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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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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의 굴욕

외국인 자금 이탈 속도 비해 외환보유액 미흡… 기축통화 확보 경쟁으로 달러는 초강세
등록 2009-03-13 18:40 수정 2020-05-03 04:25

“대외지급 능력 얘기가 나오면 소규모 개방경제(small open economy)의 비애를 자꾸 느낀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3월5일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세계 금융위기라는 거센 폭풍 속에 조각배처럼 흔들리는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경제팀 수장으로서 솔직한 심경 고백이었다.
금융의 세계화가 진전돼 자본 이동의 규모가 커지고 속도도 빨라지면서 금융위기는 훨씬 잦아졌다. 무역의존도가 높고, 금융의 해외 의존도가 커서 세계 경제의 부침에 영향을 크게 받는 나라들이 국제 투기자본이란 하이에나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원-달러 환율이 폭등해 1570.30원으로 거래를 마친 3월2일 서울 외환은행 딜링룸에서 한 딜러가 피곤한 듯 눈을 비비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원-달러 환율이 폭등해 1570.30원으로 거래를 마친 3월2일 서울 외환은행 딜링룸에서 한 딜러가 피곤한 듯 눈을 비비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진수 기자

위험에 미리 대처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경상수지와 재정수지를 건전하게 운용하는 것이 하나다. 급격한 자본유출에 대비해 충분한 외환보유액을 쌓아두는 방법도 있다. 유로처럼 달러에 견줄 만한 국제통화의 그늘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통화가치 급변에 따른 경제 충격을 줄이는 방법이다.

지난 1997년 말 외환 부족으로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해 호된 조건으로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던 한국 경제는 이번 금융위기에서는 과연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두려워한다. 정부는 안심하라고 말하지만, 환율은 쉼없이 치솟고 있다.

윤 장관은 이날 간담회에서 “외환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는 지금 계획한 대로 착실하게 대처해나가면 국제시장에서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반열에 낄 수 있다”며 “자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울 외환시장에서는 장 마감 1시간을 남겨두고 원-달러 환율이 20원 넘게 솟구쳤다. 한국 경제에 대한 외신의 의심을 풀어보려는 윤 장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환율은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버렸다.

왜 ‘달러, 달러’인가?

세계 금융시장에서 달러가치는 2002년 2월부터 주요 통화에 견줘 약세 흐름을 이어왔다. 당시 1유로는 0.86달러에 살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 7월 하순에는 1유로를 사는 데 1.59달러를 내야 했다. 그사이 달러가치가 반토막난 것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 재임 기간 미국의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미국 달러에 대한 신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달러가치가 지난해 7월부터 대반전을 시작했다. 달러는 지난해 11월 유로당 1.24달러로 가치가 올랐다. 2009년 1월에 급격한 약세를 다시 한번 경험했지만 2월부터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 3월 초엔 유로당 1.25달러 안팎으로 지난해의 최고치에 근접해 있다.

세계 경제를 수렁에 빠뜨린 금융위기의 진앙지요,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는 나라가 미국인데, 달러가치는 왜 그렇게 오르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금융불안으로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투자자산과 대출을 회수하면서 달러가 시장에서 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10월13일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확정된 폴 크루그먼이 기자회견에서 ‘당신은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물음에 “대부분 현금으로 뒷마당에 파묻어두고 있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것은 이런 경제 현상을 비유한 말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세계 무역거래의 46%가 달러(유로 20%, 엔 11%, 파운드 7%, 기타 17%)로 결제된다. 글로벌 은행의 대출 잔액 가운데 64.4%, 전세계 외환보유고의 64.6%가 달러로 구성돼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수석연구원은 “금융불안으로 결제자금, 금융거래 자금, 대외준비 자산 마련을 위해 기축통화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달러가치가 상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위기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한때 일본 엔화가 달러보다 더 강세를 보인 적이 있다. 엔화는 지난해 8월 중순 달러당 110엔대에서 2009년 1월 하순 90엔 밑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저금리 엔화를 빌려 세계 각국에 투자했던 자금이 금융위기를 맞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빚어진 일이다. 하지만 일본의 수출이 급감(1월 -47%)하고, 일본 경제의 성장률이 급락하면서 엔화는 강세통화의 길에서 벗어났다. 3월 초 엔화는 달러당 99엔대로 달러당 100엔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3월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외신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3월 위기설 등을 제기하며 한국을 불안하게 보는 일부 해외 언론의 우려에 대해 직접 해명하고 나섰다. 사진 연합 이상학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3월5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외신 기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3월 위기설 등을 제기하며 한국을 불안하게 보는 일부 해외 언론의 우려에 대해 직접 해명하고 나섰다. 사진 연합 이상학

한국인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글로벌 달러 강세를 받아들인다 해도 ‘유독 왜 원화가치만 큰 폭으로 떨어지느냐’ 하는 점이다. 지난해 세계 금융위기가 퍼지기 시작한 9월 이후 올 3월5일까지 타이 밧화는 5.79% 떨어지는 데 그쳤다. 인도네시아 루피아는 비교적 큰 폭인 31.4% 떨어졌다. 그런데 원화가치는 1081.8원에서 1559.5원으로 44.2%나 떨어졌다.

