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위기설’이 난무하고 있다. 먼저 국제 금융시장 상황을 보면, 글로벌 금융위기의 2차 충격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씨티·AIG 등 금융기관들의 부실 심화로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도 사실상 국유화 조처가 취해졌고, 최근에는 동유럽 국가들의 연쇄부도 위기로 서유럽까지 몸살을 앓고 있다. 그 결과 지난 6개월간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 대출을 받았거나 이를 협상 중인 나라가 이미 13개국에 이르고, 이런 나라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무사할 리는 없다. 외환 당국의 개입으로 원-달러 환율 1600원 선 돌파를 간신히 저지했고, 코스피 지수는 세 자릿수로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연일 발표되는 경제지표의 홍수 속에서도 조속한 경기회복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1월 중 광공업 생산 증가율은 전년 동월 대비 -25.6%로 사상 최악을 기록했고, 2월 무역수지는 33억달러 흑자를 냈지만 이는 수출 감소(-17.1%)보다 수입 감소(-30.9%)가 더 컸던 탓으로 이 역시 결코 긍정적인 뉴스는 아니다. IMF 외환위기 당시 급격한 수출 확대에 따른 내수 회복이 국민경제 전체의 V자 회복으로 연결됐던 상황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 상황이 위기 아니면 뭘 위기라고 하나경제학 문헌 어디를 찾아봐도 ‘위기’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현 상황이 위기가 아니라면 도대체 뭘 위기라고 하겠는가. 그럼에도 최근 ‘위기다’ ‘아니다’ 말들이 많은 것은 위기설 자체가 순수 경제 영역을 넘어 심리적·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머릿속에 있는 위기 개념은 곧 1997년 말의 외환위기와 등치되므로, 위기를 부정하는 주장은 ‘아직 그 수준까지 가지는 않았다’ 또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심리적 저항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지경이 되도록 정부는 뭐했냐’는 정치적 비판에 대한 방어막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심리적 저항과 정치적 항변에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해에 환율을 방어하느라 좀 축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외환보유액이 많은 나라다(2009년 2월 말 기준 2015억달러). 그리고 1년 내에 만기가 도래하는 유동외채가 1월 말 현재 1939억달러로 외환보유액에 거의 근접했다고는 하나, 외환보유액 대비 유동외채 비율이 100% 이하인 ‘안전한’ 나라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또 우리나라 주식시장에서 외국인 비중이 높고, 수출입액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측정한 해외 의존도가 높기는 하지만, 이 역시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닌데 굳이 지금 새삼스럽게 들춰내는 게 마땅찮기도 하다. 한마디로 영국의 가 우리나라를 신흥시장국 중 위기 발생 가능성이 세 번째로 높은 나라로 평가한 것이 무척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럼 3개월 주기로 등장하는 이 위기설은 괴담에 불과한 것인가? 냉정하게 살펴보자. 금융위기는 통화위기(또는 외환위기·currency crisis)와 은행위기(banking crisis)를 포괄하는 개념인데, 그 발생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은 크게 3세대로 구분할 수 있다. 1세대 모형은 과다한 재정적자, 높은 물가상승률, 경상수지 적자, 고정환율제 등 기초경제 여건(이른바 펀더멘털)의 불균형을 야기하는 지속 불가능한 거시경제 정책으로 인해 위기가 발생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주로 중남미 국가들의 통화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됐다. 2세대 모형은 1990년대 초 유럽통화제도(ERM)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된 이론으로, 펀더멘털이 양호하더라도 ‘자기실현적 예상’(self-fulfilling prophecy)에 의해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3세대 모형은 1980년대 금융자유화 이후에 발생한 통화위기는 대부분 은행위기와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쌍둥이 위기’(twin crisis) 이론이라고도 불리는데, 특히 평가절하가 금융 부문의 대차대조표에 미치는 효과를 강조한다. 개도국 은행과 기업들의 해외 차입은 주로 달러로 이루어지는 반면 수익은 자국 통화로 발생하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통화 불일치(currency mismatch) 문제를 안고 있고, 따라서 평가절하 때 신용위험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기로 차입해 장기로 대출하는 은행의 영업 행태상 만기 불일치(maturity mismatch)로 인한 유동성 위험에 노출되어 결국 통화위기와 은행위기가 함께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경상수지·재정수지 등의 펀더멘털이 건전하기 때문에 위기 발생 가능성, 특히 그것이 3월에 현실화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주장은 1세대 모형에 근거한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 외환·주식 시장의 불안정성은 11년 전 외환위기의 상흔(trauma)에 기인하는 국내외 투자자들의 과민반응 탓이라거나, 심지어 외신의 악의적(?) 보도에 따른 쏠림현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2세대 모형의 아류라고 할 수 있다. 이걸로 심리적 위안을 얻을 수 있고, 정치적 면죄부를 얻을 수 있나?
반면 3세대 모형에 비추어보면, 한국은 지난해 10월 이후 전형적인 쌍둥이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위기의 원인이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최근 동구권의 위기 등과 같은 해외발 충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의 대차대조표에 내재한 부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것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행에 따라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예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올 1분기 성장률이 -5~-8%로 IMF 외환위기 당시와 유사한 수준으로까지 추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금융기관과 기업의 재무 건전성에 대한 불신이 가중되고, 그것이 외환시장과 국내 금융시장에 반영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3개월 주기 위기설 실체는 부실과 불신2005년 이후 나타난 국내 금융 부문의 외화 유동성 관리 실패(단기외채 급증)와 원화 유동성 관리 실패(가계대출 및 건설사 프로젝트파이낸싱 대출 급증) 문제는 이제 상식에 속한다. 그 결과 가계 부문의 과다부채 문제, 그리고 자영업자와 중소·중견 기업의 부실 문제는 이미 현실화됐고, 드디어는 대기업(집단)의 부실 문제까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그 바탕 위에 해외발 충격이 올 때마다 환율과 주가가 출렁이는 쌍둥이 위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3개월 주기 위기설의 실체다.
외환시장을 둘러싼 거시경제 지표만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설명할 수 없고, 따라서 잘못된 진단에 근거한 대책은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킬 뿐이다. 어차피 해외발 충격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현 위기의 고통을 그나마 최소화하려면, 눈을 국내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미시적·구조적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에 내재한 불확실성을 걷어내는 구조조정 작업, 이른바 옥석 가리기를 조속히 진행하지 않으면 고통은 더욱 심해지고 장기화될 것이다.
그럼에도 국회는 이른바 MB 쟁점법안 처리로 허송세월하고 있고, 정부는 관치금융과 유사 공적자금을 남발하면서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있다. 그래서 현 위기는 경제위기이자 정치위기인 것이다. 11년 전 외환위기의 교훈을 기억한다면 어느 나라보다도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건만, 오히려 최악의 상황을 자초하는 모습, 이것이 2009년 3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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