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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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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나누기’ 노동계의 고심

해고 칼바람 헤쳐가려는 금속노조의 공생협약 새해 최대 화두로
등록 2009-01-01 11:57 수정 2020-05-03 04:25

‘일자리 나누기’는 2009년 초 한국 사회의 중대 화두가 됐다. 노동계를 보자.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최근 일자리 나누기를 정부와 대기업에 제안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금속노조는 완성차부터 자동차부품 업계까지 15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국내 최대의 단일 노조다. 기업 쪽에서도 일자리 나누기를 이야기한다. 동부제철은 2009년 간부사원과 임원 200여 명의 연봉 30%를 자진 반납하기로 했다면서, 인위적인 구조조정 대신 임금을 줄이는 일자리 나누기 방식이라고 주장했다. 삼성은 “인위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했고, 현대는 “자원을 손실하는 구조조정은 이후 발전 잠재력을 제거하는 것”이라며 “미국식 구조조정은 하지 않는다”고 천명하기도 했다. 가만 들여다보면 사용하는 용어는 같은데, ‘누가 희생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확연히 다르다.

금속노조의 ‘일자리 나누기’ 제안은 1990년대 초반 위기를 극복한 폴크스바겐의 사례 등을 참조한 것이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생산라인 모습.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금속노조의 ‘일자리 나누기’ 제안은 1990년대 초반 위기를 극복한 폴크스바겐의 사례 등을 참조한 것이다.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의 생산라인 모습.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고통 분담 통해 정리해고 막아내기

금속노조의 경우 최근 위원장 특별담화 형태로 ‘공생협약’을 제안하는 안건을 논의 중이라는 게 노동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노사가 생산 감축에 따른 고용불안 해소를 위해 노동시간상한제에 합의해 일자리를 나누고, 비정규직을 먼저 희생시키는 등의 인위적 구조조정을 피하자는 게 뼈대다. 서민과 중소 영세기업을 위한 기금을 함께 마련하자는 내용도 포함됐다. 정부에 대해서는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 손실을 보전하고, 서민들의 실질소득을 보장하기 위한 정책 수단을 마련하라고 요구할 계획이다. 한 노동문제 전문가는 “금속노조 사업장 중 특히 현대차는 산업계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면서 “금속노조 내부에서는 현대기·아차를 핵심적인 협약 대상으로 삼은 뒤 다른 사업장으로 확산시키자는 의견이 많다”고 설명했다.

금속노조의 제안에는 노·사·정 모두의 고통 분담이라는 철학이 깔려 있다. 그러나 노동문제 전문가들은 금속노조의 고민을 ‘임금 많이 받던 정규직들이 양보할 테니, 비정규직은 자르지 말아달라’는 식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참에 정규시간 시급의 1.5배를 받는 잔업·특근 등 과중한 추가 노동을 통해 임금 수준을 보장받는 국내 제조업의 관행을 깨자는 뜻이 담겼다는 것이다.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의 이상호 박사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금속노조의 자기반성을 담되, 경제위기 극복 방식의 새 판을 짜고 한국 경제의 구조개혁에 나서자는 의미”라고 말했다.

금속노조 쪽은 최근 ‘일자리 나누기’ 제안이 검토된다는 일부 언론 보도가 쏟아진 이후 말을 아끼고 있다. 아직 내부 논의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금속노조 쪽은 정규직이 임금을 줄이는 대신 비정규직 고용을 보장하라는 내용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전부라는 식으로 단순화돼 전달되는 게 부담스럽다는 분위기다. 금속노조의 조건준 정책국장은 “노·사와 노·정의 대화를 통해 노동자와 서민의 고용과 생존위기를 돌파하자는 취지에서 고민이 시작된 것”이라며 “조직이 방대한 만큼 내부 논의 진행에 긴 시간이 필요한데, 늦어도 이달 중순께 어떤 결과를 내놓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계의 고민은 자동차·금융·건설·조선 등 주요 산업 부문에서 조업 단축과 인력 감축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통계 수치도 암울하다. 지난 12월 말까지 국내에서 구직포기자, 취업준비자 등 사실상 실업 상태에 놓인 사람은 317만 명으로 전체 노동인구의 11.9%에 이른다. 정규직만 1만9천 명에 이르는 69개 공기업도 10% 이상 감산을 선언했고,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들은 구조조정의 1순위 희생양이 되는 형국이다.

잔업으로 임금보전 관행 이참에 깨야

아직 고용조정은 본격화되지 않았더라도 물량 감소에 따른 임금 저하는 심각한 수준이다. 국내 완성차 업체들의 12월 생산계획을 보면, 현대차 7개 공장과 기아차 9개 공장 중 하루 8시간 노동시간도 못 채우는 ‘4+4’나 ‘5+5’ 근무 형태를 보이는 곳이 5곳이나 된다. GM대우는 2009년 초까지 휴업에 들어갔고, 쌍용차의 대주주인 상하이차는 한국에서 철수할지도 모른다는 ‘위협’까지 하고 있다. 금속노조의 경제위기 관련 사업장 현황 파악 자료를 보면, 12월19일 현재 128개 사업장 중 122곳이 물량 감소를 경험하고 있으며, 잔업·특근이 줄어든 사업장은 각각 78곳과 79곳에 이른다.

