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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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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 지갑만 열리는 ‘소비 양극화’

백화점 매출 폭발적으로 느는데 할인점은 지지부진…
가계 부채 때문에 서민층은 소득 늘어도 허리띠 안 풀어
등록 2010-08-12 16:59 수정 2020-05-03 04:26
백화점들이 최대 실적을 잇따라 내놓고 수입차 판매도 급증했지만 할인점 판매는 크게 늘지 않는다. 서울의 한 백화점 매장(왼쪽)과 수입차 전시장. 한겨레21 정용일 기자·연합

백화점들이 최대 실적을 잇따라 내놓고 수입차 판매도 급증했지만 할인점 판매는 크게 늘지 않는다. 서울의 한 백화점 매장(왼쪽)과 수입차 전시장. 한겨레21 정용일 기자·연합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은 지난해 4월 명품관 지하 1층을 싹 바꿨다. 백화점 직원 사무 공간은 다른 건물로 옮기고, 와인 가게는 4층으로 올려보냈다. 이 자리에는 최고급 브랜드 매장을 들였다. 카르티에, 쇼메, 반클리프아펠, 부셰론 등이 입점했다. 최고급 소비자층의 취향을 고려해서 새 매장 공간은 짧게짧게 끊었다. 매장 곳곳에는 언뜻 눈에 띄지 않는 ‘숨은’ 공간이 마련됐다. 고객이 다른 사람의 이목을 받지 않고 명품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였다. 고속 성장하는 명품 시장에서 계속 지분을 유지하기 위한 백화점의 방책이기도 했다. 백화점이 관리하는 ‘우수 고객’의 매출은 경기 침체에도 2008년 이후 2년 연속 9%의 성장률을 보였다. 올해 상반기의 매출은 지난해보다 12%나 늘었다. 백화점 관계자는 “매장을 확장하면서 매출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올해 판매액은 그 기대를 넘어섰다”고 설명했다.

 

고급 호텔·수입차 시장도 호조

꽁꽁 얼었던 경기가 풀리면서 백화점과 면세점, 호텔 등 고가 상품 시장이 달아오르고 있다. 백화점들이 역대 최대 실적을 잇따라 내놓고 있고, 면세점은 환율 효과까지 겹치면서 판매가 치솟고 있다. 고소득층의 소비가 올해 들어 급격하게 늘었기 때문이다.

신세계는 지난 8월14일 상반기 매출 실적을 발표했다. 백화점 매출은 지난해 상반기보다 12.8%나 증가했다. 특히 서울 강남점의 매출이 상반기에 처음으로 5천억원을 넘어섰다. 강남점은 올해 매출 목표인 1조원을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장대규 신세계 홍보팀 과장은 “VIP 고객 중심으로 명품 판매가 매출을 이끌면서 남성, 스포츠, 아웃도어 등 대부분의 영역에서 골고루 성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백화점의 판매 호조에 힘입어 종합유통그룹인 신세계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6조9915억원에 이르렀다. 역대 최대 규모다.

라이벌 업체인 롯데백화점도 판매 특수를 즐기고 있다. 지난 상반기 매출이 12% 늘었다. 백화점을 거느리는 롯데쇼핑의 상반기 매출액도 6조6072억원으로 역대 최고 기록을 깼다.

해외 출국이 늘어나면서 면세점도 판매 특수다. 신라호텔 면세점은 지난 상반기 매출이 19% 증가했다. 면세점 관계자는 “엔화 강세로 일본인 관광객이 늘어났고, 환율 효과와 경기회복을 타면서 판매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동화면세점도 한국인 우수 고객을 대상으로 한 매출이 지난해보다 25% 정도 성장했다고 밝혔다. 동화면세점의 김영선 홍보팀장은 “올해는 특히 20~30대 고객층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했다.

고소득층이 돈을 풀면서 수입차 시장도 뜨겁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의 자료를 보면, 올해 들어 새로 등록된 수입차는 4만9613대로, 지난해보다 50.0% 늘었다. 특히 7월 판매 대수는 7666대로, 지난해보다 두 배 가까이(89.9%) 늘었다. 메르세데스벤츠(8983대·129% 증가), 닛산(2173대·111% 증가) 등의 판매 증가 비율이 높았다. BMW그룹 코리아에서 판매하는 롤스로이스 모델은 지난해 1대가 등록됐을 뿐이지만, 올해 들어서는 6대나 새 주인을 찾았다.

