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을 평가하는 ‘금융평가법’ 제안한 야마구치 교수
“외국자본이 대형은행 장악한 한국은 금융평가법이 일본보다 더 필요하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일본 의회에는 ‘지역금융 원활화에 관한 법률안’(민주당)과 ‘지역 및 중소기업의 금융환경을 활성화하는 법률안’(중소기업가동우회 전국협의회) 등 두 법안이 제출돼 있다. 두 법안이 지향하는 목적은 같다. ‘지역주민 및 중소기업에 대한 원활한 자금 공급에 관한 금융기관의 기여도를 평가하고 등급을 부여해 공개함으로써 은행이 지역경제와 중소기업에 많은 자금을 배분하도록 유도한다.’ 이른바 ‘금융평가법’(금융assessment법)이다.
고이즈미 정부 구조조정으로 ‘흑자 도산’
금융평가법은 △지방은행의 지역 및 중소기업 금융 활동을 평가하는 평가위원회 설치 △평가위원회는 지역·중소기업 금융에 대한 은행의 금융 정보를 수집·평가하고 등급을 매겨 은행 이용자들한테 공개 △금융기관이 신규 점포 설치, 합병 등을 신청할 경우 감독당국은 심사 때 평가 등급을 고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평가 대상이 되는 금융기관이 지역 중소기업과 주민들한테 원활하게 자금을 공급해주고 있는지, 융자해줄 때 담보와 개인보증에 의존하지 않고 사업계획서에 따라 쉽게 잘 빌려주는지 등을 평가하는 것이다. 중소기업가동우회안은 1년에 한번씩 은행의 지역·중소기업 대출 비율과 융자 절차를 평가하고, 지역 및 중소기업 공헌도에 따라 ‘우수’ ‘달성’ ‘개선 필요’ ‘상당 부분 미달성’ 등으로 은행마다 등급을 매긴다.
일본에서 금융평가법 제정 운동이 시작된 건 지난 1999년이다. 법안이 아직 의회를 통과하진 않았지만, 2001년 중소기업 사장 20여명이 법안 제정 서명운동에 나선 뒤 전국적 운동으로 불붙어 지금까지 국민 100만명 이상이 서명에 동참했다. 또 일본의 4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홋카이도 의회 등 19곳에서 만장일치로 금융평가법 제정 요구 의견서를 채택했고, 시·군·구의회 950곳(전체 지방의회의 30%)도 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에서 지역·중소기업 금융 활성화를 위한 금융평가법을 처음으로 구상하고, 제정 운동에 나선 사람은 일본 릿쿄대학 야마구치(54·경제학부) 교수다. 지난 9월7일, 금융노조 산하 금융경제연구소 초청으로 서울에 온 야마구치 교수를 만났다.
이 법안을 제안한 동기는.
=1990년대 후반 고이즈미 정부에 의해 금융기관 부실채권 처리가 가속화됐다. 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이 낮아지면서 대출 능력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심각한 자금융통난에 빠졌다.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기피와 기존 대출 회수 압박으로 중소기업 사장들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흑자를 내거나 우수한 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조차 자금난으로 ‘흑자 도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고이즈미 정부가 외치는 금융개혁은 중소기업에 부담을 전가하고 있었고, ‘누구를 위한 금융개혁인가’를 놓고 의문이 제기됐다. 중소기업가들의 분노가 쌓이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1년에 약 8천명이 경제적 이유로 자살하는데, 대다수가 돈을 빌리지 못한 중소기업 사장이다. 그래서 내가 미국의 지역재투자법(CRA)과 유사한 ‘금융assessment법’을 제안했다.
미국의 CRA는 당초에 인종차별을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클린턴 정부는 이 법률을 중소기업에 대한 자금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CRA는 금융기관이 자신의 영업기반인 지역 및 중소기업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융자를 해주고 있는지 등 지역경제에 대한 기여도를 평가해 ‘금융 공공성’과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미국에서 은행이 금융지주회사 설립 등 새로운 경영활동을 하려면 BIS 비율이 10%를 넘어야 하고, CRA에 따른 평가(‘우수’ ‘양호’ ‘개선 필요’ ‘불합격’ 등 4개 등급)가 ‘양호’ 이상이어야 한다.
