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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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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위기는 과거와 다르다니까”

역대 122차례 경기 침체기 조사한 IMF 연구팀
“금융위기가 촉발한 글로벌 위기는 훨씬 심각하고 회복 더뎌”
등록 2009-05-01 15:27 수정 2020-05-03 04:25

“몇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다. 결과가 예상보다 좋다.” 〈BBC방송〉은 지난 4월16일 리샤오차오 중국 국가통계국 대변인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리 대변인은 이날 “지난 1분기 중국 경제가 6.1% 성장했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 1분기 경제활동 동향을 발표했다. 성장률이 지난해 동기 대비 소폭 위축되긴 했지만, 전세계적 경기 침체 속에 3월에만 수출이 17%나 줄어들었음을 감안하면 ‘선방했다’고 할 만하다.

‘경제위기 속 대졸 구직자만 600만 명!’ 지난 4월12일 중국 간수성 란저우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대학 졸업을 앞둔 중국 젊은이들이 취업정보 게시판 앞을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채우고 있다. 사진 REUTERS/ CHINA DAILY

‘경제위기 속 대졸 구직자만 600만 명!’ 지난 4월12일 중국 간수성 란저우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대학 졸업을 앞둔 중국 젊은이들이 취업정보 게시판 앞을 발 디딜 틈조차 없이 채우고 있다. 사진 REUTERS/ CHINA DAILY

이미 2천만 농민공(도시로 이주한 농촌 출신 단순노동자)이 일자리를 잃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600만 대졸자가 취업시장에 뛰어든다. 자칫 경제위기가 정치위기로 변질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예상보다 좋은 ‘성적표’가 나왔으니, 경기가 바닥을 쳤다는 기대감이 커지는 건 당연해 보인다. 실제 지표만 놓고 보면 ‘긍정적인 변화’가 엿보인다. 1분기 동안 중국의 산업생산은 5.1%나 증가했다. 수출 감소세도 3월 들어 둔화하고 있으며, 내수시장도 역동적으로 살아나고 있다. 지난 3월 중국에서 판매된 자동차는 모두 77만2천여 대로, 전년 동기 대비 22.4%나 늘었단다. 그럼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성적표’가 조작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다.

중국 지표 개선에 의심의 눈초리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 효율이 높은 나라가 된 것 같다. 아니면 중국 통계학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이던가.” 미 의 플로이드 노리스 금융전문기자는 4월16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중국의 에너지 효율’이란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노리스 기자의 지적처럼, 지난 몇 년 동안 중국 당국이 밝힌 ‘공식’ 경제성장률은 중국의 전력 소비량 증가율보다 약간 낮은 추세로 유지돼왔다. 기록을 더듬어보자.

전력 사용량이 전년 대비 9.4% 증가한 지난 2002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8%를 기록했다. 이듬해엔 전력 사용량이 14.6% 치솟으면서 경제성장률도 10.3%를 기록했다. 이후에도 이런 추세는 꾸준히 유지됐다. 2007년과 2008년엔 전력 소비량이 각각 12.4%와 16% 늘어나면서, 경제성장률도 11.7%와 10.6%를 기록하며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하지만 올 들어 전력 소비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노리스 기자는 “아직 3월분 자료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지난 1월과 2월 중국의 전력 소비량은 전년 동기 대비 9.2%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같은 기간 경제성장률이 전년 동기 대비 0.7% 포인트밖에 줄지 않았다는 발표가 나왔으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게다.

