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기류가 심상찮다.
지난 2007년 6월 양국의 서명이 이뤄진 뒤 3년 넘게 잠복기를 거친 자유무역협정안이 올해 들어 부쩍 워싱턴과 서울의 관계에서 입길에 오르고 있다. 특히 올여름 들어 그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font color="#00847C">“한국 의회에 짜증난다”</font>이번달 들어서는 백악관이 포문을 열었다. 로버트 기브스 대변인은 지난 8월3일 정례 브리핑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11월 서울에 가기 전에 자동차와 쇠고기 산업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한국과의) 합의안을 제시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FTA 협상을 맡은 무역대표부의 론 커크 대표는 한 걸음 더 나갔다. 그는 8월4일 미국 상원 농림식량위원회 청문회에 나와 “(한국 등) 교역 파트너들이 미 의회의 태도에 불평하면서 (자신들은) 뒤에 항상 숨어 있는 것에 짜증이 난다. …한국은 협상 테이블로 나오라”고 대놓고 말했다. 미국 의회도 화답했다. 맥스 보커스 미국 상원 재무위원장(민주당)은 같은 날 한국이 쇠고기 시장을 전면 개방하지 않으면 한-미 FTA 비준을 막을 수 있다고 시사했다.
워싱턴에서 들려오는 발언은 수위가 높지만, 찬찬히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특히 론 커크 대표의 말은 비록 미국 의회에서 한 말이지만 외교적 결례에 가깝다. 3년 넘게 FTA의 국회 비준을 차일피일 미룬 것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회는 협정 발효를 위해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지난해 상임위에서 통과시켰다. 정작 미국 행정부는 의회의 눈치를 보며 3년째 비준안을 제출하지 않고 있다. 미국 쪽의 발언은 전형적으로 ‘방귀 뀐 놈이 성질내는’ 경우다.
그렇다면 미국 쪽은 왜 억지를 부리는 걸까? 이를테면 저잣거리의 흥정과 비슷하게 보면 된다. 비싸고 질 낮은 물건을 파는 상인에게는 손님이 아예 오지 않는다. 손님이 상인에게 다가와 티 나게 물건의 흠을 잡는다면, 손님은 물건에 관심이 있다는 뜻이다. 손님의 트집은 흥정을 유리하게 몰고 가려는 전술로 풀이할 수 있다. 미국이 올해 들어 유독 시비를 많이 건 이유는 역설적으로 한-미 FTA가 미국에 흥정할 만한 ‘상품’으로 부각됐다는 뜻이다.
미국의 본심을 보려면 지난해 1월에 나온 연두교서를 읽을 필요가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5년 안에 수출을 두 배로 늘리겠다”고 약속하며 “한국·파나마·콜롬비아와 같은 주요 교역 상대국과 무역관계를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지목한 세 나라는 모두 FTA 협정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백악관이 연초에 낸 ‘수출 증대 방안 진전 보고서’를 보면 “한-미 FTA는 (미국 상품의) 수출을 100억∼110억달러 정도 늘리고 약 7만 개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속내를 보면, 금융위기 이후 침체된 미국 경제의 돌파구는 수출에 있고, 수출은 한국 등 FTA 상대국과의 교역을 통해 대폭 늘리겠다는 것이다.
속내는 행동으로 이미 옮겨졌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오는 11월까지 남은 쟁점을 해소하고 내년 초에는 비준안을 의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겨우 3개월이다. 그만큼 미국 쪽이 급하다는 뜻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은 남는다. 미국 행정부 한쪽은 협상 일정을 급하게 짜면서, 한쪽에서는 자동차와 쇠고기 문제를 들어 계속 트집을 잡기 때문이다. 딴죽을 거는 속셈이야 우리나라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의도겠지만, 정도가 지나치다. 여기에는 좀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세 가지로 나눠 살펴볼 수 있다.
<font color="#C21A8D">중간선거·지역구 이해 등 복잡한 변수</font>
첫째, 11월 미국의 중간선거가 중요한 변수다. 미국 행정부는 자칫 투표자의 마음을 잃을 수 있는 이슈에 대해 조심스럽다. 미국 자동차 산업 종사 인구는 200만~3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또 쇠고기 문제는 미국 서부를 가로지르는 ‘쇠고기 벨트’ 지역인 몬태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등의 표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에 11월 중간선거는 ‘발등의 불’이다. 자동차와 쇠고기 문제에 강경한 발언을 해서라도 미국 내 ‘반FTA 정서’를 무마할 필요가 있다.
둘째, 민주당이 오랫동안 보호주의적 입장을 지켜온 점도 작용하고 있다. 한-미 FTA는 공화당 출신인 부시 전 대통령의 작품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008년 대선 기간 내내 자동차 부문의 한-미 간 무역 불균형 문제를 얘기했다. 한-미 FTA 재협상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그가 한-미 FTA에 우호적으로 돌아선 것은 백악관에 입성한 다음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바뀌었다고 해서 민주당 전체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에서는 여전히 FTA 회의론이 많다. 지난 7월22일에도 민주당 소속 연방 하원의원 109명이 한-미 FTA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서한을 백악관에 전달했다.
