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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이학수, 사랑한 후에

이학수 삼성물산 고문 2천억원대 빌딩 등 재산형성에 직위 이용했나…삼성 공식 반응 없지만, 실질적 계열사로 여겨지는 건축사는 이 고문 소유 빌딩에서 나올 예정
등록 2011-09-28 17:11 수정 2020-05-03 04:26
삼성물산 이학수 고문 일가가 시가 2천억원대인 서울 대치동의 L&B타워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그의 재산 규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삼성물산 이학수 고문 일가가 시가 2천억원대인 서울 대치동의 L&B타워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그의 재산 규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이학수 삼성물산 고문은 한때 ‘이건희 회장의 2인자’ 또는 ‘오른팔’ 등 흔한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권한의 소유자였다. 구조조정본부장, 부회장, 삼성전략기획위원장 등의 직함을 걸고 베일 뒤의 이 회장을 대신해 삼성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지난해 11월 삼성물산 고문으로 발령나 사실상 은퇴한 뒤에도 그의 복귀설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복귀설은 간 데 없고 대신 이학수 고문의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올 초 이건희 회장이 이학수 고문의 재산 상황을 보고받고 크게 화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고문의 재산이 1조원이 넘는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그가 1971년 제일모직에 입사해 40년 동안 일하며 쌓은 재산 규모는 지금껏 정확하게 알려진 게 없다. 다만 2009년 삼성의 주요 계열사에 이사로 재직하며 보유한 스톡옵션의 가치가 1천억원을 훌쩍 넘는 것으로 파악된 바 있다.

삼성의 겸업금지 규정 위반?

이런 상황에서 이학수 고문 일가의 회사가 서울 강남의 요지에 2천억원대의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거져나왔다. 재벌닷컴은 지난 9월20일 이학수 고문이 서울 대치동 ‘L&B타워’의 소유주라고 밝혔다. 규모는 지상 19층, 지하 4층으로, 토지 618.6㎡, 연면적 1만3936㎡이다. 이 빌딩은 ‘엘앤비인베스트먼트’라는 회사가 보유하고 있으며, 회사 지분은 이 고문 부부와 자녀 3명이 각각 20%씩 나눠갖고 있다고 한다. L&B라는 이름은 이 고문과 아내 백아무개(61)씨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엘앤비인베스트먼트의 법인등기를 살펴보면, 2006년 3월 이 고문의 아내와 딸(38)이 각각 이사와 감사로 취임해 계속 등재된 상태다. 이 회사는 현재 L&B타워 19층에 있다. 회사 관계자는 과의 전화 통화에서 “(이학수 고문의 부인과 딸인) 백 이사와 이 감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박아무개 대표는 매주 월요일 오전에만 출근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L&B타워의 청소용역·주차관리 등 빌딩 관리를 맡고 있는 RCS도 이학수 고문 소유가 아니냐는 의심이 덧붙여진다. 2001년 3월 설립된 이 회사는 청소용역·경비용역·시설관리·주차관리·조경·건설 등이 주업이다. 현재 엘앤비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사인 박아무개(60)씨는 RCS의 대표이사도 겸하고 있다. 게다가 설립 당시 입주한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건물은 삼성물산이 소유하고 있다가 삼성자동차로 이전된 뒤, 2000년 8월 르노삼성자동차에 매각됐다. 설립 때부터 ‘삼성’이라는 두 글자와 인연을 맺어온 셈이다. RCS는 2006년 엘앤비인베스트먼트(당시 다성양행)가 2006년 서울 역삼동의 역삼빌딩에서 대치동의 L&B타워로 이사가자 빈자리로 옮겨왔다. 5층 규모의 역삼빌딩은 박 대표가 현재 절반을 소유하고 있다.