법안이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그동안 야당인 민주당이 두 차례에 걸쳐 법안을 제출했다. 이제는 정부와 여당도 무시하지 못하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정부는 최근 ‘지역 금융기관에 대한 지침서’를 통해 “금융기관은 지역에서의 융자 실태, 지역 공헌 노력에 관한 정보를 스스로 제공해야 한다. 이런 정보는 제3자가 금융기관을 평가할 때 활용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정부도 금융평가법 개념을 사실상 도입한 셈이다.
한계기업에까지 대출해 주라는 것이 아니다
은행이 예금 이자와 대출 이자의 차이에 따른 수익을 정부 정책에 따라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있긴 하다. 그러나 민간 은행도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다. 중소기업 대출과 지역금융에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강제할 수 있는가.
=은행의 경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다. 금융은 하나의 사회적 시스템이다. 따라서 일반 기업과 다르다. 은행은 지역 주민들의 저축 자금을 운용해 수익을 내는 등 다양한 경제 주체가 참여하는 사회적 공동작업의 결과로 성립하는 것이다. 이처럼 은행이 공유재산이기 때문에 파산 위기에 처하면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세금으로 부실을 털어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정부도 ‘금융 공공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지역 중소기업은 금융 시스템에서 배제되고 있다. 은행이 지역·중소기업 금융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라는 건 금융 공공성 확보를 위한 최소한의 요구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BIS비율을 통해 ‘자산 건전성’을 평가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평가법을 통해 ‘금융 공공성’을 평가받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물론 정부가 민간 은행에 일일이 명령을 내려 지역 및 중소기업 대출에 나서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은행 평가 시스템을 도입해 공공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수익을 중시하는 미국에서도 금융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한 CRA 제도가 있지 않은가.
은행들한테 중소기업 대출에 따른 리스크를 떠안으라고 하면 과연 받아들일까.
=금융 건전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라는 건 무리다. 한계기업에 몰린 중소기업까지 무조건 리스크를 안고 대출해주라는 것이 아니다.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하고 좋은 사업계획서와 사업 아이템을 갖고 있지만 자금 융통을 못해 어려운 중소기업들이 주요 융자 대상이다. 덧붙여, 금융 공공성은 리스크를 떠안는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은행마다 가계·소매 금융에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단기 수익을 추구하고 있다. 반면 중소기업을 육성해 장기적으로 수익을 올리는 데는 매우 소극적이다. 단기 수익이 아니라 기업 대출을 통해 긴 안목으로 수익을 추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금융기관이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다 보면 장기간 이익을 낼 수 있는 시장을 잃어버리게 된다. 길게 보면 금융 공공성과 수익성은 서로 일치한다.
중소기업 대출을 늘린 결과 부실채권이 늘어난 은행은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을 해소해줄 것인가.
=제출된 법안에 그런 내용은 명시돼 있지 않다. 다만 부실이 발생했더라도 지역 및 중소기업 금융 측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은행에만 공적자금을 투입해준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금융 소비자들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은행을 선택해 이용하고, 평가 등급이 낮은 은행에 정부가 새로운 점포 설치 등을 제한한다면 은행 스스로 높은 평가를 얻으려는 인센티브가 발생할 것이다.
은행 이용자들도 등급 눈여겨 볼 것
금융 소비자들이 금리를 1% 더 쳐주는 은행을 찾아가지, 과연 지역·중소기업 공헌도가 높은 은행을 찾아갈까?
=은행 이용자들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은행을 이용할 것인지는 사실 불확실하다. 그러나 친환경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중 어느 쪽을 이용하겠는가? 소비자들의 올바른 행동을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다만 이것도 한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부가 점포 개설 등을 규제하는 조처도 필요하다. 은행의 지역·중소기업 대출 정보를 공개해도 주민들이 이런 정보를 잘 보지 않는다. 따라서 주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등급을 매겨야 한다.
한국에서는 외환위기 직후 지방은행 상당수가 퇴출·합병됐고, 대형 시중은행도 외국자본이 지배하고 있다.
=대형 은행이라도 예금을 확보하기 위해 지역에 지점 등 조직을 두고 있는 이상 지역·중소기업에 적극적으로 융자해서 지역경제에 공헌해야 한다. 지방은행이 취약한 한국은 금융평가법이 일본보다 더 필요하다. 또 외국자본이 주주가치만 추구하는 상황에서 금융 공공성을 강화하는 법은 더 절실하다. 외국자본 금융기관도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 외국자본도 고객의 불만에 대해 침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역마다 강한 중소기업이 살아나야 한국 경제에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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