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미국 ‘보아’ 식중독에 한국투자공사 구토

메릴린치 삼킨 BOA 주가 폭락… BOA 주식으로 교환받은 투자공사 70%대 손실
등록 2009-02-06 14:18 수정 2020-05-03 04:25
한국투자공사의 메릴린치 투자 손실은 국회에서도 쟁점이 됐다. 지난해 10월21일 기획재정위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한국투자공사 구안옹 운용본부장이 답변하고 있다. 연합

한국투자공사의 메릴린치 투자 손실은 국회에서도 쟁점이 됐다. 지난해 10월21일 기획재정위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한국투자공사 구안옹 운용본부장이 답변하고 있다. 연합

메릴린치와의 부적절한 만남으로 입방아에 올랐던 한국투자공사(KIC·사장 진영욱)가 이번엔 강제로 스와핑당한 파트너 ‘보아’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한국의 국부펀드를 자임하는 한국투자공사는 지난해 1월 외환보유고 20억달러를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에 투자했다. 지금은 메릴린치를 인수한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주식으로 바꿔 보유하고 있는데 1월29일(미국 시각) 현재 BOA 주가 기준으로 무려 73%의 투자 손실을 입고 있다(표 참조). 투자 원금이 거의 4분의 1 토막 난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메릴린치에 5천만달러를 투자했던 하나은행도 손실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한국투자공사와 메릴린치의 인연은 1년도 안 돼 두 차례 파경 위기를 맞았다. 한국투자공사는 지난해 1월15일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고전하고 있던 메릴린치의 우선주를 사들였다. 연 9%의 확정 배당을 받으면서 2년9개월 뒤에 보통주로 전환되는 (의무 전환) 우선주였다. 나름대로 안전판을 마련하면서 미국 금융 시장이 진정되면 시세 차익까지 노리겠다는 전략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투자 당시 주당 50달러를 상회하던 메릴린치 주가는 6개월 만에 26달러로 주저앉았다. 한국투자공사가 보유하고 있는 메릴린치 우선주를 보통주로 바꿀 때 기준이 되는 가격은 52달러 이상이었다. 아직 전환 시한은 많이 남았지만 당시 시세와 비교하면 정확히 반토막이 나는 상황이었다. 초조해진 한국투자공사는 지난해 7월 말 메릴린치 쪽과 재협상을 통해 우선주를 조기에 전환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보통주로 전환하는 기준 가격을 당시 메릴린치 주식 시세와 비슷한 27달러 수준으로 낮춘 것이다. 단가를 낮춘 만큼 전환받는 주식 수는 90% 정도 늘어났다. 대신에 연 9% 확정 배당금을 포기했다. 메릴린치로서는 채무 성격인 우선주를 없애고 자본금을 확충하는 효과를 얻었다. 당시 투자공사는 전환 가격을 대폭 낮춤으로써 우선주를 계속 보유하는 것보다 투자 조건이 훨씬 유리해졌다고 설명했다.

확정배당 못 받고 시세가 수익 좌우

하지만 부실이 누적된 메릴린치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지난해 9월 BOA에 인수되고 만다. 그 뒤 메릴린치 주가가 10달러 밑으로 떨어지면서 한국투자공사의 설명과는 달리 보통주 전환이 9% 배당금을 받는 우선주 보유보다 더 불리한 상황으로 몰렸다. 또 주당 40달러에서 움직이던 BOA마저 독극물이 된 메릴린치를 삼킨 뒤로 시름시름 앓으면서 현재 주가는 불과 7달러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메릴린치 주식은 새해 들어 1주당 BOA 0.8595주의 비율로 교환됐다. 이제까지 메릴린치에서 받은 세 차례 누적 배당금을 감안하더라도 투자공사는 1년 만에 14억달러가 넘는 평가손실을 입고 있다. 우선주 형태로 유지했을 경우에 비해서도 20%대 추가 손실을 보고 있다.

