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부품을 공급하는 중소기업을 잡아먹는 대기업.”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하도급거래 조사를 맡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간부 눈에 비친 대한민국 대기업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공정위의 현직 과장이 조사 현장에서 직접 겪은 경험담을 담은 이라는 책을 펴냈다. 주인공은 이경만 공정위 소비자안전정보과장. 그는 사무관부터 과장까지 하도급거래 업무만 7년을 맡은 이 분야의 베테랑이다. 하도급개선과장, 가맹유통과장으로 있을 때는 업계에서 ‘독사’라고 불렸다. 행정고시를 합격한 현역 간부가 조사 경험을 책으로 엮어낸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공정위에서 다룬 수많은 사건,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기업 현장에서 획득한 자료, 대기업의 눈을 피해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들과 나눈 대화를 생생히 접할 수 있는 것은 큰 매력이다. 최근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제시한 ‘초과이익공유제’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시점이라 눈길이 더욱 간다.
“차라리 회사가 망했으면 좋겠다”
이 과장은 한국의 하도급거래를 약육강식 법칙이 지배하는 비정한 ‘정글’에 비유한다. 이 정글에는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사나운 맹수(대기업)와 그들의 먹잇감(중소기업)이 살아간다. 그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잡아먹는 수법을 정글의 7가지 함정에 비유했다. △전속거래 유혹 △핵심 기술이나 인재 빼가기 △무자비한 단가 인하 압력 △일방적 구매 중단 △중소기업이 키워놓은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기 등.
“차라리 회사가 망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과장이 2007년 불공정 하도급거래 현장조사를 위해 P중소기업을 찾아갔을 때 회사 구매부장에게 들은 충격적인 얘기다. 대기업이 납품단가를 너무 심하게 깎아서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하소연이었다. 매출액이 800억원인데 순이익은 겨우 2억원에 불과하니, 사실상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 기술개발 투자나 인재 확보는 꿈같은 얘기일 뿐이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영업이익률을 기준으로 납품단가 인하율을 획일적으로 결정하는 횡포를 부린다. 납품 중소기업의 이익률이 10% 이상이면 인하율은 5%, 이익률이 5%면 인하율은 2%, 이익률이 3%면 인하율은 1%로 정하는 식이다. 대기업의 사냥감이 안 되려면 이익률이 1% 이하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더 이상 납품단가 인하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은 결국 거래 대상에서 쫓아낸다. 이 과장은 “일부 대기업이 매년 15% 이상 높은 영업이익률을 유지하는 비결은 하도급 구매 단가를 낮추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이 과장은 정부가 공정한 하도급거래 질서 확립과 동반성장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하고 대기업이 중소기업 지원책을 약속하지만,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문제가 이른 시일 안에 해결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면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잡혀먹힐 수밖에 없는 운명일까? 이 과장은 “살아날 묘책이 있다”고 말한다. △핵심 역량에 집중하는 DNA 전략 △분명한 목표 설정 전략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가는 성장 전략 △성공할 때까지 버티는 맷집 전략 등 ‘4가지 포석 전략’이 그가 내놓는 해법이다. 성장 전략은 다시 네 유형으로 나뉜다. △자기만의 유통채널을 만들고 △해외에 먼저 진출하며 △기술의 지속적 우위를 차지하고 △공급자 독과점을 확보하는 것이다.
미국에선 판례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책의 또 다른 즐거움은 지난 8년간 이 과장이 축적해온 방대한 국내외 경영정보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개인 홈페이지(1234way.com)에 축적된 국내외 기업들의 성공사례, 경영전략, 리더십 등에 관한 정보는 3600여 개에 달한다. 이 과장은 지금도 매일 새로운 경영정보를 2개씩 뽑아 중소기업 CEO들에게 ‘지식비타민’이라는 제목으로 전자우편을 보낸다.
이 과장은 2009년 여름부터 1년6개월 동안 미국에서 연수했다. 책도 이때 집필한 것이다. 그는 연수 기간에 미국 대법원 판례 중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불공정 행위를 하다가 적발된 사건을 조사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는 판례를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거래 행위는 대한민국의 토산품이다.” 그가 내린 결론이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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