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승계 2심 재판 앞두고 검찰청 포토라인에 설 것이 확실시…도덕적 정당성 잃기 전에 ‘버릴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시간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자전적 에세이집 에는 남부 인도에서 코코넛을 이용해 원숭이를 산 채로 잡는 내용의 TV 다큐멘터리가 소개돼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사람들은 코코넛 껍데기에 원숭이 손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어 속을 긁어낸 다음 그 속에 쌀을 집어넣고 끈을 연결해 말뚝에 단단히 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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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코코넛을 발견한 원숭이가 다가와 구멍 속으로 손을 넣어 쌀을 한 움큼 집은 뒤의 상황은 이미 꽤 많이 알려져 있는 대로다. 숨어 있던 사람이 다가가면 원숭이는 달아나려 기를 쓰면서도 쌀을 잔뜩 쥔 손을 놓지 않아 결국 사로잡히고 만다.
유죄 판결이 승계 막지는 못하지만…
이 회장은 눈앞의 이익에 눈먼 원숭이의 예를 들어 ‘버릴 줄 아는 용기’를 가질 것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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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에 대한 검찰의 소환 방침이 알려진 시점에서 에세이 속의 원숭이 얘기가 떠오른 것은 이 회장 쪽이 ‘큰 것’(사회의 신뢰와 존경)을 위해 ‘작은 것’(불법·편법 승계)을 버리는 용기를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고 있는 듯해서다.
거의 기정사실로 굳어진 것처럼 이 회장이 8월 중 검찰청의 포토라인에 서게 된다면, 그것은 그의 생애 두 번째가 된다. 이 회장이 처음으로 검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은 게 1995년 11월이었으니 11년 만이다. 이번의 두 번째 조사는 첫 번째와 질적으로 다르다. 11년 전의 첫 조사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뇌물을 줬다는 혐의에 따른, 다분히 ‘정치적인’ 성격이었다. 반면 이번 조사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발행에서 비롯된 불법·편법 승계 문제에서 불거진 것으로, 삼성 소유지배 체제의 뿌리와 맞닿아 있는 ‘사회·경제적’ 사안이다. 불구속 기소 뒤 유죄 판결을 받았던 첫 번째 조사 때보다 긴장감이 높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건희 회장에게서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로 이어지는 불법·편법 승계의 출발점인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에 대해선 1심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져 2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10월 나온 1심 판결에선 에버랜드의 전·현직 사장인 허태학·박노빈씨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이후 다른 피고인들로 검찰 조사가 확대돼왔다. 이 회장의 소환 조사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검찰 조사 뒤 이 회장이 유죄로 판명난다면 파장은 대단히 클 것으로 보인다. 허태학·박노빈씨 등 전문 경영인들의 ‘유죄’는 임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저버려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한 처벌을 받는 데 머무는 반면, 이 회장의 유죄는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 전문경영인들을 시켜 불법·편법을 일삼았다는 뜻이 돼 훨씬 중대한 내용이다. 이는 이재용 상무가 경영권을 넘겨받기 위해 쌓아놓은 ‘토대’가 정당하지 않다는 말과 같다. 이 회장 가문으로선 무슨 수를 쓰더라도 피해야 할 악몽의 시나리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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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회장의 유죄가 곧바로 부자 승계 구조를 붕괴시키기는 어렵다. 검찰의 소환조사 대상은 이 회장일 뿐 이재용 상무는 빠질 것으로 알려진데다 이 회장의 유죄는 형사적 잘못(업무상 배임)이기 때문이다. 형사 문제는 죄에 따른 벌을 받고, 부당이득을 거뒀다면 추징당하는 것으로 그만이다. 이재용 상무가 삼성 경영권을 쥘 수 있는 토대인 주식을 획득하는 과정의 거래 자체를 무효화할 수 없다는 얘기다.