한국투자공사의 BOA 투자 평가손익

한국투자공사의 BOA 투자 평가손익

이런 최악의 상황에 대해 한국투자공사 관계자는 “메릴린치에 지분을 투자한 것은 월가에 대한 영향력 행사와 향후 투자 기회 확보라는 전략적 장기 투자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또 보통주 전환 논란과 관련해서는 “메릴린치의 신용등급 하향을 막기 위해 보통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 오바마 정부의 은행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으로 장기적인 주가 전망은 밝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선 미국 금융주의 반등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부실이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상업은행발 금융위기 재현 가능성마저 거론되고 있다. 최근 발표된 미국 3대 상업은행의 4분기 순손실은 938억달러에 달했으며, 특히 BOA는 순이익을 낼 것이라는 시장의 예상을 깨고 18억달러 손실을 기록하며 17년 만에 첫 분기 적자를 기록했다. 150억달러로 추정되는 메릴린치의 막대한 분기 손실은 여기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키움증권 서영수 선임 연구원은 “BOA는 주택담보 인정비율(LTV)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어서 자산 부실화 위험이 크다”고 지적했다. 한화증권 정문석 이코노미스트는 “오바마는 부시와 달리 모기지 대출자 보호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에 금융기관은 자산 상각이 불가피해 건전성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새 정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경계했다.

외환보유고 위험자산 투자에 비판론

이참에 한국투자공사의 기본 성격과 자금 운용 방식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한국투자공사는 2005년 당시 외환보유액의 효율적 운용과 동북아 금융허브 구축의 일환으로 설립됐다. 하지만 설립 법안의 국회 논의 과정에서 위험관리 대책과 자금 운용의 투명성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의 외환 보유액을 위탁받아 운용하는 만큼 안정성을 우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현재 250억달러에 이르는 한국투자공사의 운용 자금은 전액이 해외 주식과 채권에 투자돼 있다. 구체적인 포트폴리오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은 위험자산 투자를 금지하는 조건으로 자금을 위탁했다. 특별한 제약 없이 자금을 맡긴 기획재정부는 한국투자공사로부터 일일보고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통화 스와프로 간신히 외화 유동성 위기를 모면한 지난해 10월 같은 긴박한 상황이 재현될 경우 대외지급 준비자산인 한국투자공사의 운용 자금을 신속히 회수할 수 있는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김효석 민주당 의원실 관계자는 “자원 부국이 운용하는 국부펀드와 한국투자공사는 처지가 다르므로 주식투자를 전면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연기금이 들어올 리 만무하고 민간 자금도 끌어들이지 못하는 한국투자공사가 과연 존재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투자의 기술이 다르다
버핏은 ‘영구’를 좋아해

워런 버핏.

워런 버핏.

살아 있는 투자의 전설 워런 버핏도 지난해 미국 금융주에 투자했다. 투자 손실이 클 것으로 관측되면서 “천하의 버핏도 세계적 금융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구나”라는 탄식이 나왔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먼저 투자 대상은 리먼브러더스도 메릴린치도 아닌 투자은행 대장주인 골드만삭스였다. 투자 시점은 리먼이 파산하고 메릴린치가 인수된 뒤에 미국의 구제금융이 속도를 내던 9월23일이었다. 한국의 투자공사처럼 우선주를 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버핏은 ‘보아’가 아닌 ‘영구’를 좋아한다. 골드만삭스 영구 우선주에 50억달러를 투자했다. 말 그대로 배당금만 받으면서 영원히 우선주 형태로 보유할 수 있다. 한국투자공사의 메릴린치 우선주처럼 일정 기한 안에 보통주로 전환해야 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물론 버핏이 원하면 보통주로 바꿀 수 있다. 5년 안에 주당 115달러로 골드만삭스 주식을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계약 당시 골드만삭스 주가는 125달러였다. 1월29일 현재 골드만삭스의 종가는 82.72달러다. 그때보다 30% 정도 하락했지만 메릴린치나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비하면 견조한 흐름이다. 이마저도 버핏이 보통주로 바꾸지 않으면 실제 손실은 발생하지 않는다. 확정 배당률은 10%다. 버핏은 그 뒤 제너럴일렉트릭(GE)에도 30억달러를 투자했다. 역시 영구 우선주였으며 10% 배당을 받는다.
아무래도 버핏의 라이벌은 현재의 위기를 시장근본주의의 위기로 규정하면서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을 비웃는 또 다른 투자의 귀재(혹은 투기꾼) 조지 소로스가 될 것 같다. 수년 뒤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지 궁금하다.


한광덕 기자 kdhan@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