소득별 소비지출 증가율 11.1% 대 4.3%

고소득층이 지갑을 크게 여는 동안 서민은 졸라맨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백화점 판매액은 지난 2007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표1 참조), 서민이 즐겨 찾는 대형 할인마트의 판매 증가율은 같은 기간 계속 줄었다. 올해도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백화점 시장은 성장세를 유지하지만, 할인점 시장은 지난해보다 성장률이 소폭 상승하는 데 그칠 것으로 올 초 전망했다. 솔로몬투자증권은 지난 7월에 낸 보고서에서 “소비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고소득 계층을 주고객으로 둔 백화점 시장은 계속 높은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한다”고 분석했다.

통계청의 1분기 ‘가계동향’을 봐도 양극화한 소비 패턴을 확인할 수 있다. 소득 상위 20%인 5분위 계층은 1분기에 월평균 386만원을 썼다. 1년 전보다 11.1%를 더 썼다. 전체 1~5분위 계층 가운데서 지출액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소득 하위 20%인 1분위 계층은 월평균 119만원을 소비했다. 지난해보다 4.3% 더 썼을 뿐이다. 고소득층이 지난해 100원을 썼다면 올해 들어 11원을 더 쓴 반면, 저소득층은 지난해 쓴 100원에서 4원만 더 썼다는 말이다. 2%대의 물가상승률을 생각하면 저소득층의 소비는 미미하게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소비 패턴은 경제학적 상식에 어긋난다. 흔히 수입이 늘어나면 고소득층은 저축을 하고, 저소득층은 소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한계소비성향’이라는 개념을 잠시 살펴보자. 한계소비성향이란 늘어난 소득 가운데 저축하지 않고 소비하는 비율을 말한다. 예를 들어 100원의 추가 수입이 생겼을 때 10원을 소비하고 90원을 저축하면 한계소비성향은 0.1이다. 보통 저소득층의 한계소비성향이 높다. 소득이 낮을수록 저축할 여력이 없는 까닭이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2009년에 낸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소득 상위 10%의 한계소비성향은 0.3092인 반면, 하위 10%의 한계소비성향은 0.642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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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이후 저소득층 가계수지 흑자 없어

그렇다면 왜 지난 1년 사이 실제 소비 패턴과 한계소비성향은 어긋나게 나타났을까?

실마리는 통계에서 찾을 수 있다. ‘가계동향’ 자료를 통해 본 빈곤층의 여건은 매우 열악했다(표2 참조). 지난 1분기 가장 가난한 1분위 계층은 월평균 99만원을 벌고 141만원을 썼다. 달마다 42만원의 빚을 졌다는 뜻이다. 통계청이 계층별로 소득·지출 통계를 잡은 2005년 이후 1분위 계층이 가계수지 흑자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최빈곤층 바로 위의 2분위 계층도 빚은 면했지만 살림은 여전히 팍팍하다. 매달 평균 220만원을 벌고 215만원을 썼다. 여윳돈이라곤 달마다 5만원이 있을 뿐이다.

빠듯한 살림은 기록적으로 늘고 있는 가계 부채와 상관관계에 있다. 지난해 4분기 734조원이던 가계 부채는 올 1분기 739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 대비 가계 부채 비중은 78.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64.4%를 넘어서고 있다. 가계 부채의 증가 속도도 빠르다. 1분기 근로소득이 4.9% 상승했지만, 가계 부채는 7.1%나 늘었다. 벌이보다 빚이 더 빨리 늘어났다는 말이다.

가계부채의 내용을 뜯어보면, 소득 상위 40%가 전체 부채의 약 70%(517억조원)를 빌렸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은 아파트 등 부동산을 구입하기 위한 담보대출이다. 이지영 LIG증권 애널리스트는 “고소득층은 대부분 투자를 하기 위한 사업성 부채를 지는 경향이 높고, 가계수지에도 여유가 있어 채무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풀이했다.

문제는 소득 하위 0~60%가 지고 있는 부채 약 222조원이다. 전문가들도 이 빚에 주목하고 있다. 김영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보통 새로운 대출은 소비를 촉진하는 성격이 있고, 전체 대출액은 이자 부담 때문에 소비를 가로막는 효과가 있다. 현재 기록적인 가계 부채 때문에 이자 부담을 걱정한 일부 계층에서 소비를 주저할 가능성이 있다”고 풀이했다. 이지영 애널리스트는 “중산층 이하는 가계 부채의 원금·이자 상환 부담 때문에 소비에 나서기까지 당분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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