셋째, 미국 상·하원의 성향도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국 상원은 전통적으로 국제 조약 비준에는 우호적으로 표결을 하는 경향이 있다. 연방 상원의원들은 상대적으로 지역구의 이해관계에 덜 영향을 받는다. 반면 하원의원들은 출신 지역의 이해관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미 FTA에 반대 의견을 던진 하원의원 109명 가운데 지역구에 자동차 혹은 쇠고기 산업을 둔 의원이 다수 있다. 협상 내용에 밝은 우리나라의 한 관계자는 “한-미 FTA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더라도, ‘친FTA’로 돌아서는 조건으로 지역구의 민원을 해결하려는 의원도 일부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익명을 조건으로 “미국이 단일한 입장과 이해관계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상·하원과 행정부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뒤섞이면서 의견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미 FTA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크게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 FTA 서명안 수정, 둘째 FTA 서명안 그대로 통과, 셋째 제3의 방법을 통한 FTA 발효의 수순이다.
이 중 서명안을 수정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 우선 우리나라 정부가 3년 넘게 재협상 불가 방침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미국 정부의 요구에 밀려 방침을 바꿀 만한 명분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 정부 관계자는 “재협상을 하는 순간, 이해의 균형이 무너져내리게 된다”며 “이를 다시 조정하는 상황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다. 미국이 아직까지 재협상을 하자는 제안을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내놓지 못하는 까닭이다. 미국에서 종종 나오는 재협상론은 ‘국내용’의 성격이 강하다.
<font color="#008ABD">별로 창조적이지 않은 창조적 해법</font>
한-미 FTA가 지금 모양 그대로 미국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도 크지 않다. 이번에는 미국 행정부가 의회를 설득할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백악관까지 나서서 쇠고기·자동차 교역 조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온 탓이 크다. 두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양보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미국 행정부는 의회에 비준안을 제출할 구실이 생긴다.
결국 우리나라와 미국의 행정부가 모두 명분과 실리를 취할 수 있는 ‘제3의 방안’이 필요한 셈이다. 한덕수 주미대사는 지난 7월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재미있는 표현을 썼다. 그는 “한국은 국내 시장을 미국 쇠고기와 자동차에 개방하기 위해 ‘창조적인 해법’을 고려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과연 그가 말한 ‘창조적인 해법’이란 무엇일까? 주무부처인 통상교섭본부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재협상은 불가”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FTA 협정문 본문에 따라붙는 부속서한(Side Letter)과 부속협정(Side Agreement)에 주목하고 있다. 부속서한은 말 그대로 FTA 본 협정문의 내용에 대해 양국이 추가적으로 주고받은 서신이고, 부속협정이란 본 협정문에 양국의 추가 합의 내용을 덧붙인 것이다. 양국이 합의하면 언제든 부속협정이나 부속서한을 작성할 수 있다. 부속서한과 부속협정도 FTA 협정 본문에 준하는 법적 위상을 가질 수 있다. 부속협정·서한이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헌법 60조) 내용을 담을 경우엔 별도의 국회 비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는 “미국과 우리나라가 FTA 내용에 대해 절충을 벌인다면 자동차 분야에서 부속협정을 맺는 방식이 가장 유력하다”고 전망했다. 미국 쪽은 경트럭의 수입 관세 철폐 시한을 미뤄달라고 우리나라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협정문은 그대로 두고 국내법을 고치는 식으로 타협할 수 있다는 예측도 있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협정문에는 손대지 않고, 두 나라의 관세법을 조금 고치는 식으로 절충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두 나라가 합의하에 FTA 조항을 함께 ‘어기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중소형 자동차에 대한 관세는 FTA 협정이 발효되면 바로 철폐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 자동차업계는 한국산 자동차에 대한 수입 관세를 한동안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산 자동차의 대한국 수출량과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논리다. 이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건, FTA 원칙을 어기고 미국 관세법을 유지할 때 가능하게 된다. 이런 식의 ‘꼼수’도 미국 쪽의 의견을 수용하는 한 방안으로 논의되고 있다.
국내 반응도 또 하나의 변수다. 아직 미국에서 협상 카드를 공식적으로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은 없다. 정부 관계자는 “공은 미국 쪽으로 넘어간 상황”이라고 말했다. FTA의 향방은 미국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국내에서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이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이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쇠고기 수입 조건을 더욱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쪽의 희망이 관철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주변의 일본, 대만, 중국, 오스트레일리아와 견줘 우리나라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조건이 가장 너그럽기 때문이다.
<font color="#A341B1">제2의 촛불이 불붙나</font>
그렇다고 마냥 낙관만 할 수도 없다. 론 커크 무역대표부 대표는 지난 8월6일 미국 국내 사업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동차와 쇠고기 교역조건에 집중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미국이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면, 두 나라가 절충점을 찾기 어렵다. 정부 관계자는 “예단할 수는 없지만, 미국 쪽에서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은 “미국의 강경한 입장이 한국에도 관철되는 식으로 상황이 진전되면 시민사회의 저항도 적지 않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렇다면 쇠고기 등 남은 문제로 인해 한-미 FTA가 좌초하거나 표류할 가능성은 없을까? 정부 관계자는 “두 대통령이 강한 의지가 있고, 두 나라에 이미 FTA를 지지하는 이해 세력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협정이 주저앉을 가능성은 낮다. 다만 미국 쪽에서 반대 세력을 설득하느라 시간이 걸릴 수는 있다”고 말했다. 정인교 교수는 “두 나라가 남은 쟁점을 마무리하려면 내년까지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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