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륭전자·이랜드 등 늘어나는 장기투쟁 사업장들…사용자쪽은 노조 와해만 기다리며 협상에 나서지 않아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1천 일(기륭전자 노조), 800일(KTX 승무원 노조), 320일(이랜드 노조)…. 파업 상황을 알리는 보도자료의 첫 문장은 항상 “투쟁을 시작한 지 000일이 되었습니다”로 시작된다. 점거농성, 장기단식, 삼보일배, 도보순례, 삭발투쟁, 자전거 행진, 촛물문화제, 연대의 밤…. 한마디로 “죽는 것 빼고 안 해본 것이 없다”(기륭전자 노조 조합원). 한두 달이면 끝날 줄 알았던 파업은 해를 넘긴 지 오래고, 오랜 파업에 지친 동료들은 하나둘 흩어지고 있다. 남은 몇몇은 외친다. “우리는 스스로 노동자들의 운명을 개척해나갈 것이다.”(5월15일, 이랜드 노조)
몸을 던지는 극한의 투쟁까지
외환위기 이후 언제부터인가 노동계에서 ‘장투(장기투쟁) 사업장’은 낯익은 말이 되었다. 즉, 어느 사업장이든 파업이 벌어졌다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장투 사업장 목록에 들어가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현재 장투 사업장으로 불리는 곳은 기륭전자, KTX, 이랜드, 코스콤을 포함해 100여 곳에 이른다. 한결같이 비정규직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사업장이다.
5월19일,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 파업이 1천 일을 맞았다. 대다수 장기파업 사업장의 경우 파업 장기화는 곧 ‘잊혀진 싸움’이 되고 있음을 뜻한다. 자신들의 싸움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려면 몸을 던지는 극한의 투쟁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5월11일 기륭전자에서 해고된 여성 노동자 4명은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설치된 18m 임시 철탑에 기습적으로 올라가 “쫓겨난 지 1천 일, 시민들의 마음 한켠을 점거 농성하기 위해 철탑에 올랐다”고 외쳤다. 정확히 1천 일 전, 불법 파견 시정과 해고 조합원 정규직화를 촉구하며 시작한 파업이었다. 파업에 참여했던 250명 가운데 대다수가 천막농성장을 떠났다. 남은 건 이제 35명이다. 먹고살아야 하므로, 또 숱한 점거와 농성에도 끄떡없는 회사에 질려 동료들은 그렇게 떠났다.
이보다 앞서, 5월9일 전국철도노조 KTX 승무지부 여성 노동자들은 ‘투쟁 800일’을 맞았다. 몇 해가 지났지만 요구는 똑같다. “철도공사는 KTX와 새마을호 승무원에 대한 불법 외주화,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직접고용을 보장하라”. 애초 400여 명에 이르던 KTX와 새마을호 파업 승무원들은 약 70명만 남았다. 외롭고 기나긴 싸움을 견디다 못해 뿔뿔이 떠나갔다. 그동안 파업이 끝날 것 같은 국면이 몇 번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는 금방 무너지고 말았다. “노사 간 실무자들끼리 타협한 것일 뿐 협상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철도공사 쪽의 최종 대답만 돌아왔다. 빨리 파업을 끝내고 싶지만, 천막농성을 지속하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 포기하고 돌아갈까, 불현듯 그런 생각도 들지만, 그럴수록 파업과 무관한 인생을 살고 있던 자신을 뜻하지 않게 ‘투사’로 내몬 세상과 회사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이남신 이랜드노조 부위원장은 “비정규직 장기투쟁 사업장들을 보자. 노동자들이 장기파업을 통해 회사를 망가뜨릴 만큼 힘을 갖고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며 “이들이 힘이 있어서 오랫동안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싸우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힘없는 비정규직 사업장의 싸움이기 때문에 사용자들은 노조 와해를 노리며 한사코 교섭을 거부하고, 결국 사업장마다 투쟁이 장기화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얘기다. 하루하루 벼랑 끝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은 어느 정도 타협할 자세가 돼 있는 반면, 회사 쪽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끝까지 버티는 형국이다.
