의 화두로 등장하자, 재벌들이 ‘골목상권 침해’ 논란을 빚었던 사업 분야에서 잇따라 철수를 발표하고 있다. 빵·커피·김밥·순대 등은 재벌 2·3세들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영세 소상공인들이 생존권 위협을 호소해온 대표적인 분야다. 해비치호텔의 오젠은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의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이 주도해왔다. 호텔신라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가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아워홈은 LG그룹에서 분리돼 나온 급식·식자재 업체다. 삼성은 사업 철수를 발표하며 2011년 보나비의 매출이 241억원으로 호텔신라 전체 매출(약 1조7천억원)의 1.4%에 불과하고, 오너 일가의 지분은 전혀 없음을 강조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그처럼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업을 지끔껏 왜 했는지 모르겠다”며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고 혀를 찼다.

삼성그룹 계열사인 호텔신라가 운영하는 아티제의 모습.의 모습. <한겨레21> 박승화

삼성그룹 계열사인 호텔신라가 운영하는 아티제의 모습.의 모습. <한겨레21> 박승화

호텔신라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녀 이부진 사장

호텔신라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녀 이부진 사장

거세지는 재벌개혁 압박

“재벌 개혁의 압박이 거세지니까 재벌들이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선심성 조처를 내놓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헌법 제119조 경제민주화특별위원회’ 위원장인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의 분석이다. 삼성과 현대차 등은 이번 결정이 상생경영 실천 취지에서 이뤄진 것으로 외부 압력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최근 속도가 빨라지는 정치권의 재벌 개혁 움직임과 연관짓는 시각이 많다. 삼성의 발표 하루 전인 1월25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재벌 2·3세의 빵 장사에 대해 실태조사를 지시하기도 했다. 재벌의 이익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관계자도 “삼성의 탁월한 정무적 판단에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삼성은 2011년에도 ‘소모성 자재 공급사업’(MRO) 논란이 불거지자 관련 계열사인 IMK 매각을 전격 발표했다. 삼성과 현대차 등의 발표가 앞으로 유사 업종에 진출한 다른 재벌들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한 예로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딸 정유경 부사장과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의 외손녀 장선윤 블리스 대표는 베이커리 사업을 운영 중이다.

이명박 정부 집권 이후 4년간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자 재벌들이 주범으로 지목됐다. 지난해부터 재벌 개혁 이슈가 부상하더니, 총선과 대선을 앞둔 올해는 연초부터 세부 정책들이 구체화하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곧 한명숙 대표가 직접 나서서 재벌 개혁 등 경제민주화와 복지, 부자 증세 정책을 총선과 대선 공약으로 발표할 계획이다. 경제민주화 정책에는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 부활, 순환출자 금지, 일감 몰아주기 규제, 중소기업 적합업종·고유업종 법제화 등이 포함될 전망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오랫동안 재벌정책의 상징처럼 여겨져온 출총제의 부활이다. 출총제는 재벌 계열사의 경우 순자산의 일정 비율 이상 다른 계열사에 출자(주식 보유)할 수 없도록 규제하는 제도다. 1986년 공정거래법에 경제력 집중 억제 시책의 하나로 도입됐다. 하지만 재벌들은 출총제가 투자를 가로막는다며 줄기차게 폐지 또는 약화를 주장해왔다.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부터는 적용 대상을 자산 10조원 이상의 재벌 중에서 자산 2조원 이상 중핵기업으로 축소하고, 출자 한도를 순자산의 25%에서 40%로 대폭 확대했다. 친재벌을 내건 이명박 정부는 대기업 관련 규제 완화 조처의 일환으로 2009년 초 출총제를 아예 없애버렸다. 이번에 출총제가 다시 살아난다면 김대중 정부 때의 출총제 부활이 10년 만에 재연되는 셈이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투자 활성화를 이유로 출총제를 폐지했다. 하지만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하자 3년 만인 2002년에 재도입했다.

