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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의 이상한 ‘사회공헌’

영업지원과 임직원 자녀 장학금으로 돈 쓰며 사회공헌 생색… 최진민 회장과 경영진의 오래된 관행에 증여세 포탈 논란 일어
등록 2011-11-01 17:06 수정 2020-05-03 04:26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귀뚜라미그룹 본사 전경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귀뚜라미그룹 본사 전경

“2007년도 장학사업지원 계획 금액은 영업지원(귀뚜라미·범양) 4억8700만원, 임직원 장학금(귀뚜라미·범양) 3억2천만원, 지역장학금(청도·철원) 2천만원 배정을 하였습니다.”(2007년 8월28일)

이 입수한, 귀뚜라미문화재단(이하 귀뚜라미재단) 장학사업 비용의 사용처와 관련해 귀뚜라미 임원들에게 간 전자우편의 한 토막이다. 귀뚜라미재단의 2007년 예산은 총 11억4410만원이었다. 이 가운데 장학금 지원은 8억2700만원으로 전체 예산의 73%를 차지했다. 나머지는 학술·연구비지원(2억5천만원), 사회복지지원사업(960만원), 인건비(5750만원) 등이었다.

장학사업이 판촉 수단?

그런데 장학금은 대부분 영업지원과 임직원 장학금에 쓰였다. 남은 것도 최 회장의 고향인 경북 청도와 계열사 귀뚜라미랜드가 있는 강원도 철원 지역에 집중됐다. 영업지원은 귀뚜라미 보일러나 범양냉방의 냉방기 등 계열사 제품을 더 팔려고 장학금을 활용한 것이다. 소비자가 보일러를 구매할 때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국보일러설비협회·한국열관리시공협회 등에 장학금을 몰아주고, 자사 제품 홍보를 겸하는 시상식을 열어 이를 기술세미나 지원 명목으로 후원하는 형식이다. 귀뚜라미의 전 임원은 “과거에는 대리점이 주로 보일러 설비업체를 상대로 영업활동을 펼쳤다”며 “대리점이 이들 업체의 자녀를 장학금 대상으로 추천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말했다.

귀뚜라미문화재단은 1985년 귀뚜라미그룹 최진민 회장이 설립해 2010년 기준 현금과 예금이 205억여원, 주식 16억여원 등 총 221억원이 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해마다 보유 자산에서 발생하는 이자 수익으로 10억여원의 장학사업을 펼치고 있다.

귀뚜라미는 20년 이상 전국적으로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과 저소득층 자녀, 우수 장학생, 소년·소녀 가장 등 5만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해왔다고 홍보했다. 또 산학협동 차원에서 학술연구 및 교육기관 지원 사업으로 수십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사회책임경영의 모범 기업으로 호평을 받아온 근거다.

하지만 귀뚜라미그룹의 내부 전자우편을 보면 장학사업에 쓰인 돈은 저소득층 자녀 지원 등 사회 환원보다는 회사 이익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주로 쓰였다. 전자우편에는 회사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담겨 있다. 계열사들의 영업을 돕기 위해 장학금이 쓰이고, 회사가 직접 부담해야 할 임직원 학자금을 장학금 형식으로 문화재단이 부담하는 식이다. 이런 행태는 오랜 관행이었다.

“지난 20년간 장학금은 대리점을 통해 설비업체, 자재상 등 당사의 거래처에 지급하였으나(매년 10억원 규모) 설비업체의 구매 영향력 및 충성도 약화와 관례화에 따른 효과 감소로 올해는 공식적으로는 대리점(설비업체)에 장학금을 배정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전국보일러설비협회와 한국열관리시공협회에 지급하던 장학금도 중단) 그동안 장학금 혜택을 받지 않은 외부 영입자 및 매출 활성화상 반드시 필요한 대리점에만 지급을 하였습니다.”(2007년 8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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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민 회장, 장학금 사용 방안 직접 지시

시간이 지나며 장학금 지급이 관행이 돼 애초 의도했던 영업지원 효과가 떨어지고 있음을 귀뚜라미도 알고 있었다. 영업지원 차원의 장학금은 소비자가 직접 대리점을 방문해 보일러를 구입하는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수년째 1인당 장학금이 중학생 50만원·고등학생 70만원·대학생 100만원으로 고정돼 물가상승률이 반영되지 않았다. 반면 임직원 학자금은 특별장학금 형식으로 지원돼 수업료, 등록금 등을 더 많이 지급했다. 귀뚜라미의 전 임원은 “대리점이 소비자를 상대로 영업하며 설비업체와의 관계도 유지되지 않았고, 나눠갖기 식으로 장학금이 지급돼 그 감동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이런 탓인지 귀뚜라미 쪽은 사용처를 조절하거나 회사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장학금을 쓸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다. 또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외환위기를 거치며 인수한 범양냉방·신성엔지니어링 등 계열사에도 영업지원을 위해 장학금이 쓰였다.

“지역장학금 2천만원은 금년부터 영업지원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없어지면서 업무상 꼭 필요한 부분에 사용하기 위하여 계획하였으나, 현재 미집행 상황입니다.”(2007년 8월28일)

“하반기 사업계획 집행시에 미집행 잔액 1억5천만원에 대해 출광 건으로 인한 소비자의 인지도 및 기업 이미지 제고와 범양의 영업 활성화를 위하여 보일러 및 냉방 영업지원 부문에 추가로 안분 배정하였으면 합니다.”(같은 전자우편)

‘출광 건’은 귀뚜라미가 2002년부터 2004년까지 판매한 ‘출광21’ 가스보일러가 3~5년이 지나 같은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해 소비자의 반발을 산 사건이다. 당시 귀뚜라미는 처음에는 문제를 부인하다 언론 보도로 문제점이 알려지자 잘못을 인정하고 ‘자발적 리콜’을 실시했다.

