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사옥의 굴욕

기업들, 인수자금 마련 위해 줄줄이 매각 나서… 값 떨어져 차익 노린 외국계도 고전
등록 2009-01-01 11:34 수정 2020-05-03 04:25

한화그룹은 서울 장교동 그룹 사옥과 소공동 한화금융프라자 빌딩, 여의도 한화증권 빌딩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금융위기로 애초 추진했던 자본 유치가 쉽지 않자 부동산 매각에 나선 것이다. SK그룹은 미국계 투자회사 메릴린치에 판 서울 서린동 사옥을 되사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 2002년 SK는 인천정유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옥을 메릴린치한테 4400억원에 팔았다. 메릴린치가 이후 빌딩을 되팔려면 먼저 SK에 매입 의사를 타진해야 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아뒀다.
사옥 매각과 매입을 놓고 고민하는 두 회사의 모습은 우리나라 빌딩 시장 현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기업들은 국제통화기금(IMF) 직후 생존을 위해 사옥을 팔았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사옥 매각은 기업의 인수·합병(M&A)에 따른 자금 조달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때 기업 빌딩을 주로 사들인 외국계 금융회사들은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최근의 금융위기는 다시 사정을 바꿔놓았다. 빌딩을 매입한 금융회사들은 빌딩 매각에 쩔쩔매고 있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연합(왼쪽부터)

한겨레 김종수 기자·연합(왼쪽부터)

비싸게 되산 한화 다시 매각 검토

현재 사옥 처분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M&A를 준비하거나 성사시킨 기업들이다. 자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부동산 처분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기업으로선 수천억원대 부동산을 깔고 있는 것보다 팔아 현금을 손에 쥐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한화는 지난 2002년 장교동 빌딩을 구조조정 전문 부동산회사에 ‘세일 앤드 리스백’(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을 매각한 다음 이를 재임대해서 사용하는 방식)으로 1860억원에 팔았다. 재무구조 개선 차원이었다. 하지만 2007년 두 배 가까운 가격에 되사들였다. 한화 금융 계열사들도 2003년 구조조정 차원에서 1410억원에 팔았던 여의도 한화증권 빌딩을 2008년 5년 만에 3200억원대에 다시 매입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도 지난 2007년 대우센터 빌딩을 팔아치웠다. 금호는 대우건설 인수 뒤 대우빌딩을 매각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이 빌딩은 사람들에게 서울의 상징물이었다. 금호는 대우건설을 사들인 지 1년도 못 돼 미국계 금융회사인 모건스탠리에 이 건물을 팔았다. 지난 2004년 싱가포르투자청에 9300억원에 팔린 강남 스타타워 빌딩 이래 최고 가격이다.

유동성 위기설이 돌아 홍역을 치렀던 두산그룹도 부동산 매각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산의 본사 사옥으로 쓰이는 서울 동대문 두산타워와 두산인프라코어의 여의도 사옥이 매각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기업들의 사옥이 시장에 무더기로 나온 건 1997년 외환위기 바로 뒤였다. 유동성 위기를 겪던 기업들이 헐값에 사옥을 팔아치우려 했다. 외국계 펀드들이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대표적 노른자위 빌딩을 사들였다. 론스타, 모건스탠리, 싱가포르투자청, 오스트레일리아계의 맥쿼리은행, 독일계인 도이치방크 등이 큰손이었다. 이들은 ‘빌딩 사냥꾼’으로 불렸다.

론스타는 지난 2001년 현대산업개발이 짓던 서울 역삼동 호텔 건물을 6300억원에 사들인 뒤, 3년 뒤 싱가포르투자청에 팔아 3천억 원의 매각 차익을 거뒀다. 스타타워(현 강남파이낸스빌딩) 얘기다. 서울 충무로의 대표적 랜드마크 빌딩인 극동빌딩도 론스타의 손을 탔다. 론스타는 극동건설을 인수한 지 6개월여 만인 2003년 하반기 이 빌딩을 매각해 ‘먹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싱가포르투자청은 99년 서울 잠실 시그마타워 인수를 시작으로 2000년 프라임타워(옛 아시아나빌딩·490억원), 서울파이낸스센터(3550억원)를 잇따라 샀다. 종로구의 무교빌딩과 코오롱빌딩도 갖고 있다. ING그룹은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의 팬택 신사옥 빌딩을 공개 입찰을 통해 2천억원(평당 1천만원)에 매입했다. 모건스탠리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삼성물산 소유의 삼성플라자 빌딩 내 매장을 뺀 9∼20층 7522평을 1400억원에 인수했다. 도이치방크 계열사인 도이치자산운용신탁(RREEF)은 서울 중구 HSBC빌딩와 삼성생명의 충무로빌딩, 삼성동빌딩, 여의도빌딩 등을 잇따라 매입했다.

매물로 나온 외국 금융사 소유 빌딩 (※ 이미지를 확대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매물로 나온 외국 금융사 소유 빌딩 (※ 이미지를 확대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SK 서린동 사옥 매입 문제 ‘느긋’

하지만 최근엔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현금 확보가 다급해진 외국 금융회사들이 시장에 빌딩을 무더기로 던지고 있다. 극동빌딩의 주인이 된 오스트레일리아계 맥쿼리그룹 계열 맥쿼리센트럴오피스는 2008년 7월 극동건설 매각에 나섰으나 매수 의사를 밝혔던 우선협상자들이 모두 매입을 포기했다. 올 상반기만 해도 매각 예상 가격이 4천억원에 육박했던 극동빌딩은 가격을 3250억원까지 낮췄지만 결국 매각이 무산됐다.

유동성 위기를 겪은 메릴린치가 SK에 서린동 사옥을 되팔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메릴린치는 최근 미국 상업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넘어가면서 BOA가 돈이 될 만한 메릴린치 자산을 매각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서린동 사옥 맨 위층인 35층에는 최종건 1대 회장과 최종현 2대 회장의 흉상이 놓여 있고, 34층에는 최태원 회장 집무실이 있다. 관건은 건물 가격이다. 당시보다 수천억원이 올랐다. 6천억원대에 이른다는 평가도 있다. 일단 SK는 느긋한 편이다. SK 쪽은 빌딩 재매입과 관련해 “메릴린치 쪽에서 매입 요청이 아직 없는 상태라 우리가 먼저 매입 문제를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메릴린치 한국지사는 “미국에서 유동성 문제가 불거진 만큼 아시아에 있는 자산을 당장 매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9월 파산한 리먼브러더스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옛 나산백화점의 사업 지분 49.51%를 SK건설 계열사인 SKD&D에 팔았다. 리먼은 제3자 매각을 추진하다 실패하고 2008년 10월 110억원이라는 헐값으로 땅 지분을 매각하고 말았다. 리먼은 서울 명동 유투존 상가와 동대문 상가 라모도빌딩도 내놓았으나 인수자가 없는 상황이다. 미 부동산 투자기관인 GE리얼에스테이트는 서울 논현동에 있는 트리스빌딩과 경기 분당에 있는 초림빌딩을 팔기 위해 신영에셋을 매각 자문사로 선정했다. 세계 최대 보험업체인 AIG는 서울 여의도에 있는 국제금융센터(IFC) 지분을 파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겠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