민주당의 한명숙 대표는 취임 직후 출총제 부활을 강조했다. 경제민주화특위는 이미 지난해 11월 경제민주화 정책 과제를 발표하며 출총제 부활을 10대 핵심 정책의 하나로 제시했다. 민주통합당에 이어 한나라당도 출총제 논의에 합세하는 분위기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1월17일 “반드시 그 이름이 출총제가 아니라도 여러 가지 방안을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고 적극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도 이틀 뒤인 1월19일 “재벌의 사익 남용을 막기 위해 출총제 (폐지에 따른) 보완 조처가 필요하다”고 힘을 실었다.

현대·기아차 본사. <한겨레> 자료

현대·기아차 본사. <한겨레> 자료

한나라당까지 출총제에 적극적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도 출총제 부활을 주장한다. 경실련은 1월20일 논평에서 “출총제의 재도입 없이는 재벌 개혁을 논할 가치도 없다”고 못박았다. 경실련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재벌의 투자를 촉진한다는 명분하에 출총제를 폐지했지만 투자보다는 계열사의 확장, 토지자산 증가, 일감 몰아주기, 사내 유보금 증가, 자본력을 앞세운 중소기업 및 서민상권으로의 진출 등이 이뤄져 경제 양극화만 심화됐다고 비판한다. 한 예로 이명박 정부 4년간 15대 재벌의 전체 계열사 수는 472개사에서 778개사로 64.8%(306개사) 급증했다. 재벌에 대한 시장의 감시 기능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아무런 대안 없는 출총제 폐지는 일종의 규율 진공상태를 빚었고 그 결과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 심화, 무분별한 사업 확장, 골목상권 잠식, 양극화 심화로 이어졌다. 홍종학 경원대 교수는 “출총제 부활은 재벌 개혁의 상징과도 같은 것으로, 실효성 차원을 넘어 개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대론도 만만치 있다. 전경련의

해비치호텔의 오젠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

해비치호텔의 오젠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

이철행 기업정책팀장은 “(출총제 부활로) 투자가 위축될 수 있고 그 여파로 일자리 창출 등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주무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도 난색을 보인다.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은 “일감 몰아주기 억제 방안이 제대로 작동하면 편법 증여 등 대기업 대주주의 사익 남용 행위는 방지될 수 있다“며 부정적 뜻을 비쳤다. 공정위 반대론의 논거는 정치권에서 최근 중점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재벌의 골목상권 잠식 문제와 출총제의 정책목표인 재벌의 경제력 집중 억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출총제는 재벌들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을 총량적으로 막는 데는 일정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소상공인의 주력 업종 등 특정 분야 진출을 직접적으로 막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재벌들의 골목상권 진출에는 소규모 자본금이면 가능하다. 재벌의 자산이 수십조∼수백조원에 달하는 현실에서 출총제를 통해 재벌의 골목상권 진출을 막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한 예로 호텔신라가 사업을 포기한 보나비에 출자한 돈은 197억원(지분율 100%)이다. 호텔신라의 자본총계액 5700억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4%에 불과하다. 정중원 공정위 경쟁정책국장은 “정치권에서 제기하는 골목상권 문제와 출총제의 정책목표는 다르다”며 “출총제가 부활하더라도 재벌들이 소상공인 업종에 진출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규제할 수 없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다”고 설명했다. 전경련의 이철행 기업정책팀장은 “출총제가 마치 (재벌 개혁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다”며 “국소마취가 필요한 환자에게 전신마취를 하자는 격”이라고 말했다.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비화될 수도”