사정은 급박하지만, 금속노조의 ‘일자리 나누기’ 제안은 서민·중산층의 몰락을 막을 수 있는 유력한 대안임이 틀림없다. 국내에서도 풍부한 성공사례를 찾을 수 있다.

경북 경주에 있는 차부품 업체 발레오만도는 2005년부터 승용차 공장에 넘치는 생산 물량을 상용차 공장에 넘기는 형태로 고용안정을 꾀하고 있다. 발레오만도는 과거 상용으로 분류되던 1t 트럭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승용으로 분류하고, 5t 이상 대형 트럭과 버스 부품만 상용차 공장에서 생산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었다. 이전엔 승용차 부문 노동자들은 야근·특근이 넘치는 반면, 상용차 쪽은 8시간 정규노동만 유지하는 형국이라 소득 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노조는 상용 부문 노동자들이 승용 부문 일감 일부를 야근·특근 형태로 생산하도록 해 임금 수준을 맞추고, 상용 부문의 집중적인 연구개발·투자를 회사로부터 약속받았다. 발레오만도 노동조합의 정연재 수석부위원장은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나누고, 회사는 균질의 안정된 생산 물량을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본다”면서 “경제위기가 본격화되더라도 총고용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트럭을 생산하는 타타대우 상용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연대해 일자리를 나누는 사업장으로 꼽을 수 있다. 정규직 800여 명으로 구성돼 있던 타타대우 노동조합은 2008년 8월 말 비정규직 300여 명을 가입시켰다. 인력 파견업체 소속으로 정규직과 똑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하지만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들의 처우를 바로잡아나가기 위해서다. 권대환 노조 지회장은 “비정규직이라고 해도 사실 지역 선후배들인데 이들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었다”면서 “회사 쪽에서 경영 악화를 빌미로 어떤 공격을 해올지 모르지만,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을 함께 뭉쳐 지켜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외환위기 직후 노동계는 실업을 막고 신규 고용을 늘리기 위해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안을 적극 제기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외환위기 직후 노동계는 실업을 막고 신규 고용을 늘리기 위해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안을 적극 제기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외환위기 때 교대제 변경 재부각

외환위기 당시로 시계를 돌려보면, ‘작업장 혁신’으로 유명한 유한킴벌리는 경영위기를 맞은 노사가 협력해 일자리를 지키고 생산성까지 끌어올린 경우다. 1997년 환란 직후 유한킴벌리도 재고 물량이 급격히 늘면서 명예퇴직이란 말이 나올 만큼 위기감이 커졌다. 이에 따라 노사가 함께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기존 4조3교대 생산 방식을 4조2교대로 바꾸고, 평생학습 시스템을 도입했다. 기존에 하루 8시간씩 3개조가 일하고 1개조는 휴식을 취하던 것을 바꿔, 나흘 동안 12시간 근무한 뒤 나흘 동안 휴식 및 교육을 갖게 했다. 대신 휴일에도 쉬지 않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서는 비싼 설비를 놀릴 필요가 없고, 노동자들은 충분한 휴식과 교육을 제공받았다. 현장 노동자들의 숙련도 증대 등의 영향으로 생산성도 높아졌다. 이 회사의 시간당 기저귀 생산량은 97년 2만3천 개에서 이듬해에는 2만5천 개로 늘었고, 지금은 4만3천 개에 이른다.

꼭 평생학습 모델이 아니더라도, 교대제 변경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는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비교적 성공한 모델로 평가받는다. 임준택 전 한국노총 화학노련 정책실장은 “40년 이상 3조3교대(휴식조 없는 3교대)를 하던 쌍용양회, 하이트맥주 등이 4조3교대로 바뀌었고, 주야 맞교대가 일반적이던 식품업체들이 3조3교대로 개선됐다”면서 “노·사·정 대타협을 통한 주 40시간제 도입은 일자리를 지키고 신규 고용을 창출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번 금속노조의 ‘공생협약’ 제안이 실현될지에는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차의 경우를 보자. 현대차는 최근 다른 업체들에 비해 판매 상황이 나은 편인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도 기대하기 힘든 사업장이다. 비정규직의 노조 가입도 막았던 정규직 노조에서 당장 임금이 줄어드는데도 비정규직까지 끌어안는 일자리 나누기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장기호 현대차 노조 공보부장은 “(금속노조 제안의) 취지는 공감하지만, 현장의 고민과 조합원들의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며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보였다.