거래의 무효는 별도의 민사적 절차를 거쳐야 가능한데, 이는 기대 난망이다. CB 헐값 발행에서 가장 큰 손해를 입은 쪽은 삼성에버랜드라는 회사다. 따라서 현 경영진이 옛 경영진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이재용씨에 대한 CB 매각을 원인 무효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회사의 손실이 메워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총수 지배 체제에서 이런 민사소송이 벌어질 리 만무하다. 결국 이건희 회장의 유죄를 가정해도 부자 세습의 고리가 법적으로는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추가 소송의 부담도 남아
문제는 유죄 판결의 경우 이 회장 부자의 소유지배 체제가 ‘도덕적’ 정당성을 잃고, 이는 상당한 ‘사회·정치적’ 짐을 지게 된다는 점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는 “아버지(이건희 회장)가 유죄라면 아들(이재용 상무)로 승계한 그 자체가 범죄 행위라는 뜻”이라며 “이는 이 상무의 오너(대주주) 지위가 뿌리부터 잘못됐다는 의미가 된다”고 말했다.
유죄 판결에 따른 추가 소송의 부담도 남는다. CB 헐값 발행에 대한 에버랜드의 현 경영진 또는 주주(삼성 계열사)는 소송을 내지 않더라도 주주 대표소송 형식의 공익소송이 벌어질 개연성이 높다. 에버랜드 CB 발행과 관련해 2000년 6월 이건희 회장 등 에버랜드 경영진 33명을 검찰에 형사고발해 삼성의 불법 변칙 세습을 본격 이슈화한 전국 법학교수 43명 중 1명인 조승현 방송통신대 교수(법학과)는 추가 소송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소송 역시 이재용씨의 지분 획득을 무효화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삼성의 경영권 승계가 끊임없이 사회적 의제로 제기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 이 회장 쪽으로선 어떤 식으로든 대응 방안(세금 납부 등 사회적 책임)을 마련해야 할 처지에 빠지게 되는 셈이다.
삼성이나 이 회장 쪽에서 가장 바라는 바는 검찰에 소환되더라도 최종적으로 무죄로 판명나는 상황이다. 이 경우 이 회장 부자는 승계 과정의 불법성 시비라는 일생일대의 짐을 덜게 된다. 이재용 상무의 지분 획득 과정이나, 1심 판결로 보아 이 회장의 무죄 가능성은 법 상식에 비춰 낮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임에도 2심 재판부에서 드러난 기류에서 그럴 개연성이 일부 있다는 분석도 있다.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허태학·박노빈씨의 항소심 재판부는 7월20일로 예정됐던 결심 공판을 미루고 검찰에 ‘공모관계를 밝히라’며 석명권을 행사했다. ‘공모 가능성’만 갖고 수혜자(이재용 등)가 아닌 경영진만 처벌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니 구체적인 공모관계와 사실을 제시하라는 요청이다. 이에 따라 검찰 쪽에서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 자칫 1심 판결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삼성이나 재계로선 여기에 쌍수를 들고 환영할지 몰라도 사법부에 대한 비난이 들끓고, 결국 삼성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조승현 교수는 “이 회장에 대해 무죄가 떨어진다면 또 ‘유전무죄-무전유죄’ 시비가 일고, 사법부가 재벌과 결탁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무죄의 어떤 경우라 해도 삼성이나 이 회장 가문으로선 적잖은 정치적 부담을 숙명처럼 안고 가야 할 처지다. 그 숙명은 물론 무리한 경영권 세습 시도에서 불거졌다.
전성인 교수는 “에버랜드 사건을 계기로 (재산권이 아닌) 경영권은 승계되거나 상속되는 게 아니라는 개념이 정립돼야 한다”고 말했다. 아버지 몫의 ‘지분’은 아들이 넘겨받을 수 있어도, 편법으로 계열사 지분을 취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영권’을 세습하려는 시도는 자본주의 질서에도 어긋난다는 점에서다.
기업은 젖소인가, 말인가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은 이런 말을 남겼다. “어떤 이는 기업을 쏘아 죽여야 하는 살육 대상으로 생각하고, 어떤 이는 우유를 짜내듯이 쥐어짜야 하는 젖소쯤으로 여긴다. 기업을 ‘묵묵히 수레를 끄는 말’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회사에 손실을 끼치는 방식으로 경영권 세습을 도모했다면, 기업을 ‘젖소’로 여겼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불법·변칙 행위를 교정함으로써 기업을 ‘말’로 되돌려놓을 때 ‘살육 대상’으로 보는 과격한 생각도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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