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만 무성하던 위안화 절상이 드디어 포문을 열었다. 그동안 중국이 인위적인 위안화 저평가를 통해 무역상의 불공정 우위를 누린다고 국제사회에서 비난이 컸다. 중상주의니 근린궁핍화정책(타국 경제의 희생으로 자국 경제의 성장을 꾀하는 정책)이니 비판이 있었지만, 중국은 특유의 ‘만만디’(행동이 굼뜨거나 일의 진척이 느림을 이르는 말) 태도로 일관했다. 중국의 완강한 태도에 눌려 포기 심리가 확산될 즈음, 중국은 전격적으로 ‘환율 유연성 제고’라는 명목으로 위안화 절상에 착수했다. 중국의 ‘의표 찌르기’ 전략이 다시 빛을 발한 셈이다.
시장의 뒷통수 치기
중국은 언제나 시장의 압력이나 국제사회의 외압에 맞서 ‘대국’의 자존심을 강조하며 시장의 뒤통수를 치는 행태에 익숙하다. 2005년 위안화 절상 때도 그랬다. 금리 인상이다 뭐다 해서 긴축 선회의 막을 올린 뒤 위안화 절상 기대를 잔뜩 부추겨놓고서는, 정작 시장에서 김이 빠지고 실망감이 퍼지고 나서야 위안화를 평가절상했던 것이다. 그 뒤에도 절상 속도를 집요하게 관리하면서 대폭적인 절상을 기대한 시장과 충돌해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위안화 절상을 용인한다는 뉘앙스를 풍긴 뒤에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잦은 시장 개입을 통해 이따금 위안·달러 환율을 끌어올리기도(위안화 절하) 하는 등 신중한 행보로 일관하고 있다. 위안화 절상을 마냥 환투기 기회로 활용하려는 세력에게 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렇듯 중국의 의연한 행보는 사뭇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환율 문제 하나를 건드리면서도 중국의 처신은 마치 거대한 전략을 염두에 둔 포석처럼 보인다. 위안화 절상을 단순한 ‘환율 이벤트’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래 환율은 국제정치학의 영역이다. 지금 시장에서는 위안화의 밸류에이션 문제, 즉 경제 펀더멘털에 비춰 위안화 환율의 저평가 문제가 주로 쟁점이 되고 있다. 나름대로 위안화 향방, 즉 절상 속도나 폭을 가늠하는 데는 중요한 쟁점이지만, 중국의 행보가 갖는 진정한 함의 혹은 신호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예를 들어 1998년의 경험을 떠올려보라. 당시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창인 가운데 중국의 위안화에 대해서도 고평가 논란이 커짐에 따라 위안화의 동반 평가절하 가능성이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중국은 고정환율을 유지하면서 위기 확산을 막았다. 위안화의 국제정치학이 주목받은 한 가지 예다.
위안화의 가치를 따졌을 때 지금 저평가돼 있다고 속단하기도 힘들다. 사실 중국은 ‘복수통화 바스켓’(교역량이 많은 몇몇 국가 통화의 시세를 종합적으로 감안해 산출하는 환율 결정 방식)에 기반해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관리변동환율제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복수통화 바스켓이 어떤 나라 통화를 기반으로 하는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일단 국제결제은행(BIS)이 공표하는 실질실효환율(명목환율과 함께 교역 상대국의 물가지수를 고려한 환율) 같은 것으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위안화는 2005년 이후 일관되게 꾸준히 가치가 올라갔다. 위안·달러 환율이 정체된 2008년 중반 이후를 보더라도, 일시적인 달러화 급등과 맞물려 위안화 실질실효환율이 대폭 절상되기도 하면서 꾸준히 절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지금도 위안화는 과거의 상승 추세를 답습하는 데 불과하다.
환율 이상의 환율 정책
이런 맥락에서 위안화 절상의 진정한 함의에 대해 더 큰 그림, 즉 중국의 거대한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쟁점은 세 가지다.