정부와 대기업의 태도도 문제다. 비정규직법과 최저임금법에서 ‘반노동적’ 태도를 보인다는 비판을 노동계로부터 받아온 노동부는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2009년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대기업 정규직 위주의 노동시장 경직성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고용·임금·근로시간 등 근로기준법제를 유연화·합리화·명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앞으로 해고 요건을 쉽게 하고 야간·휴일근로수당의 할증률을 낮추는 것을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부와 대기업의 밀어붙이기 우려

금속노조 관계자는 “지난 1998년 외환위기 당시 현대차가 구조조정을 추진할 때 노조가 대안으로 제시한 게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삭감이었다”면서 “그러나 당시 회사 쪽의 거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돌아봤다. 외환위기 때 ’나쁜 학습’을 한 대기업들이 이번에도 대량해고를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현재의 금속노조는 내부의 이견, 정권과 대기업의 노조 무력화 기도 등으로 사면초가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시민사회의 관심과 진보 진영의 연대가 어느 때보다 절박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일자리 나누기 외국 사례들
금속노조 고민의 뿌리는 폴크스바겐 모델


금속노조처럼 노동조합 쪽에서 경제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는 사례는 외국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독일금속노조 연방집행부는 지난 12월11일 일자리 보장, 경기 활성화, 미래지향적 투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경기 활성화와 고용안정 프로그램’ 담화문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정리해고를 막고, 파견노동자에게 정규직이 누리는 고용보호 조처를 적용시키며, 앞으로 3~4년간 1천억유로의 펀드를 조성해 교육·연구·환경·사회간접자본 투자에 나서자는 내용이 포함됐다. 또 노조 쪽은 고통 분담을 위해 임금협상을 조기에 타결하고, 2009년 초 임금인상률도 애초 요구 수준의 절반인 2.1%로 양보하겠다고 밝혔다.
독일의 자동차 산업계에는 앞서 1990년대 초반 위기를 노사협력으로 극적으로 극복해낸 전례가 있다. 폴크스바겐은 지난 1993년 독일 통일 이후의 판매 특수가 사라지면서 생산량이 25% 줄고 영업이익률이 5% 이하로 떨어졌다. 당시 폴크스바겐 노사는 주당 노동시간을 36시간에서 28.8시간으로 줄이고, 실질임금도 삭감하는 협정을 맺었다. 대신 회사는 생산기지 국외 이전과 노동자 정리해고를 하지 않고 추가 투자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금속노조 정책연구원의 이상호 박사는 “당시 폴크스바겐에서 출발한 사회적 타협은 산별노조를 통해 독일 자동차 산업 전반으로 확산됐다”며 “최근 우리 금속노조 내부의 고민도 1993년 폴크스바겐 모델에 뿌리가 닿아 있다”고 말했다.
1980년대 네덜란드도 경제위기를 사회협약에 따른 일자리 나누기로 극복한 사례다. 극심한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1982년 11월24일, 네덜란드 경영자와 노조 대표는 마라톤 협상 끝에 임금 삭감, 일자리 분배를 통한 고용 확대 등을 뼈대로 한 바세나르 협약에 합의했다. 당시 노조는 9%의 실질임금 하락을 받아들였고, 기업주는 노동시간을 5% 단축해 일자리를 나누기로 합의했다. 바세나르 협약은 노조의 양보 폭이 너무 컸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후 경제의 활력을 회복시키는 계기로 작동했다.
한편 네덜란드, 독일 등 사회협약이 맺어진 국가의 정부들은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꾀하고 구매력 하락을 막기 위해 세제혜택, 차별금지 등의 정책을 폈다.



박태주 현대차 노사전문위 대표
“비정규직 아우르는 고용보장 필요”


박태주(54) 노동교육원 교수

박태주(54) 노동교육원 교수

“금속노조의 현 상황이 만만치 않지만, 정갑득 위원장을 비롯한 지도부의 판단은 올바르다고 본다. 정규직이 양보해서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대신 비정규직까지 아울러 총고용을 보장받아야 한다.”
현대차 노사전문위원회 대표를 맡고 있는 박태주(54·사진) 노동교육원 교수는 “현재의 경제위기에서는 성장에 의존하지 않는 일자리 만들기가 화두”라며 “완성차 및 부품업계의 ‘일자리 나누기’는 산별노조가 큰 원칙을 세워 정부와 지원방안을 논의하고, 사업장 단위에서 구체적 실행계획을 짜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일자리를 만드는 데 가장 좋은 수단은 경제성장이지만, 현 위기 상황에서는 일자리를 통해 내수경제의 기반을 받치는 게 급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금속노조의 ‘일자리 나누기’ 제안은 이를 위한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박 교수는 일자리 나누기의 필수조건으로는 정규직들의 양보와 연대를 꼽았다. “정규직 고용조정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지 않는 지금은 임금 삭감에 대한 양보의 폭이 중요하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그는 “자동차는 값비싼 소비재여서 경기에 민감한 산업”이라며 “대다수 완성차 공장들이 하루 4시간 근무시간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정규직·비정규직 연대의 틀은 좀더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정부와 기업의 태도다. 박 교수는 “임금 문제를 둘러싼 노사 양쪽의 부담을 덜려면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면서 “그러나 현 정부는 14조원을 강물에 떠내려보내는 데만 관심을 쏟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기업들에 대해서도 “외환위기 때처럼 구조조정을 밀어붙여 노사 간 불신이 깊어지면, 기업의 경영위기는 오히려 심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노동시간 단축 논의가 나오는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남는 시간을 교육·훈련에 투자할 기회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얻은 ‘노동의 숙련화’는 제조업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중요한 시기이고, 시간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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