“경기 후퇴 속도가 둔화하기 시작하면서, 일부에선 경기가 회복기로 접어든 것 아니냐는 성급한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세계경제는 여전히 깊은 침체기로 빠져들고 있다. 올해 전세계 교역량은 전년 대비 12%가량 줄어들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일찌감치 경고했던 누리엘 루비니 미 뉴욕대 교수는 4월22일 자신이 발행하는 정보지 〈RGE모니터〉에서 세계경제가 여전히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음을 새삼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회복 속도가 빠른 ‘V자형’ 경기 침체가 될 것이란 지적이 대세를 이뤘지만, 이젠 침체기가 장기간 이어지는 ‘U자형’ 경기 침체로 들어서고 있음이 점차 분명해지는 모양새”라고 전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비슷한 견해다. 스트로스칸 총재는 4월23일 미 워싱턴 IMF 본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빨간불도 켜져 있고 일부에선 파란불도 깜빡이는 등 혼란스런 상황”이라면서도 “적어도 위기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IMF가 전날 내놓은 ‘2009 세계경제 전망보고서’ 최신판을 보면, 위기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란 점은 명확해 보인다.

루비니 “여전히 최악” 칸 “아직 멀었다”

“세계경제가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위기 상황을 겪고 있다는 점은 이제 확실해졌다. 이번 위기는 많은 측면에서 이전의 위기와는 다르고, 예상치 못한 일들도 많이 뒤섞여 있다. 무엇보다 세계경제의 심장부에서 촉발된 금융위기가 지구촌 차원의 경기 침체와 어우러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도드러진 특징이다.”

보고서의 ‘경기 회복 전망’ 부분을 집필한 앨래스데어 스콧 IMF 선임연구원은 4월22일 보고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IMF가 홈페이지에 올린 동영상을 보면, 스콧 연구원은 “보고서 작성에 앞서 세 가지 주요한 질문을 던져봤다”고 말했다. “첫째,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제위기와 그 회복 방안은 다른 부문에서 촉발된 경제위기와 그 회복 방안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둘째, 지구촌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경기 침체가 벌어지는 것은 또 어떻게 다른가? 셋째, 경기 침체와 회복기에 정책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의문을 풀기 위해 IMF 연구팀은 1960년부터 최근까지 전세계 21개 선진 경제국들의 경기순환 사이클을 분석했단다. 분석 결과, 현 경제위기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지구촌은 모두 122차례 경기 침체 국면을 지나온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15차례의 경기 침체가 금융위기에서 비롯됐다. 또 지구촌 차원의 동시다발적 경기 침체기는 모두 세 차례였다. 스콧 연구원은 “경기 침체 기간은 대체로 짧았고, 일단 바닥을 치면 빠른 속도로 강력하게 경기가 회복되는 게 상례였다”며 “경기 침체기는 평균 1년 정도 유지된 반면, 경기 팽창기는 5년 이상 지속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특히 1980년대 이후 선진 경제국에선 경기가 침체 국면으로 접어드는 사례가 줄어드는 대신, 경기 팽창기는 더욱 길어지는 추세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다른 부문에서 시작된 위기에 비해 금융 부문이 촉발한 경기 침체는 그 정도가 훨씬 심각하고 기간도 더욱 긴 것으로 나타났다. 가계가 줄어든 소득에 맞춰 지출을 극도로 줄이기 때문에 ‘돌파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게다. 지구촌 차원의 동시다발적인 경기 침체 역시 개별 국가 또는 지역 차원의 경기 침체에 비해 회복에 시간이 더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1960년 이후 21개 선진 경제국가 가운데 10개 이상의 나라가 동시에 경기 침체기에 접어든 것은 1975년과 1980년, 그리고 1992년 등 모두 세 차례”라며 “세 차례 모두 통상의 경기 침체기에 비해 회복기에 다가서는 데 1.5배가량 시간이 많이 소요됐고, 회복 속도도 매우 더뎠다”고 지적했다.

특히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이 경기 침체기에 들어가 있을 때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1975년과 1980년 침체기 때를 보면, 미국이 수입을 급격히 줄이면서 전세계 교역량이 급감했다. 스콧 연구원은 “결국 금융위기가 촉발한 경기 침체가 지구촌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현 위기 국면은 정도가 더욱 심할 것이고, 기간도 오래 지속될 것”이라며 “과거의 사례를 놓고 볼 때 회복기로 접어들더라도 경제가 살아나는 강도는 매우 미약하고 속도도 더딜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직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라는 얘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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