우선, 발전 모델 전환이다. 그동안 중국은 수출과 고정투자 주도의 성장 전략을 펴왔다. 후발 개도국으로서 이른바 ‘선진국 따라잡기’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수순이다. 하지만 이 모델은 부문·지역·계층 간 불균형이라는 내부의 암을 키워왔다. 최근 중국 내에서 확산되는 임금 인상 요구나 노사분규는 이 때문이다. 성장의 과실이 고루 분배되지 못하고 특정 계층이나 부문에 집중되면서 소외층의 불만이 커져온 것이다. 사회·정치 통합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중국에는 실로 첨예한 문제다. 이제 중국은 내수 부양, 특히 민간 소비 육성을 과제로 내걸고 있다. 위안화 절상이 한 가지 방편이다. 이를 통해 국민의 구매력을 증진시켜 소비를 부양하는 한편, 수출에 치중된 자원을 내수로 돌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산업 구조조정이다. 이번에 중국은 저임금·저비용에 의존한 대량 수출 전략이 경제위기 속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따라서 중국은 산업고도화를 통해 그동안 저부가가치 부문에 편중된 산업구조를 고부가가치 위주로 변모시키려는 계획을 내놓았다. 자동차·철강·조선 등 10대 중점사업을 선정하는 한편, 낙후된 설비나 산업을 도태시키는 내용의 고강도 산업구조조정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위안화 절상은 여기서도 의미가 있다. 경쟁력 없이 환율 효과에만 의존해온 부실 업체들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게다가 지방 단위의 분권화된 국정 운영 탓에 각종 중복 투자와 설비 과잉 등 누수 현상을 빚어온 경제정책에서 중앙 정부의 거시적 차원의 통제력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위안화 절상은 중국의 대외 위상을 제고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국제사회의 ‘중국 때리기’는 위안화 저평가, 이를 통한 불공정 무역 우위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번 금융위기의 경제적 배경인 글로벌 불균형, 즉 미국의 막대한 무역 적자 역시 이 탓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글로벌 불균형은 정작 미국의 과잉 소비 혹은 월가의 금융 과잉이 빚은 결과라는 지적도 많다. 이런 점에서 위안화 절상은 다분히 정치적 맥락을 지닌다. 글로벌 불균형 해소, 특히 자국의 무역 흑자 축소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나아가 중국은 구매력 확대와 구조조정을 토대로, 기존 ‘세계의 공장’에서 벗어나 ‘세계의 시장’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구미 선진국이 맡아온, 그러나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든 ‘최종 소비자’(consumer of last resort) 자리 말이다.
중국의 떠오르는 금융 헤게모니
주요 2개국(G2)으로서 중국의 부상이 주목을 끄는 것은 이 대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 중심의 헤게모니 구도(G1 혹은 G7)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 틈새를 비집고 중국이 솟고 있다. 물론 아직은 중국을 새로운 헤게모니로 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과거 일본이 누렸던 미국의 하위 파트너, 그것도 주요 20개국(G20)이라는 애매모호한 무대에 얼굴을 비춘 조연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최근 유럽의 경제위기 과정에서 부각된 ‘차이나 머니’의 위력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얼마전 중국이 외환보유액에서 유로화 비중을 줄이겠다는 루머가 나돌면서 유로화가 급락했다. 그러다 중국이 이를 부인하자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오히려 현재는 유럽의 국채를 인수할 유력 주체로 중국이 거론되기도 한다. 만약 중국이 유럽의 자금난을 메울 새로운 구세주, 즉 ‘최종 유동성 공급자’(liquidity provider of last resort)로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유럽의 중앙은행들은 갈수록 가치가 떨어지는 달러보다 위안화를 보유하려 들 것이고, 기업들도 무역에서 달러보다 위안화를 더 선호할 수 있다. 그동안 달러 헤게모니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유로달러’를 대체한 ‘유로위안’의 탄생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장보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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