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개성은 지금 초조하다

등록 2003-11-06 00:00 수정 2020-05-03 04:23

현대의 개성 시범공단 추진에 신중함으로 맞선 통일부… 7차 남북경추위에 관심 쏠려

“풀밭에 텐트 치고 발전기라도 가져가서 (가동)하는 게 어디 공단이냐. 그렇게 낭만적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캠핑가는 게 아니지 않느냐.”

“진척 없이 삽질만 하나”

정세현 통일부 장관이 10월23일 정례 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현대아산(사장 김윤규)과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회장 김영수·이하 중기협)가 개성공단 진출을 서두르면서 자체 발전기라도 가져가 1만평 넓이의 ‘시범공단’을 우선 만들겠다고 나서자 이렇게 밝혔다. 그는 “(대북사업은) 기분으로 하는 게 아니다. 현대나 중기협 모두 돈이 없지 않느냐”며 자체 시범공단 추진에 제동을 걸었다.

사실 정 장관의 처신이 ‘정도’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현재 현대아산이 공단 800만평, 배후지 1200만평 등 모두 2천만평에 대한 사업권을 갖고 시공을 맡고 있으나, 1단계 사업 100만평에 대해서는 한국토지공사(사장 김진호·이하 토지공사)가 자금 조달을 비롯해 설계, 감리, 분양 구실을 하게 돼 있다. 토지공사쪽은 “개성공단에 정부의 돈이 투입되는데 어떻게 개인기업이 마음대로 하도록 놔둘 수 있느냐”며 “개인기업이 사업을 주도하는 거라면 국가가 굳이 돈을 댈 필요가 없다”는 태도다. 그래서 통일부·토지공사를 한 축으로 현대아산·중기협을 다른 축으로 해 예전에 볼 수 없던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현대아산은 최근 1단계 사업 100만평 바깥에 또 다른 1만평 시범공단 조성과 관련한 대북 협력사업 신청서를 정식으로 통일부에 냈다. 현대아산이 바짝 서두르는 까닭은 북한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서다. 북한 당국은 개성공단 안 군사시설까지 다 옮기고 행정구역을 바꿔 개성직할시 안 2천만평의 터를 확보하는 등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매우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초 공단 입주 시기가 2007년으로 잡혀 있음을 감안하면 하루가 급한 북한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현대아산 관계자는 “남쪽 사람들이 오기는 많이 오는데 개성 관광이나 하고, 정작 개성공단 공사는 큰 진척 없이 삽질만 하는 모습을 보니 분통이 터지는 모양”이라며 “신중한 접근도 필요하나, 이대로 가다간 북한 내 대남 협력파들의 입지가 크게 좁아질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정부도 이런 사정을 잘 안다. 정세현 장관은 10월23일 “북한이 개성공단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분명하다”며 “북측이 계속 조사만 하고 실제로 행위가 이뤄지지 않는데 무슨 관광이냐고 불만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따라서 정부도 북한의 이런 사정을 감안해 나름의 대안을 내놓고 있다. 개성공단 사업의 모멘텀 유지와 중소기업의 요청 등을 고려해 공단 완공에 앞서 시범단지의 우선 조성을 검토 중이다. 공단지역을 나눠 순차적으로 조기 완공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구체적 안은 김진호 토지공사 사장의 10월17일 기자간담회를 통해서 나왔다. 김 사장은 “내년 상반기 착공과 같은 해 11월 분양을 목표로 1단계 100만평 터 안에 시범단지 1만평을 우선 조성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더 이상 현대에 끌려가지 않겠다?

