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불황, 감성 마케팅으로 넘는다

품바 공연으로 추억 자극하고 ‘강마에’ 낚시걸이로 구매 유도
등록 2008-12-09 15:16 수정 2020-05-03 04:25

불황 시대다. 연초부터 국제적인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서민들의 지갑을 닫는 징후가 뚜렷했는데, 이제 전세계적 금융위기 여파로 묵직한 자물통까지 채워진 형국이다. 빨간 립스틱·소주·콘돔의 판매량이 늘어난 한편, 달력 인심이 각박해지고 길거리에 버려진 개들이 늘었다. 그러나 불황에 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기업들은 가격 파괴, 공짜, 현금, 경품, 감성 등을 열쇳말로 ‘불황 마케팅’의 잰걸음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지난 12월5일 서울 명동에서 한 화장품 판매점 직원이 깍아팔기 안내 손팻말을 들고 손님들을 모으고 있다.

지난 12월5일 서울 명동에서 한 화장품 판매점 직원이 깍아팔기 안내 손팻말을 들고 손님들을 모으고 있다.

강물의 혼탁 여부를 판단하게 도와주는 환경지표종 생물들처럼, 불황기에 늘고 줄어든다는 속설을 따라 ‘서민경기 지표’들을 들여다보자. 불황기에 많이 팔린다는 콘돔은 올해 판매량 등락이 잠잠하다가 최근 다소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루 200만 개 이상의 콘돔을 생산하며 국내 콘돔 시장의 80%대를 점유하고 있는 ‘유니더스’의 올해 월별 내수 매출액은 △6월 2억5천만원 △7월 2억원 △8월 2억1천만원 △9월 3억1천만원 등이다. 9월의 판매 증가는 사랑의 힘일까 불황의 힘일까. 붉은색 립스틱이 인기를 끄는 것도 들어맞는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이자녹스의 립스틱 판매가 전년 대비 15% 늘었고, 한방 브랜드 ‘후’의 립스틱은 최근 출시 열흘 만에 판매량이 2만 개를 돌파했는데, 대부분 레드 계열”이라고 말했다. 아모레퍼시픽 라네즈의 립스틱 판매율은 올해 9월 말을 기준으로 지난해보다 44%가량 늘어났다. 올 들어 소주 판매량도 크게 늘었다. 대한주류공업협회의 자료를 보면 올 1~10월까지 소주는 9419만 상자(360㎖짜리 30병)가 팔려 전년 동기 대비 4.4% 증가했다. 진로소주 쪽에서는 자사의 올해 소주 판매가 5785만여 상자에 이르러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6.4% 늘어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붉은 립스틱·콘돔 매출 동반 상승

줄어드는 것들도 많다. 먼저 달력 인심이 각박해졌다. 소규모 인쇄소가 밀집한 충무로 인쇄 거리는 연말이면 달력·카드·카탈로그 등 인쇄물을 찍느라 분주해야 하지만, 업체들 중 상당수가 일손은 놀리는 형편이다. 패밀리 레스토랑 업종만 봐도 아웃백, KFC, 뚜레쥬르, TGI프라이데이, 씨즐러 등이 내년 달력 판촉행사를 아예 취소하거나 제작 물량을 절반 가까이 축소했다. 남성 정장의 매출도 줄고 소비자들이 재킷, 바지 등 단품을 따로 사는 일이 증가하는 경향도 뚜렷하다. LG패션 관계자는 “올해 신사복 매출 추이를 보면 1분기에는 전년동기 대비 10% 이상 증가했지만 2분기와 3분기에는 5% 정도 감소한 상황”이라며 “특히 최근 들어 백화점 쪽에서 단품 비중을 늘려달라는 요구가 강해 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가 나쁘면 사료값 부담 등을 이유로 버려지는 애완동물들도 늘어나게 된다. 각 구청에서 수집한 유기동물 수를 집계하는 서울시 생활경제담당 동물관리팀의 자료를 보면, 올해 10월까지의 유기동물 수는 모두 1만3650마리로 연말엔 1만6천마리 정도에 이를 전망이다. 2005년 1만7577마리, 2006년 1만6106마리, 2007년 1만5373마리 등 꾸준히 감소하던 수치가 다시 반등세로 돌아선 것이다.

