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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의 ‘돈놀이’ 어디까지인가

등록 2004-03-04 00:00 수정 2020-05-03 04:23

공기업이었던 두산중공업 자금으로 고려산업개발 인수해 재무 부실한 두산건설과 합병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지난해 10월30일치 482호에 기자는 ‘두산그룹의 꿩먹고 알먹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 일이 있다. 요지는 공기업이던 두산중공업을 인수한 뒤 회사를 성장시키기보다는 돈 빼먹기에만 힘을 쏟은 두산그룹이, 이번에는 두산중공업 자금으로 또 하나의 기업 고려산업개발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이어 두산그룹이 이런 목적을 확실히 달성하기 위해 고려산업개발을 인수한 뒤 두산건설과 합병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결국 공기업 민영화가 재벌의 돈놀이에만 기여하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의 우려는 불행하게도 적중했다. 두산그룹은 고려산업개발을 인수함과 동시에 두산건설과의 합병을 선언했다. 두산그룹이 밝힌 일정대로라면 오는 4월30일을 기해 두산건설은 고려산업개발에 흡수 합병된다.

의 우려 적중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두산그룹이 마치 합병이 없을 것처럼 고려산업개발 소액주주와 노동자, 그리고 법원을 속였다는 점이다. 고려산업개발 노동자와 소액주주들은 두 회사의 합병을 저지하기 위해 나섰다. 하지만 이들의 문제제기가 두산이 가려는 길을 되돌려놓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두산그룹이 고려산업개발을 인수한 과정은 이렇다. 두산건설과 두산중공업이 참여한 두산컴소시엄은 지난해 10월 고려산업개발 인수전에 참가해 우선협상 대상자가 됐다. 주식 인수 비율은 건설이 51%(1118억원), 중공업이 49%(1080억원)지만, 중공업은 주식 인수와 별도로 고려산업개발이 발행하는 회사채 1166억원어치를 인수하기로 했다.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고려산업과 두산건설이 합병하면, 고려산업이 채권을 발행해 확보한 현금은 두산건설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두산그룹은 사실상 두산중공업의 자금만을 활용해 또 하나의 계열사를 인수한 것이 된다.

두산그룹은 고려산업개발과 합병에 대해 “정밀 실사를 한 결과 고려산업개발은 재무 상태로 볼 때는 정상화됐지만 영업적인 측면에서 굉장히 취약한 점이 나타났고, 사업구조의 불균형이 심화돼 있는 한편 잉여 인력이 많은 상태”라며 “앞으로 주택시장이 급격히 약화될 것으로 예상돼 독자 경영을 추진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특히 두산그룹은 두산건설이 현재 6조원 이상의 수주물량을 확보하고 있어 인력이 부족하므로, 두 회사의 합병은 고려산업개발의 잉여 인력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두산쪽이 고려산업을 인수하기 전 밝힌 것과는 크게 다르다.

두산그룹이 두 회사의 합병을 추진하는 이유는 두산건설의 재무구조가 나쁘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부채 비율이 35%에 불과한 고려산업개발을 활용해 두산건설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려는 것이다. 두산건설은 지난 1999년 말 232%이던 부채 비율이 2003년 3분기 현재 579%로 늘어나 있다. 건설회사 중 최근 3년 사이 부채 비율이 나빠진 곳은 두산건설과 SK건설 2곳뿐이다. 두산그룹 총수 일가는 그룹을 지배하는 데 최정점에 있는 두산건설에 문제가 생기면 그룹 지배권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조 “업무상 배임 책임 묻겠다”

두산그룹의 최대주주인 박용곤, 박용오씨의 지분은 (주)두산에 대한 지분 6%가 거의 전부다. 그런데도 박씨 일가는 계열사들을 동원해 핵심 계열사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 특히 두산건설은 (주)두산의 지분 26.7%를 가진 최대주주이며, (주)두산은 중공업(38%)·삼화왕관(44.6%)이 지배하고, 삼화왕관이 두산건설의 지분 12.88%를 갖는 방식으로 계열사들이 연결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두산그룹이 두산중공업의 자금을 이용해 고려산업개발을 인수한 뒤 두산건설과 합병시킨다면 대주주들은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모든 문제를 말끔히 해결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뛰어난 경영기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평가하기에는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두산건설과 고려산업개발의 합병은 고려산업개발 소액주주와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고려산업개발 김학진 노조위원장은 “두 회사의 합병은 자신의 경영부실에 대한 책임을 국민의 기업인 고려산업개발에 전가하는 것”이라며 “합병을 저지하기 위해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의 기업이라는 주장은 고려산업이 2001년 3월 부도를 맞고,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들의 지원으로 회생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노조는 두산그룹이 고려산업개발을 인수하기 위해 법원을 속였다며, 인수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한다. 두산은 입찰서에서 ‘고려산업개발을 향후 계속기업으로서 지속성장’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회사의 재무 건선성을 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두산은 지난 1월10일 회사 정리절차 종결 결정문이 나온 지 사흘 만인 1월13일 노사합동 특별회의를 소집해 “두산건설과 합병하겠다”고 노조에 통보했다. 노조는 이와 관련해 합병 무효 소송을 검토하고 있다.

노조는 고려산업개발 경영진이 합병 결정을 강행한다면 업무상 배임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도 하고 있다. 현재 고려산업개발의 경영진은 두산건설의 집행임원들로 채워져 있다. 노조쪽은 “두 회사의 합병으로 고려산업개발은 두산건설의 부채 1조1740억원(자본 2020억원)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며, 합병 회사의 재무구조가 불안정해진다”며 합병 결정은 회사에 해를 끼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두산그룹은 노조의 반발이 일자, 모든 임원들을 회사 자금으로 보험금 1억7800여만원짜리 임원배상책임보험에 가입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거래법 규정에 따라 산출했다고는 하나 두 회사의 합병 비율에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두산그룹은 고려산업개발과 두산건설의 합병 비율을 1 대 0.76으로 결정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가를 기준으로 산출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3분기 주당순자산을 따져보면 고려산업이 주당 2만7262원에 이르는 데 비해, 고려산업은 4202원에 불과하다. 시장에서 주식 가치가 높게 평가된 덕에 두산건설 주주들은 합병에서 매우 유리해졌다. 박씨 일가는 두산건설에 대해서는 지분이 많고, 고려산업개발에 대해서는 직접 지분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합병 비율로 득을 보는 것은 결국 박씨 일가다.

부실기업 합병으로 인한 동반 부실화라는 뼈아픈 경험이 있는 고려산업 노동자들은 회사 임원들을 고소하는 등 법적 수단을 다해 합병을 막겠다고 벼르고 있다. 고려산업개발은 지난 1998년 고려산업이 부실 회사인 현대알루미늄과 현대리바트를 억지로 떠맡았다가 2001년 부도를 냈다. 일부 소액주주들도 노조의 합병 반대 움직임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합병 비율로 이득보는 박씨 일가

하지만 주주총회 결의를 통해 합병을 막기는 쉽지 않다. 두산그룹은 고려산업개발의 지분 79%를 확보한 절대주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산이 결국 합병을 이뤄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도, 한때 여러 유명 브랜드를 가지고 국민의 성원을 받던 두산그룹이 이제 제조업보다는 돈놀이에 재미 붙인 ‘인수합병’(M&A) 전문그룹으로 전락해버렸다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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