개혁적 시민단체 진영에서도 신중론이 흘러나온다. 과거 경험에서 보듯이 출총제는 일관성 있는 집행을 보장하기 어려운데다, 출자 한도 기준을 순자산의 몇%까지 허용할지, 적용 대상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객관적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재벌들에 출총제를 반대하는 명분을 제공해 결국 재벌 개혁 정책 전반의 동력을 떨어뜨리는 부정적 영향이 우려된다. 미국에서 연수 중인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출총제가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는 데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자칫 제도 시행의 이익보다 비용이 더 클 수 있다”며 “재벌 개혁 논의의 초점이 출총제 부활에만 모아질 경우 일종의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비화돼 정작 다른 중요한 개혁 이슈들까지 죽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출총제는 지난 20여 년의 시행기간 동안 숱한 논란이 뒤따랐다. 대표적인 것이 출총제가 투자 위축을 불러온다는 재계의 주장이다. 출총제를 지지하는 개혁 성향의 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은 기업들이 땅을 사서 공장을 짓고 기계설비를 들여놓는 투자와 출총제가 규제하는 출자(주식지분 매입)는 별개라고 맞서왔다. 주식 출자가 투자와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식 출자금 중 일부가 사후적으로 투자에 사용될 수도 있다. 결국 출총제 투자위축론은 100% 틀린 얘기도 아니지만, 100% 맞는 얘기도 아닌 셈이다. 하지만 출총제만 사라지면 투자가 크게 늘 것처럼 강조해온 재벌들의 말이 공염불로 끝났다는 데는 별 이견이 없는 듯하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을 주관한 백용호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해에 “환율 높았지, 금리 깎았지, 세금까지 깎아줬으니, 대통령이 사실 수출 대기업들에 현금을 갖다 안겨준 꼴인데, (대기업들은) 그렇게 번 돈을 쌓아놓고 있으면서도 투자나 고용 등은 여전히 미흡하다”고 비판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2009년 출총제 폐지 당시 재벌들의 출자 비율이 순자산의 10~11% 수준이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야당은 출총제를 부활하되 탄력적으로 도입할 전망이다. 민주통합당 ‘경제민주화특위’도 정책 제안에서 적용 대상을 상위 10대 재벌로 한정하고, 순자산의 40%까지는 다른 계열사에 출자할 수 있게 여지를 두는 방안을 내놓았다. 다만 과거에 출총제 무력화의 주범으로 꼽혔던 예외인정과 적용제외는 대폭 축소할 것을 주장했다. 유종일 교수는 “재벌의 골목상권 잠식도 문제지만 경제력 집중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재벌의 성장 과실이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고, 재벌의 과도한 지배력이 민주주의 위협 등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민주당, 기업집단법 카드도 만지작

출총제만으로 재벌 개혁이 모두 이뤄지는 것은 아닌 만큼, 다양한 개혁정책들도 병행 추진될 전망이다. 대표적으로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규제 강화가 예상된다. 민주당은 규제 대상을 상법상 특수관계인까지 확대해 재벌 총수의 친인척까지 망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공정거래법도 개정해 일감 몰아주기에 대해 경쟁제한성을 입증하지 않아도 지원 행위 자체만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해서 제재의 실효성을 높일 계획이다. 시장의 감시 기능 강화를 위한 3배 손해배상제 확대, 집단소송제 확대, 이중대표소송 도입 등의 방안도 제기되고 있다. 홍종학 교수는 이에 더해 “재벌들이 불법행위를 하면 그 사람이 이건희 삼성 회장이든 누구든 합당한 죗값을 받도록 하고, 검찰이나 법원에서 재벌 눈치보기와 봐주기를 못하도록 관련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은 ‘기업집단법 제정’이라는 새로운 카드도 검토하고 있다. 각종 법률에 산재해 있는 재벌 관련 조항들을 단일 법률로 통합함으로써 재벌 관련 규제를 체계화하는 방안이다. 기업집단법 제정을 주창해온 김상조 소장은 “우리나라 경제가 재벌에 의해 주도되고 있지만, 법은 개별 법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괴리 현상이 심해 재벌에 대한 규율의 공백이 크다”고 지적했다. 독일은 기업집단(콘체른)을 회사법상의 주체로 인정하고 있다. 유종일 교수는 “재벌들의 일회성 선심 조처에 넘어가 지금 재벌 개혁을 포기한다면 불과 얼마 뒤에 재벌들은 다시 무분별한 사업 확장과 골목상권 진출을 재개할 것”이라며 “지금은 재벌 개혁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 되는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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