유통업체들은 소비자와 직접 대면한다는 점에서 불황을 이겨내려는 노력이 더욱 눈물겹기 마련이다. 일단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경품과 덤으로 무장한 물량 공세다. 지난 4월부터 공짜 마케팅의 일환으로 ‘뜨는 상품 무료 증정’ 행사를 하고 있는 신세계 이마트는 지난 11월 품바공연팀을 초청하고 엿이나 뻥튀기 등 추억의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추억 마케팅’을 벌이기도 했다. 온라인 쇼핑몰 롯데닷컴은 연말까지 총 15억원의 경품을 푼다. 신규 회원 중 1명에게 시가 1억원짜리 오피스텔을 주고, 기존 회원과 롯데백화점 등 계열사 매장 행운권 응모자 30명에게는 GM대우 신차 ‘라세티 프리미어’(1600만원)를 준다.

TV 홈쇼핑 업체들은 판매 방식을 바꿨다. TV 홈쇼핑에서 건강기능식품은 6개월∼1년 분량을 판매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최근 불황 여파로 6개월, 3개월, 1개월 분량으로 기존 상품을 쪼개 팔고 있다. 건강을 챙기되 목돈 들이기를 꺼리는 소비자 심리를 간파한 것이다. 또 단품 위주로 팔던 중저가 의류는 묶어 파는 마케팅 방식으로 바꾸었다. 기존 가격 그대로지만 상품 구성을 2종에서 7종까지 늘리는 것이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소비자 심리는 중고 제품 구매가 활발해지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최근 ‘중고장터’ 코너를 개편하고 중고 전용 택배 서비스까지 선보인 옥션에는 매주 중고 매물이 지난해 갑절 수준인 5만여 개씩 올라온다. 인터파크에서도 컴퓨터 카테고리 내에 ‘중고/반품/리퍼브’ 코너를 운영 중이다. 쓰지 않고 반품됐거나 전시됐던 전자제품 등을 일반 제품보다 훨씬 싸게 팔아 알뜰족들이 몰린다고 한다.

쪼개팔고 묶어팔고 안간힘

경제 한파는 ‘방콕족’이 늘기 때문에 게임업체들엔 반가운 일이라는 속설을 반영한 때문일까. 게임업계의 현금 및 경품 마케팅은 여러 소비재 업종들 중에서도 우뚝하다. 한빛소프트는 자사의 댄스게임을 홍보하기 위해 내년 1월24일까지 총상금 3천만원 상당의 상금과 경품이 주어지는 ‘오디션 퍼펙트 리그’를 진행한다. 복고 바람을 타고 재등장한 ‘테트리스’는 1천만원 상당의 순금 테트리스 조각을 경품으로 내걸기도 했다. 다중온라인롤플레잉게임(MMORPG) 장르인 엠게임의 ‘홀릭2’도 20억원 상당의 대규모 프로모션을 진행하고 있다.

감성 마케팅도 불황을 뚫는 주요 전술 중 하나다. CJ몰에서 운영 중인 ‘크리스마스 기프트샵’ 페이지에 접속하면 한 중년 남성의 얼굴 사진과 함께 ‘경상도 무뚝뚝 사나이 강마에’가 CJ몰에서 제공하는 각종 할인 혜택을 받아 온 가족 선물을 알뜰하게 구입했다는 사연이 소개된다. 주인공인 ‘강마에’는 CJ몰 마케팅팀의 강철구 팀장이다. 불황 속 크리스마스 선물 시즌을 맞아 고객의 흥미를 유도하기 위한 ‘임직원 스토리텔링 마케팅’에 적극 가세한 것이다. 또 H몰은 ‘H몰 대표 훈남이었던 어느 MD의 똥배와의 한판승’이라는 운동기구 기획전을 운영하고 있다.

글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