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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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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를 노리는 우주방사선

등록 2006-08-03 00:00 수정 2020-05-03 04:24

국내항공사 북극항로 취항으로 불거진 승무원들의 방사선 피폭 논란…이제라도 체계적인 방사선량 계측 체계와 피폭 관리 시스템 도입해야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현재 국제선을 주로 운항하는 조종사 정아무개씨는 치아 염증이 자주 생긴다. 문제는 틈만 나면 치과에 드나들어도 쉽게 낫지 않는 데 있었다. 불규칙한 비행 스케줄로 기내에서 양치질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정씨는 치아 관리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도 치아 염증은 지속적으로 정씨를 괴롭혔다.

아무리 양치질을 잘하며 치아 관리에 신경을 써도 수그러들지 않는 치아 염증. 아무리 돌이켜 생각을 해봐도 염증의 원인은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정씨는 치아 염증의 원인이 ‘우주 방사선’(Cosmic Radiation)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이제야 외국 조종사들 이해하겠다”

지금으로선 정씨의 골머리를 썩히는 치아 염증 원인을 단정하기 힘들다. 다만 정씨가 항공 조종사이기에 상대적으로 많은 방사선량에 노출돼 세포 파괴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한양대학교 이재기 교수(원자력공학)팀이 발표한 ‘비행고도에서 우주선에 의한 피폭선량 평가’에 관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항공승무원의 연간 평균 방사선량은 조종사가 2.96mSv(밀리 시버트·Sv는 인체에 흡수된 방사선의 양을 측정하는 단위), 객실 승무원이 2.28mSv로 나타났다. 여기에 자연계로부터 연간 평균 2.4mSv의 자연 방사선을 받는 것을 합하면 정씨는 연간 5.36mSV의 방사선에 노출된 셈이다.

사실 우주 만물은 방사선에 노출돼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항성이나 초신성이 폭발할 때 생기는 잔존물에서 비롯되는 우주 방사선이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 우주 방사선은 지구 대기권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소멸되거나 낮은 에너지를 품은 채 지상을 향하게 된다. 또 질병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의료용 방사선이 널리 쓰이기도 한다. 건강검진 과정에서 엑스레이(X-ray)로 가슴 촬영을 한 번 하면 0.5~1mSv를, 복부 CT 촬영은 1~5mSv, 위 투시촬영은 5~10mSv를 받는다. 만일 항암 치료를 위해 방사선을 이용하면 부위에 따라 5만~12만mSv의 방사선을 쪼여야 한다.

누구나 일상적으로 방사선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정씨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40대를 넘어서면서 해마다 두 번씩 가슴 촬영을 하면서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데 필요한 것이라 생각했다. 가슴 촬영만으로 2mSv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자신이 해마다 방사선에 노출되는 총량을 계산해야 할 이유도 알지 못했다. “한마디로 우주 방사선이라는 개념을 파악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장거리 항공승무원이 백혈병이나 피부암 등에 걸릴 위험이 높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내 문제로 여기지 못한 것 같다. 두 해 전 국제조종사협회에서 우주 방사선에 대한 경고가 있었는데 이를 제대로 검토하지도 못했다.”

그토록 우주 방사선에 둔감했던 정씨가 여객기 조종석에 앉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국내항송사들이 운항시간을 줄이고 항공유를 아끼려고 ‘북극항로’(Polar Route)를 취항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북극항로 취항 계획이 발표되자 몇몇 외국인 조종사들이 이를 우려하는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고위도의 극지방을 높은 고도에서 비행하면 우주 방사선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때에야 외국인 조종사들이 건강검진 때 엑스레이 촬영을 거부하고 고도 비행 시간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일이 떠올랐다. 그들은 방사선에 노출되는 정도를 파악해 ‘건강권’을 내세웠던 것이다.

새롭게 북극항로가 떠오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뉴욕이나 시카고, 애틀랜타 등 미국 중동부 지역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여객기가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운항 거리가 짧아져 비행 시간이 30분 안팎 줄어든다. 북극항로의 이점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예컨대 747-400기의 경우 동절기에 캄차카 항로를 이용할 때 상층풍 영향으로 운항시간이 길어진다. 이로 인해 항공유 소모가 많아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항공유가 ‘이륙 중량’을 제한해 탑승할 수 있는 유상승객 수를 줄이는 것이다. 이때 북극항로는 30분 단축을 통해 일거다득의 효과를 낸다. 항공유가 차지하는 1만1천 파운드(4980kg) 대신 유상승객을 50여 명까지 추가로 태울 수 있다. 북극항로가 황금알을 낳는 셈이다.