최진민 회장도 재단의 돈을 회사의 이익과 결부시키기 위해 직접 방안을 내놓았다.

“문화재단 장학사업 지원 관련하여 명예회장님께서 각 사업장에서 업무를 하면서 회사와 연계하여 회사에 도움이 되고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회사 미래의 발전을 위하는 방향에서 대학교수 대상으로 연구지원비를 지원할 대상이 있는지를 각 사업장별로 확인하여 지원을 하시라는 말씀을 전해드립니다.”(2007년 9월17일)

그 결과인지 2006년 경기대의 홍아무개 교수에게 ‘국내 사용 조건에 따른 콘덴싱 가스보일러의 실제 열효율 측정 및 응축수 발생에 따른 환경 문제점에 관한 연구’에 5천만원을 지원하는 등 2010년 4월까지 6건에 대해 1억5300만원을 지원했다.

귀뚜라미의 거짓 해명

최 회장의 아들 성환씨도 전자우편을 통해 장학금을 회사 이익을 위해 사용할 구체적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문화재단이 있는 곳에서는 꼭 1년에 한 번씩은 (중략) 사회 유력 인사(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를 대상으로 2인에서 3인가량을 뽑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향후 자라나서 회사를 남모르게 돕는 역할을 하는 인맥을 만드는 과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많이 하지는 말고 1인당 2천만원 한도 내에서 3인 정도 총 6천만원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이 어떨는지요.”(2007년 8월29일)

앞서 귀뚜라미 쪽은 임직원 학자금 지원과 관련한 의 취재에 대해 귀뚜라미의 방혜정 홍보팀장은 “2009년에 한해 사내 복지기금이 고갈돼 문화재단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명한 바 있다(880호 특집 ‘세금 떼먹은 귀뚜라미?’ 참조). 사실을 은폐한 거짓 해명이다. 이 최근 2007년과 그 이전에도 재단 장학금이 취지와 다르게 쓰인 사실이 담긴 옛 전자우편 내용을 제시하자 방 팀장은 “문화재단 관계자에게 확인했더니 ‘그때 거짓말을 했다’고 말했다”며 “그 이유를 다시 물었더니 ‘모든 것을 얘기해줄 의무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귀뚜라미재단의 장학금이 취지와 어긋나게 활용되는 동안 이사회는 뭐했을까?

“2007년도 귀뚜라미문화재단 장학금 지원 사업계획에 보고드립니다. 2007년도 고유목적사업비로 사용하여야 할 총 예산금액은 2006년보다 3억2천만원이 줄어든 11억3400만원(고유목적의무사용 비율 5년 평균 90%를 맞추기 위한 금액)입니다. (중략) 참고하시어 기술세미나 및 협회 등 유관기관 장학금 배분, 아산 지역 장학금 배분(안)에 대한 지침을 부탁드립니다.”(2006년 12월10일)

이 보고는 재단 이사회에 올라간 것이 아니다. 보고 대상은 귀뚜라미 임원들이었다. 이처럼 최 회장을 비롯해 임원들끼리 장학금 사용처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식이었다. 귀뚜라미의 전 임원은 “장학금을 쓰는 목적이 회사 이익을 키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며 “영업 목적으로 사용처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면 재단 이사회는 그에 맞춰 동의하는 ‘거수기’ 노릇을 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을 보면, 이사회는 ‘예산, 결산, 차임금 및 재산의 취득·처분과 관리에 관한 사항’을 심의·결정할 수 있다. 재단의 돈이 어디에 쓰일지 결정 권한을 갖고 있다. 하지만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이뤄진 귀뚜라미재단 이사회 회의록을 살펴보면 면밀한 심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A4용지 3장으로 구성된 회의록은 임원 8명(이사 6명, 감사 2명) 가운데 6~8명이 참석해 진행됐다. 의장이 개회를 선언한 뒤 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이어 다른 이사가 의견을 말하면 다른 이사들이 동의한 뒤 끝나는 식이다. 의안에 대한 반대 토론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에 대해 귀뚜라미 쪽은 말을 아꼈다. 방혜정 홍보팀장은 “내부 전자우편을 봤으니 있는 내용을 부인할 수도 없고, 그대로 설명하기도 그렇다”며 “전자우편을 본 대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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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청, “사실이면 증여세 포탈 혐의”

이런 문제점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12월 이틀간 감사를 펼쳤지만 귀뚜라미재단의 위법 행위를 밝혀내지 못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재단에서 제출한 서류만을 봐서는 장학금을 받는 대상이 임직원 자녀나 회사와 영업상 관계가 있는 단체의 자녀인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며 “감사를 해도 압수수색하는 등의 권한이 없어 한계가 있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장학금을 재단 설립 취지와 다르게 사용한 사실이 확인되면 경고 또는 시정 조처와 함께 국세청에 증여세 포탈 등의 혐의로 신고할 것”이라며 “시정 조처에 따르지 않을 때는 서울시 교육감이 재단 해산 조처를 취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의회는 지난 10월27일, 11월 열릴 서울시교육청 행정감사에서 귀뚜라미문화재단 이기준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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