주기적으로 퍼지는 위기설이 원-달러 환율을 끌어올리는 것인가, 아니면 환율 상승이 위기설을 부채질하는 것인가? 두 요인이 상승작용을 하기는 하겠지만, 근본 원인은 한국 경제의 과도한 대외의존도와 이를 감당할 만한 준비 부족이라고 봐야 한다. 외국인 주식투자 규모와 은행의 외화차입 규모는 큰 반면, 빠른 속도로 이뤄지는 디레버리징(외국인 자금 회수)에 여유 있게 대처할 만큼 충분한 외환보유액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다.

지난해 1월부터 9월 말까지 외국인 투자가들은 국내에 보유한 주식을 팔아 모두 359억달러를 회수해갔다. 경상수지 적자도 139억달러에 이르렀다. 같은 기간 외국인들이 국내 채권을 149억달러어치 순매수했지만, 그것으로는 달러 수급을 맞추기 어려웠다. 예금은행들은 226억달러를 단기 차입해 달러 수급의 갭을 메웠다. 탈이 날 징조였다.

한국 경제, 타이만도 못한가?

지난해 10월 세계 금융위기가 본격화한 뒤, 원-달러 환율을 좌우하기 시작한 것은 이제 은행(국내·외국 은행 포함)들의 차입 여건이었다. 엄청나게 늘어난 차입금이 급격히 회수되면서, 환율은 로켓처럼 솟구쳤다.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지난해 10월에만 201억달러의 은행 차입금을 회수했고, 11월에 106억달러, 12월에 140억달러, 올 1월에도 75억달러를 빼갔다. 외국인 주식·채권 투자를 통한 달러 유·출입이나 경상수지는 은행들의 차입금 유·출입에 견주면 규모가 작아, 달러 수급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는 변수가 돼버렸다.

외환당국은 “외환보유액은 충분하다”고 쉼없이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막기에 충분하다”는 얘기일 뿐이었다. 환율까지 안정시킬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면, 외환시장의 수요자나 투기꾼을 눌러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10월 말 한-미 통화 스와프로 300억달러의 여유자금을 확보하면서 잠시 급락했던 환율은, 미국 금융회사들의 부실이 계속 커지고 있음이 확인되고 동유럽 국가들의 부도 위험이 커지는 등 글로벌 금융불안이 2월 들어 다시 확산되자 지난해 11월의 최고치를 순식간에 뛰어넘었다. 올해 은행의 외화 차입금 만기가 2~3월에 가장 많다는 점은 불안감을 더욱 키웠다.

글로벌 금융회사들의 디레버리징은 아직 끝날 조짐이 없다. 글로벌 달러 강세 추이가 쉽게 꺾이기 어려운 이유다. 그런 가운데 세계 금융시장 흐름에는 새로운 특징이 엿보인다. 지금까지의 시장 흐름을 ‘달러 강세’로 요약할 수 있다면, 앞으로 흐름은 ‘신흥시장 약세’라고 볼 수 있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신흥시장 국가들에 대한 세계 금융시장의 부도 위험 평가라고 할 수 있는 신용부도 스와프(CDS) 프리미엄이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CDS 프리미엄은 해당 채권에 대한 지급보증 수수료를 연 이자율로 나타낸 것이다. 수치가 클수록 부도 위험이 큰 것이다.

우리나라 5년 만기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의 CDS 프리미엄은 지난해 상반기 1%포인트(100bp) 안팎에 머물렀으나, 9월부터 급등하기 시작해 10월29일 6.99%포인트까지 뛰었다. 이후 한-미 통화 스와프 개설로 급락해 11월4일 2.52%포인트까지 내렸다. 큰 폭으로 등락하던 CDS 프리미엄은 올 2월 들어 2.6%포인트대에서 상승을 시작해 3월4일 4.65%포인트까지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멕시코·브라질 등 우리나라와 CDS 프리미엄 수준이 비슷한 나라들도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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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당국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 상승을 적절하게 제어하지 않으면 불안 심리가 퍼지면서 환율을 더욱 급등시킨다. 그렇다고 해서 외환시장에 강하게 개입하면 외환보유액을 줄이게 되고, 그것이 새로운 불안 요인이 된다. 외환당국자는 “스무딩 오퍼레이션이라는 정책기조를 변함없이 유지한다”고 강조했다. 일정한 환율 수준을 정해놓고 무조건 방어한다기보다는, 국제 금융시장 상황을 봐가며 변동 속도를 조절하는 정도의 개입만 하겠다는 것이다. 외환시장 참가자들도 달리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한-미 통화 스와프에 견줄 만한 강한 해열제가 없지는 않다. 미국이 통화 스와프 규모를 늘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윤증현 장관은 “미국이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유럽중앙은행과 통화 스와프를 여는 것도 큰 도움이 되지만, 유럽중앙은행도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다.

신흥시장을 보는 불안한 눈

일부 동유럽 국가들의 디폴트 위험은 여전하다. 몇몇 국가는 외채 규모와 외환보유액이 사실상 국가 부도를 맞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수준이다. 동유럽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신흥국들도 영향을 받게 된다. 한-미 통화 스와프에 아직 130억달러가량 여유가 있고, 일본과의 통화 스와프로 평시에 200억달러까지 동원할 수 있다는 점, 위기 때는 일본·중국 등과 통화 스와프를 열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국가 부도 위험은 크진 않다. 그러나 외환시장의 수요까지 맞춰서 달러를 공급할 수 없다면, 환율 안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이에나들의 사냥감으로 찍히지 않게 외환보유액을 아껴쓰고 외화 유동성을 해치지 않는 정책들을 펴면서 세계 금융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잘 버텨야 할 형편이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 재정금융팀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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