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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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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목장의 결투

등록 2008-07-11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KB금융지주 회장 놓고 맞붙은 두 사내… 강정원 행장 겸직론 우세했으나 황영기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뒤집기 승</font>

▣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6월19일 서울 삼성서울병원, 황영기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부친상 빈소.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조문을 왔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귀엣말을 나눴다.

이날 두 사람을 지켜본 한 금융권 인사는 “황 전 회장이 ‘KB금융지주회사 회장에 원서를 내기로 했습니다’라고 말한 것 같았다. 워낙 바쁜 두 사람이다 보니 그런 식으로 얘기를 나눈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그 이유로 “발인이 끝나자마자, 황 전 회장이 9월 출범하는 KB금융지주 회장에 도전장을 냈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덧붙였다.

‘검투사’ 별명 얻은 황영기

이에 대해 황 전 회장은 과 한 통화에서 “사실이 아니다. 그때 강 행장이 ‘아버님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지’ ‘장지가 어디인지’ 등을 물어와 답했을 뿐이다. (KB금융지주 회장에) 지원하게 된 것은 헤드헌트 회사에서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엔 상중이라 경황이 없었다. 삼우제를 지낸 뒤 헤드헌트 회사가 지원서를 낸 것”이라고 해명했다.

두 사람이 빈소에서 나눈 얘기가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KB금융지주 회장을 놓고 진검승부가 예견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강정원 행장이 지주회사 회장을 겸직하는 원톱 체제로 갈지, 아니면 ‘황영기 회장-강정원 행장’의 투톱 체제로 갈지를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9명의 사외이사로 꾸려진 지주회사회장후보 추천위원회(회추위)가 최종 결정을 했다. 회추위는 7월3일 강 행장과 황 전 회장 등 4명의 회장 후보를 면접한 뒤 황 전 회장을 회장 후보로 추천했다. 지주회사 회장은 증권, 보험 등 비은행 부문을, 행장은 은행을 전담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KB금융지주는 투톱 체제로 꾸려지게 됐다. 결국 두 사람의 한판 승부는 황 전 회장의 ‘막판 뒤집기 승’이었다.

애초 국민은행 안팎에서는 ‘강 행장이 지주회사 회장까지 맡아야 한다’는 겸직론이 우세했다. 지주회사 출범 때인 만큼 최고 경영진 간의 갈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느닷없이 ‘황영기 카드’가 나오자 국민은행 쪽은 출렁거렸다.

두 사람은 물밑에서 상당한 신경전을 벌였다. 강 행장은 7월1일 월례조회에서 “국내 선도 금융기업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인수·합병(M&A)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강 행장이 LG카드와 외환은행 인수에 연거푸 실패해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황 전 회장은 우리금융 회장으로 있으면서 국내 은행의 취약 부분인 투자은행(IB) 업무를 강화하기 위해 LG투자증권(현 우리투자증권)을 전격 인수했다. 하지만 황 전 회장은 이같은 공격 경영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뒤 7천억원가량의 IB 투자 손실을 우리은행에 입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황 전 회장의 별명은 ‘검투사’다. 그는 ‘검투사처럼 너무 공격 경영에만 나서는 게 아니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라는 영화 보셨어요? 주인공은 싸울 때는 공격적으로 나서지만 가족과 동료들 앞에선 부드럽죠. 검투사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요”라고 말했다. 황 전 회장은 “국민지주도 신한의 라응찬 회장이나 하나의 김승유 회장처럼 큰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필요하고 은행 경영을 열심히 맡아서 할 사람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영 노선 놓고 매일 싸울 것”

반론을 듣기 위해 강 행장과 연락을 시도했다. 비서실과 홍보실을 통해 수차례 요청했으나 끝내 강 행장은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강 행장다운 스타일이다. 대신 그의 한 측근한테서 간접적으로 강 행장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신한·하나는 오너 같은 경영자가 있는 회사다. 그런데 오너가 없는 회사는 회장과 행장을 분리하면 경영 노선을 놓고 매일 싸우게 된다. 우리은행장이 경쟁 은행이던 국민은행으로 오겠다는 것은 상도의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 전 회장은 우리금융의 자산을 2004년 137조원에서 2006년에는 212조원대로 급성장시켰다. 그의 재임 기간 우리금융 주가는 154.93% 치솟았다. 비슷한 기간 강 행장이 이끌던 국민은행의 주가상승률은 86.4%였다. 이에 반해 강 행장은 2004년 0.19%까지 떨어졌던 총자산이익률(ROA)을 2006년 1.24%까지 끌어올리며 내실을 다져나갔다.

두 사람의 인연은 질기고도 길었다. 두 사람 모두 외국계 금융회사로 은행업에 발을 디뎠다. 1982년 황 전 회장이 먼저 미국계 금융회사인 뱅커스 트러스트에 들어왔고 다음해 강 행장이 입사했다. 두 사람은 여기서 7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별로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는 게 주위 사람들의 평가다.

89년 황 전 회장은 삼성그룹으로 옮겨 삼성투신 사장, 삼성증권 사장 등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 뒤 2004년 우리금융지주와 우리은행의 사령탑을 맡게 된다. 그사이 강 행장은 뱅커스 트러스트 한국대표를 지낸 데 이어 이헌재 금감위원장에 의해 서울은행장에 발탁됐다. 2004년 국민은행장으로 부임했고 지난해 11월 연임에 성공했다.

이처럼 캐릭터와 성격이 확연히 다른 두 사람이 투톱 체제로 금융회사를 경영하게 됐다. 두 사람의 경영 스타일도 사뭇 다르다. 황 전 회장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창업형이라면, 강정원 행장은 내실 위주의 수성형이다.

회장 후보로 맞붙은 강 행장의 거취도 관심이다. 강 행장이 퇴진할 경우 황 전 회장에 대한 노조의 반발을 감안할 때 국민은행이 휘청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 행장 쪽에선 “임기를 채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강 행장의 임기는 2년6개월가량 남아 있다.

황 전 회장의 앞길은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당장 ‘이명박 정권의 낙하산 인사’로 규정하면서 회장 선임을 반대해온 국민은행 노조를 추슬러야 한다. 노조는 황 전 회장이 선임될 경우 출근 저지 투쟁을 벌이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한 회추위원은 “낙하산 운운은 택도 없는 소리다. 우리 내부에서도 추천이 있었고 많은 헤드헌트사들도 추천했다”고 반박했다.

이명박정권 낙하산 인사 논란

KB국민지주는 중장기적으로 비은행 부문을 강화해 은행 비중을 낮춰야 한다. 국민은행과 계열사의 총자산 중 98%가량이 은행 부문에 쏠려 있다. 증권사에 대한 추가적인 M&A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해외 진출도 다져나가야 한다. 올해 국민은행은 카자흐스탄의 센터크레디트 은행 지분 30%를 약 6213억원에 인수했지만 ‘지나치게 많은 돈을 주고 인수했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황 전 회장은 M&A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실탄은 풍부한 편이다. 지난해 말 기준 국민은행의 자기자본은 19조8천억원으로, 자회사 출자한도 30%를 적용할 경우 여유자금은 5조9400억원이나 된다.

회장 내정자로 자리가 바뀐 황 전 회장은 물론 하나금융 김승유 회장, 우리금융 이팔성 회장 등이 모두 이명박 대통령의 금융 측근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은행권 M&A에서 이들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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