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 막바지에 돌입한 11월11일 오전, 외교통상부에 한-미 FTA 재협상의 공식 명칭을 문의했다. “한-미 FTA 재협상과 추가 협상, 그리고 협의 가운데 대체 어떤 표현이 맞습니까.” 설왕설래 끝에 통상교섭본부 통상기획홍보과에서는 최종적으로 “우리 정부는 재협상이라 하지 않고 협의라고 표현한다”고 답해왔다. 다만 여기에도 “공식 명칭이라 할 수는 없고, 통상적으로 그렇게 쓴다는 이야기”라는 단서가 붙었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1월11일 청와대에서 한-미 FTA 재협상 등 양국 간 현안을 논의했다.와대사진기자단
‘협의’라 쓰고 ‘재협상’이라 읽는다. 정부와 정치권 및 언론은 각각 이렇게 다른 명칭을 쓰고 있다. 한-미 FTA 재협상의 명칭을 둘러싼 이같은 혼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해영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과)는 “미국 의회나 언론은 기존 협상을 다시 한다는 의미에서 ‘재협상’(renegotiation)이라고 표현하는데, 유독 우리 정부만 ‘협의’란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협의는 곧 ‘국내용’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인식이다.
“재협상을 협의로 규정하면 국회 비준을 피해갈 수 있다는 (정부만의)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본다. 동시에 정부가 그동안 재협상이나 추가 협상은 없다고 수차례 이야기했다. 재협상을 재협상으로 규정할 때, 논리의 모순이 빚어질 수 있다. 그러니 ‘눈 가리고 아웅’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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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명박 대통령과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등은 한-미 FTA 재협상에 대해 수차례 ‘책임지지 못할 말’을 했다. 특히 이번 재협상의 쟁점이던 자동차 문제에 관한 한국 정부의 말 바꾸기 전력은 화려하다.
2008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한 뒤 잠잠했던 미국산 자동차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이 자동차 재협상으로 얻을 것은 없다.” 2008년 11월10일 이혜민 한-미 FTA 교섭대표의 발언이다. 한-미 양국에서 솔솔 불어오던 ‘자동차 재협상설’에 대해 정부가 내놓은 공식 입장이었다. 이듬해 1월21일에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국회의 한-미 FTA 비준 처리를 앞둔 상황에서 “우리가 재협상, 추가 협상을 초래하는 듯한 상황을 만드는 것은 협상 전략 노출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이 그러한 유혹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며 “재협상은 절대 없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명박 대통령 “다시 해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의 단호한 태도는 미국이 자동차 문제를 놓고 강경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조금씩 달라졌다. “재협상이나 추가 협상이 없다는 정부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이 추가 협상을 요구할 경우) 그런 사정이 되면 그때 가서 보겠지만 아직은 가정을 전제로 걱정하지 않고 있다.”(2009년 3월11일, 김종훈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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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가 현실화한 것은 2009년 11월19일이었다. “자동차 문제가 있다면, (미국과) 다시 이야기해볼 수 있다.” 이날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미 대통령에게 건넨 말이다. 미국의 자동차 재협상 요구를 사실상 받아들이겠다는 발언이었다.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파문이 커지자 유명환 당시 외교부 장관이 다음날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미국이 자동차와 관련해 구체적인 문제제기를 하면 검토하겠다는 것일 뿐 재협상이나 추가 협상은 절대 없다”고 약속했다.
정부의 호언장담과 달리 미국 의회나 언론에서는 미국산 쇠고기와 자동차 문제를 해결하려면 재협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전했다. 마침내 지난 8월23일 는 한-미 FTA에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던 오바마 대통령이 이 대통령에게서 한-미 FTA의 미 의회 비준을 위해 ‘추가 양보’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FTA 지지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고 보도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유력 언론이 구체적으로 이 대통령의 ‘추가 양보’ 약속을 소개했는데도, 우리 정부는 당시는 물론 11월4일 결국 재협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국민에게 ‘재협상은 없다’는 발언을 녹음기처럼 반복했다. ‘협의’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FTA 재협상은 11월11일 한-미 양국 정상이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해 일단 결렬됐지만, 정부는 이미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안전기준 및 연비·배기가스 등 환경기준을 완화해달라는 미국 쪽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상황이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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