이학수 고문의 삼성그룹 내부 윤리규정 위반 여부가 주목받는 까닭이다. 삼성에는 겸업을 금지하는 윤리규정이 있다. 주식 투자, 지분 참여 등은 감사를 통해 내부 정보 이용 여부에 따라 판단한다. 하지만 삼성은 이 고문에 대해 조사를 하겠다는 등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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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월에서 어색한 침묵으로

하지만 이 고문 소유의 회사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삼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정황은 여럿 있다. 엘앤비인베스트먼트는 지난 4월까지 다성양행이었다. 1990년 설립된 이 회사는 수입상품 도·소매업, 수출입업 및 대행 등이 회사 목적이었다. 1994년 4월 발간된 를 보면, 다성양행은 무수초산(Acetic anhydride)을 수입하는 업체로 소개됐다. 헤로인을 정제하는 데 쓰이기도 하는 무수초산은 주로 삼성BP화학이 수입량의 80%가량을 소비한다. 다성양행이 수입한 무수초산이 주로 삼성BP화학에 납품됐을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이 고문 소유 회사의 삼성과의 ‘밀월’은 부동산 업체로 탈바꿈한 뒤에도 이어진다. 다성양행은 2006년 3월 대치동 땅을 산 뒤 회사 목적을 부동산 소유·임대 등으로 바꾼다. 빌딩 완공 뒤에는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와 입주 계약을 맺는다.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는 1976년 설립된 이후 줄곧 ‘삼성 계열사’로 건축계에서 통하는 곳이다. 한 건축사는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는 건설사가 설계와 시공을 함께 할 수 없어 (삼성물산에서) 분리된 것일뿐이지 타워팰리스·종로타워 같은 삼성의 주요 건축물 설계를 맡는 등 많은 사람들이 삼성 계열사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삼성 쪽은 “공식적인 입장은 하나도 없다”고 밝혔다. 이 고문이 2인자일 때 그룹 차원에서 적극적인 방어를 해온 선례와는 사뭇 다른 태도다. 그럼에도 삼성 안팎에서는 이 고문과 관련된 말들이 하나둘 흘러나온다.

삼성 관계자에 따르면 삼성 쪽도 이미 이학수 고문의 L&B타워 소유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 삼성물산 건설부문을 경영진단했을 때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가 이 고문 소유의 빌딩에 입주한 사실 등이 문제가 된 바 있다”고 말했다.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는 서울 잠실 애플타워의 4~14층을 2002년부터 임대해 사용한 것과는 별도로 본사와 거리가 있는 이학수 고문의 빌딩 대부분을 2008년부터 쓰고 있다.

또 삼성 관계자는 “(삼성 쪽에서 이학수 고문 소유) 건물에서 나오라고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에 요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그 때문인지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전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 부동산에서도 L&B타워의 입주자를 찾는다는 광고가 등장했다. 한 부동산업자는 “L&B타워에 입주한 기업은 오는 10월에 다른 곳으로 옮긴다”며 “그 전이라도 입주를 원하는 곳이 있으면 한 층만이라도 우선 비워주기로 돼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 발언이 새삼스러운 이유

최근 삼성 쪽은 이 고문에 대한 처우를 두고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또 다른 관계자는 “이 고문으로선 개인 돈으로 정상적으로 샀다고 할 수 있지만, (삼성의 실질적 계열사인) 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가 입주하는 등 몇 가지 문제가 드러난 상태”라며 “내부 부패 척결의 대상으로 돼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를 드러내놓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6월 계열사 사장단 회의석에서 “삼성의 자랑이던 깨끗한 조직문화가 훼손됐다. 부정을 저지르면 큰일 난다는 생각을 심어줘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 회장의 이 발언에 대해 당시 삼성 쪽은 삼성테크윈과 관련된 비리를 보고받고 보인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실력자 이학수 고문과 관계 정리 조짐을 보이는 삼성 쪽의 요즘 분위기를 보면, 이건희 회장의 당시 발언의 실질적 표적이 누구였는지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어 보인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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