하지만 현대아산쪽은 이 일정도 늦다고 불평하고 있다. 중기협과 손잡고 100만평 터 밖에서 독자적으로 1만평을 조성해 몇개 기업이라도 입주시키겠다고 통일부에 사업신청을 낸 배경이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10월29일 국회 건설교통위원회에서 열린 정책간담회에 나가 “개성공단 1차 조성지역 100만평 이외에도 1만평을 시범단지로 가꿔 중소기업 등 희망업체를 우선 입주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대아산은 애초 단 몇개 기업이라도 시범적으로 공단에 입주시켜 기계를 돌리기 시작하면 개성 1일 관광도 병행해 수익을 낸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가 미적거리자 중기협과 함께 강공책을 쓰기 시작한 셈이다. “적지 않은 중소기업들이 개성공단 진출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사실 이는 생존권의 문제와 직결돼 있습니다. 국내에서의 사업은 고임금으로 엄두도 못 내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주는 임금도 예전과 다릅니다. 중국 진출도 갈수록 메리트가 없어지고 있어요. 이제 살길은 북한밖에 없지요. 물론 아직은 핵문제 등 불투명 요소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기대를 걸 만한 요소가 많습니다.” 중기협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대아산쪽에 따르면 개성공단 입주희망 신청서를 낸 기업은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1천개를 넘고 있다. 개성공단은 서울에서 한 시간도 채 안 걸리는데다, 언어소통이 가능하며, 임금이 저렴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분양가 등 아직 완전히 매듭짓지 못한 현안이 있긴 하나 이 문제도 조만간 타협에 이를 것으로 알려졌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은 10월29일 “북쪽과의 추가 협상 결과 개성공단 터에 대한 임차료는 면제하고 다만 공단 안 농작물과 가옥 등에 대해서만 상징적 수준의 보상을 해주는 쪽으로 협의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럴 경우 분양가는 크게 낮아지게 된다. 현대아산과 북한은 월 임금 57.5달러, 연간 임금상승 상한선 5%, 다양한 세금혜택 등은 이미 합의한 바 있다. 이런 호조건 탓에 개성공단 입주를 희망하는 중소기업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2007년으로 예정된 입주 시기가 너무 늦다며 조기 입주를 재촉하고 있다. 중기협이 가만히 앉아 속수무책으로 지켜볼 수만은 없는 배경이다.

통일부는 현대아산과 중기협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이들의 ‘공세’가 영 부담스럽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입장은 확고해 보인다. 토공이 개성공단 개발 책임자이기 때문에 토공 중심으로 공단 기반시설을 착실히 지원해 나가면서 혼선을 배제하겠다는 태도다. 다르게 표현하면 정부가 현대아산이 주도하는 페이스대로 따라가지는 않겠다는 뜻이 내포돼 있는 것 같다. 현대아산의 부족한 자금력를 탓하면서, 속내는 과거처럼 현대아산에 질질 끌려가지 않겠다는 의도를 보이고 있는 셈이다.

정부 핵심 관계자는 “현대아산이 나서면 나설수록 오히려 손해를 볼 것”이라며 자제를 호소하기도 했다. 정부의 고민은 금강산관광-개성공단-경의선 철도·도로 연결 등 3대 경협사업이 현대아산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데 있다. 이는 현대아산이 좋으나 싫으나 3대 경협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매달고 가야 한다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는 셈이다. 또 이는 소수정권의 한계와도 무관치 않다. 현대아산과 지나치게 밀착해 대북사업을 벌여나갈 경우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더 큰 그림을 망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따라서 앞으로도 한동안 정부-현대 관계는 적절한 갈등과 협력의 병존이 불가피해 보인다.

북한, 거센 압박 가할 듯

마침 제7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11월5일부터 나흘간 평양에서 열린다. 최대 관심사는 북한이 개성공단과 관련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다. 얼마 전 끝난 12차 장관급 회담에서도 북한은 개성공단 사업이 지지부진하다며 남쪽 당국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강하게 요구한 바 있다. 이번 경추위에서는 개성공단 장기 체류자의 신변안전 보장을 뼈대로 한 통행합의서의 타결 여부가 특히 주목거리다.

남쪽은 공단이 특구에 걸맞게 공단에 장기 체류하는 남쪽 사람들 신변보장도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고, 북한은 공단지역이 자국 영토인 만큼 자국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은 현대아산과 중기협이 추진하고 있는 1만평 시범공단 사업에 대한 남쪽 당국의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거센 압박을 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임을출 기자 chul@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