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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은 창대하나 그 끝은 고약할지니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 10년 전 대기업들의 ‘2010 비전’, 10년간 어떤 것을 이루었나
등록 2010-01-21 11:06 수정 2020-05-03 04:25
조직의 비전은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나는 마틴 루서 킹의 비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루서 혼자만의 비전이 아니었다. 비전을 표명하기까지 그는 수천 명의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의견을 들었다. 그의 비전은 수백만 명의 희망과 꿈을 표현하고 있었다. 비전을 창조하는 과정은 비전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하다.
-켄 블랜차드, 중
새해 첫 출근일인 1월4일 오전 서울 계동 현대건설 사옥에서 열린 시무식을 겸한 ‘비전 2015’ 선포식에서 김중겸 사장이 발언하고 있다. 현대건설은 이날 2015년까지 연간 매출액 23조원, 수주액 54조원대의 글로벌 상위 20대 건설사로 성장하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연합

새해 첫 출근일인 1월4일 오전 서울 계동 현대건설 사옥에서 열린 시무식을 겸한 ‘비전 2015’ 선포식에서 김중겸 사장이 발언하고 있다. 현대건설은 이날 2015년까지 연간 매출액 23조원, 수주액 54조원대의 글로벌 상위 20대 건설사로 성장하겠다는 비전을 발표했다. 연합

기업은 조직의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에 대한 로망을 구성원한테 끊임없이 말한다. 오너 기업이 많은 우리나라의 경우 그러한 비전 제시는 오너의 몫일 때가 많다. 비전에는 창조·성과·혁신·효율·변화 등 좋은 말은 다 동원된다. 하지만 구성원과의 소통 없이 오너의 머릿속에서 나오거나 외부 컨설팅을 통해 뚝딱 만들어내는 경우도 흔하다. 이 경우, 기업이 제시한 비전이 외부엔 그럴듯하게 비치지만 언어유희에 그치는 일도 허다하다.

삼성, ‘존경받는 기업’ 비전은 어디에

새로운 밀레니엄이 다가온 10여 년 전, 기업들은 앞다퉈 5년·10년 뒤의 청사진을 그렸다. 매우 고상하고 진취적이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때의 비전이 잘 지켜졌는지, 유행가 가사처럼 ‘그땐 그랬지’로 흘러가버렸는지 되짚어보자.

삼성그룹은 2004년 ‘삼성 2010 비전’을 발표했다. 삼성의 비전 선포식은 다소 늦은 편이었는데, 2000년 초반 삼성이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삼성은 1999년 6월 숙원사업으로 추진한 자동차 사업을 5년 만에 접는다고 발표했다. 그 뒤 삼성자동차의 채권을 놓고 삼성과 채권단 사이에 지루한 법적 공방이 이어졌다. 이같은 혼란을 수습한 뒤, 삼성은 2004년 3월5일 신라호텔에서 이건희 당시 회장과 계열사 사장단,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010 비전을 선포했다. 2010년까지 매출액 270조원과 세전이익 30조원을 올리며, 브랜드 가치 700억달러에 세계 1등 제품 50개를 확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삼성은 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성장한다는 장기 비전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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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실적만을 떼어놓고 보면, 비전은 어느 정도 성취한 듯하다. 삼성 직원들의 노력과 협력업체들의 더욱 힘겨운 노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삼성의 주력기업인 삼성전자는 세계적 불황 속에서 세계 최대 전자기업으로 우뚝 올라섰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연매출 136조500억원에 영업이익 10조9200억원을 돌파한 것으로 추산된다. D램 반도체 분야 세계 1위, 디지털TV 세계 1위, 휴대전화 단말기 세계 2위 등 성과도 눈부시다. 삼성전자는 2008년 수출액이 59조7천억원으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의 11%를 차지하는 ‘대한민국 대표기업’으로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삼성은 ‘존경받는 기업’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2~3년마다 삼성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사건이 터졌다. 대부분 삼성가의 오너와 관련해서였다. 2000년 6월 법학교수 43명이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로 이건희 전 회장 등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삼성그룹 경영권 편법 승계 논란이 불거졌다. 2005년엔 ‘안기부 X파일’ 사건이 터졌다. 2007년 10월에는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이건희 회장 비자금을 폭로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엔 이건희 전 회장이 ‘나 홀로 사면’을 받으면서 세종시 참여와 사면을 맞바꿨다는 빅딜설이 불거지기도 했다.

