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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도 말 못할 보고서

삼성전자, 미국 인바이런 ‘반도체 근무환경 영문보고서’ 비밀유지 등 조건 달아 제한 공개… 반올림 “이런 공개 의미없다”
등록 2012-01-19 15:26 수정 2020-05-03 04:26
»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 가족들이 1월13일 서울 서초동 삼성 사옥 앞에서 미국 인바이런사의 보고서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 가족들이 1월13일 서울 서초동 삼성 사옥 앞에서 미국 인바이런사의 보고서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21> 김경호

‘이것은 보고서를 공개하겠다는 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삼성전자가 미국 산업보건 컨설팅회사 인바이런의 ‘반도체 근무환경 재조사 결과’ 보고서를 공개하며 보인 태도를 두고 나오는 말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7월 “6명의 백혈병 발병자와 반도체 생산라인의 근무환경과는 무관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근거 자료를 공개하지 않아 신뢰성 논란을 낳았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권오현 부회장(당시 사장)은 “인바이런사의 최종 보고서가 나오면 회사의 기밀사항을 제외하고 공개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비밀유지계약서 쓰고 2회 열람만 가능

5개월 뒤인 지난해 12월 삼성전자가 보고서 공개 계획을 공지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반올림)은, 삼성전자 쪽이 지난해 12월1일 삼성전자 영문 누리집에만 공개 계획을 알렸다고 밝혔다. 공지 내용은 ‘인바이런의 최종 보고서 원본은 삼성전자 기흥캠퍼스를 방문해 오로지 열람만 하겠다는 신청자에게만 공개한다. 이 공지사항은 2011년 12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게시한다’ 등이다. 우리말이 아닌 영문 누리집에만 올렸을 뿐만 아니라, 보고서를 보려면 삼성전자 기흥캠퍼스를 방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열람 조건은 예상보다 훨씬 까다롭다. 줄곧 삼성전자 반도체 문제를 제기해온 반올림은 삼성전자의 계획을 뒤늦게 알고 지난해 12월19일 삼성전자 건강연구소 쪽에 관련 문의를 했다. 하지만 답신을 받고는 열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삼성전자 건강연구소는 열람에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우선 열람은 12월에 한해 1회 2시간, 총 2회로 제한했다. 그것도 한글이 아닌 영문 보고서만 볼 수 있다. 더구나 신청자는 열람신청서·개인정보수집이용동의서·비밀유지계약서 등을 작성해야 했다. 사진·동영상 촬영, 녹취, 훼손 등도 금지했다. 이에 대해 반올림은 삼성전자 쪽에 다시 “(백혈병) 피해 당사자와 유족에게 영문 보고서를 보라는 것은 사실상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한국 번역본 제공 여부를 문의했다. 아울러 비밀유지계약서·개인정보수집이용동의서 등을 작성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카메라·캠코더 등을 금지한 것이 보안 때문이라면 다른 장소나 누리집을 통해 공개할 수 있는지 등을 물었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열람 기간을 1월13일까지로 연장하고, 1회 열람시간을 8시간으로 늘렸을 뿐 다른 조건은 바꿀 수 없다고 밝혔다. 한글 번역본의 제공이 불가능함은 물론 비밀유지계약서·개인정보수집이용동의서 등의 작성과 카메라·캠코더 같은 저장장치 금지 등 열람 절차를 그대로 따라줄 것을 요구했다.

누구나 납득하도록 투명 공개해야

반올림은 1월13일 기자회견을 열어 삼성전자의 좀더 투명한 공개를 촉구했다. 산업의학전문의 공유정옥씨는 “영문 보고서를 8시간이 아니라 80시간을 보더라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며 “설사 내용을 파악하더라도 비밀유지계약서 때문에 그 내용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삼성전자가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연구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좀더 투명한 공개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삼성전자 홍보실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식 홈페이지가 영문 홈페이지여서 그곳에 계획을 알린 것”이라며 “영업비밀이 공개될 수 있어 사내 보안규정에 따라 비밀유지계약서 등을 요구했고, 한글 번역본은 번역 과정에서 의미 전달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어 불가능하다”고 기존 방침을 고수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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