사용자 쪽은 교섭 테이블에 나오는 모양새만 갖출 뿐 실권을 가진 대표는 얼굴을 나타내지 않는다. 어렵사리 극적 합의안이 도출된다 해도 “실무자 선의 합의일 뿐”이라고 회사 쪽이 발을 빼는 일도 되풀이되고 있다. 그동안 이랜드가 그랬고, KTX도 마찬가지였다. 이남신 부위원장은 “노동부가 중재 역할을 하겠다고 몇 번 나섰지만 결국 최종 해결의 주체는 노동조합과 사용자다. 노조가 모든 것을 얻어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양보안을 제시해도 사용자 쪽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게 소박한 요구안을 가지고…
싸움은 대부분 불법파견과 부당해고 등 사용자 쪽의 명백한 노동법 위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용자들에게 적용되는 ‘법과 원칙’은 벌금 몇백만원 물리는 것으로 끝이다. 노동위원회에서 부당해고에 대해 복직 판정이 내려지더라도 회사 쪽은 ‘시간은 회사 편’이라며 대법원까지 사건을 질질 끌고 가 노조 와해를 시도하기 일쑤다.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국회에서 장기투쟁 사업장에 대한 국정감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국회 역시 ‘또 한 번의 싸움 현장’으로 기록될 뿐, 한쪽 당사자인 사용자에 대한 실질적인 조처가 내려지지 않고 한가닥 기대는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일부에서는 민주노총 중앙과 산별 연맹이 비정규직 장기투쟁에 적극 연대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지만, “기대에 비해 미흡하다”는 것일 뿐 민주노총도 장기투쟁 사업장 문제 해결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건 분명하다. 이와 관련해 민주노총은 2004년 말부터 전국의 장기투쟁 사업장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산하 연맹·지역별 장기투쟁 사업장 담당자 회의를 수시로 열고 있다. 박성철 민주노총 조직·쟁의담당국장은 “비정규 장기투쟁 사업장마다 싸움이라고 할 만한 싸움은 다 해봤다. 사용자들이 강경한 태도를 굽히지 않아 싸움이 장기화되고 있다”며 “장기투쟁 사업장들끼리 연대하는 공동투쟁을 전개하고, 집중 투쟁 기간을 정한 뒤 한두 개 장기투쟁 사업장을 찍어 집중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방법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남신 부위원장은 “민주노총과 산별 연맹에서 장투 사업장 투쟁을 위력 있게 못한 측면이 있지만, 사실 민주노총 중앙이 투쟁을 떠안는다고 해서 개별 사업장 노사관계가 쉽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라며 “하지만 비정규 장기투쟁 사업장마다 민주노총 중앙이 생계비 등 많은 지원을 해온 것도 분명하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비정규직 장기투쟁 사업장들은 한국의 전체 노동자들이 안고 있는 과제를 응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민주노총이 장투 사업장 싸움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저지 같은 거대한 정치적 이슈에서도 이기기 힘들 것”이라며 “장투 사업장 문제를 노동계의 최대 당면 과제로 설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장투 사업장 노동자들의 요구는 △정리해고 철회 △부당노동행위와 노조탄압 중단 △교섭 상대로 노조 인정 등 어찌 보면 ‘소박한’ 것들이다.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이 몇 년째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도 요구 내용의 ‘정당성과 소박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사용자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 노동조합을 깨고야 말겠다’는 지독한 고집을 부리면서 사태는 장기화하고, 결국 ‘노사 당사자 해결’은 불가능해진다. 이남신 부위원장은 “장기파업 사업장의 경우 노조는 사용자와 정부라는 두 상대방과 싸워야 한다. 정부가 파업 원인을 제공한 사용자의 불법행위에는 거의 눈감고, 노동자들의 점거농성을 해산하는 데만 열을 올리기 때문”이라며 “자율적 교섭이 사실상 물 건너갔기 때문에 파업이 장기화하는 만큼 사회적으로 장투 사업장 파업을 중재할 수 있는 판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중재의 판이 만들어져야
몇 년째 지속되고 있는 장투 사업장 사태는 노동조합과 파업이라는 노동 문제를 넘어 ‘인권’의 문제다. 지난 5월16일 기륭전자 공장 앞에서 ‘투쟁하는 여성 비정규 노동자 인권보고대회’가 열렸다. 홍희덕 전국민주연합노조위원장(민주노동당 18대 국회의원 당선자)은 “몇 년째 안 뽑히던 전봇대도 이명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뽑혔다. 이 대통령이 장기투쟁 사업장 문제부터 해결하고 나서 민주노총에 협조를 요구하는 모습은 왜 보일 수 없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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