2000년 초까지 자산 규모 1위이던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을 계기로 분리 수순을 밟았다. 현대는 정몽구 회장 쪽의 현대·기아자동차그룹과 정몽헌 회장 쪽의 기타 계열사,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의 현대중공업 등 소규모 그룹으로 재편됐다. 이 가운데 현대차그룹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다. 1998년 기아차를 인수해 ‘규모의 경제’를 이뤘기 때문이다. 2001년 1월2일 정몽구 회장은 서울 양재동 사옥에서 시무식을 열고 현대·기아차가 2010년 세계 5대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한다는 비전을 내놓았다. 당시만 해도 어설픈 꿈으로 치부됐다. 그때 현대·기아차는 세계 13위에 그쳤다.

비전을 선포하자마자 사라진 기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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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대·기아차는 금융위기 상황을 맞아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액셀러레이터를 밝으면서 세계 5위권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1~9월 세계시장의 신차 판매 대수에서 현대·기아차는 도요타, GM, 폴크스바겐, 르노닛산에 이어 5위로 뛰어올랐다. 현대·기아차가 미국 포드와 일본 혼다를 제친 것이다.

하지만 현대·기아차도 삼성과 마찬가지로 오너로 인해 기업 이미지가 한때 추락했다. 2006년 4월 정몽구 회장은 1300억원의 비자금 조성과 현대차 계열사에 4천억원대의 손실을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배임)로 구속됐다. 그동안 쌓아온 대내외 신인도가 떨어져 판매 부진으로 이어졌고, 상반기 신입사원 선발 일정을 늦추는 등 ‘후폭풍’을 겪었다.

SK그룹의 주력인 SK텔레콤은 2001년 5월 ‘비전 2010’을 선포했다. SK가 제안한 비전은 기존 사업의 경쟁력 유지와 새 사업의 성공적 목표 달성을 뼈대로 하고 있다. 시장에선 신규 사업을 해외 진출로 풀이했다. 해외 사업 진출은 내수시장 포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국내 제1의 이동통신 사업자로서 또 다른 시장에서 수익원을 찾으려 나선 것이다.

하지만 SK텔레콤은 여러 차례 해외 진출을 모색했으나 쓴맛을 봐야만 했다. SK텔레콤은 지난해 9월 차이나유니콤에 투자한 지분을 팔았다. 차이나유니콤이 SK텔레콤이 추진하던 CDMA(미국식) 방식 대신 GSM(유럽식) 방식에 주력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매각에 나선 것이다. 2008년엔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세운 통신회사를 매각했다. 2006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가입자 수 20만 명의 문턱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합작법인 S폰은 550만 명의 가입자를 보유하고도 베트남의 낮은 국민소득 수준으로 인해 적자 상태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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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을 선포하자마자 기업이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휴대전화를 만들던 LG정보통신이 그랬다. 2000년 새해 1월 LG정보통신은 2010년까지 매출 31조원대의 초일류 정보통신 전문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뉴밀레니엄 비전 선포식을 열었다. 하지만 그해 6월 LG정보통신은 LG전자에 흡수 통합됐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새 천년 들어 롤러코스트를 탔다. 2002년 9월 박삼구 금호 명예회장은 고 박정구 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의 4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박삼구 회장은 취임식에서 “계열사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짓고 기존 사업을 고부가가치 사업으로 전환시켜 그룹의 재무구조와 수익성을 강화해나가겠다”면서 “주주와 고객, 거래선, 채권자, 종업원 등 이해집단과 시장이 만족하는 기업 가치를 창출해 2010년까지 재계 5위에 올라서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금호, 재계 순위는 올랐으나 인수 합병 후유증

2000년 초만 해도 금호는 재계 순위 11위였다. 하지만 금호는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라이벌 기업인 한진을 10위로 밀어버리고 재계 9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무리한 인수·합병에 따른 후유증으로 현재 그룹이 휘청거리고 있는 상태다.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 역시 비전을 제시한다.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아왔다는 이명박 정부는 2008년 3월 ‘선진 일류국가’로 나가겠다는 국가 비전을 발표했다. 이명박 정부는 그 지향점을 ‘잘사는 국민, 따뜻한 사회, 강한 나라’의 세 축으로 결정했다. 경제를 살려 국민 모두가 번영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그늘과 차별을 없애겠다는 뜻이다. 이명박 정부가 끝날 무렵, 과연 이같은 비전이 제대로 지켜질지 아니면 ‘그땐 그랬지’로 흘러가버리게 될지 궁금해진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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