극지방 방사선량, 적도의 2~5배

이런 고유가 탈출을 위한 대한항공의 북극항로 취항 계획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하반기 ‘북극항로 태스크팀’을 가동해 본격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건설교통부의 북극항로 승인에도 걸림돌이 없었다. 건설교통부는 북극항로 취항 관련 지침을 통해 항공유 결빙이나 자기장 문제, 응급상황 대비책으로 비상공항 확보 등 기술적 문제를 주로 거론했다. 우주 방사능에 관한 언급이 있었지만 방사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교육할 것을 권고하는 데 그쳤다. 게다가 건설교통부가 러시아 쪽과 지난 6월 항공회담을 열어 북극항로 이용에 합의해 8월 초 취항이 눈앞의 일로 다가오는 듯했다.

이즈음 대한항공은 북극항로 취항 관련 방사선 방호 교육을 실시했다. 그런데 북극항로 취항에 따른 방사선량 평가나 방사선 피폭 관리 프로그램, 정보 제공 등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방사선에 관한 일반적인 내용으로 “방사선은 안전하다”는 식의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도 객실 승무원에 대해서는 사이버 교육으로 대신했다. 한 객실 승무원은 이렇게 말했다. “북극항로를 취항해도 극히 미량이므로 인체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기존 항로에서도 방사선에 노출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몰랐기에 가임기 여성들은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제라도 적절한 기준치를 세워 방사선 피폭을 관리해야 한다.”

그렇다면 북극항로는 우주 방사선의 위험지대로서 피해야만 하는 것일까. 현재 미국과 아시아 지역의 유니이티드·에어캐나다·에어차이나·캐세이패시픽 등 8개 항공사가 북극항로를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항공사가 북극항로를 취항하는 것은 미 연방항공청(FAA)이 제시한 방사선량에 근거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북극항로를 이용한 토론토∼홍콩 구간 방사선 조사량은 0.07mSv로 기존 미주 노선에 운영하는 캄차카 항로나 북태평양 항로 등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여기에 FAA가 제안하는 방사선 관리 연간 기준치 20mSv를 적용하면 북극항로 취항에 따른 위험은 쓸데없는 걱정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북극항로의 우주 방사선 노출 수치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기엔 이르다. 한국원자력연구소 방사선이용연구부 이주원 박사는 “북극권은 지구 자전에 의해 대기권층이 얇아져 우주 방사선 노출량이 저위도보다 많은 게 사실이다. 극지방 대기권은 방사선의 에너지가 저위도보다 크지만 인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국제항공조종사조직연맹(IFALPA) 휴먼퍼포먼스위원회가 지난해 10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같은 고도일지라도 적도지방과 극지방의 방사선량의 차이가 무려 5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표 참조).

이처럼 북극항로 이용에 따른 방사선량의 수치가 크게 엇갈리면서 대한항공 노사의 이해가 맞서고 있다. 대한항공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 “FAA가 안전성을 검증한 노선으로 위도에 따른 방사선량의 차이도 거의 없다. 오히려 비행 시간을 단축해 수치를 줄일 수도 있다. 조종사들이 월평균 6회씩 비행해도 연간 방사선량은 FAA 기준치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대한항공 조종사노조 홍인수 사무국장은 “북극항로 운항에 앞서 승무원들이 안전성을 확인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방사능의 잠재적 위험을 고민하지 않도록 방사선량 기준치를 유럽 기준에 맞추고 구체적인 관리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임기 여성 승무원 대책 세워야

이미 유럽은 연간 방사선량을 6mSv로 제한하는 법률을 적용하고 있다. 만일 승무원이 6mSv 이상의 방사능에 노출되면 자료를 보관하고 의학적 추적조사를 받아야 한다. 이에 따라 영국의 버진에어는 근무표를 작성할 때 6mSv 이상의 방사선량에 이르지 않도록 하고, 독일의 루프트한자는 월별 방사선량을 파악해 독일 항공국에 제출하고 있다. 특히 임산부는 1mSv마저도 태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에 지상근무를 원칙으로 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북극항로를 취항하는 것으로 알려진 캐세이패시픽도 지난 2002년부터 유럽 기준을 받아들여 자연방사능 노출 기준(2mSv)를 포함해 연간 기준치를 6mSv로 정하고 있다.

현재 국제방사선방호위원회(ICRP)는 비행승무원을 방사능 피폭 직업군으로 분류하고 있다. 특이한 사실은 ICRP가 권고하는 방사선량 기준치가 근래 들어 크게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1950년에 150mSv였던 피폭 직업군 대상 연간 방사선량 기준치가 1990년에 20mSv로 바뀐 것이다. 이는 우주 방사선에 노출되는 수치가 높을수록 암과 백혈병, 유전적 변이 등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원전 종사자나 항공승무원 등은 다중 선원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기에 특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유럽 각국의 항공사들이 승무원에게 방사능 피폭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쨌든 비행승무원이 일반인보다 방사능에 노출되는 시간과 양이 많은 게 사실이다. 설령 북극항로의 방사선량이 기존 노선에 견줘 높은 수치가 아니라 할지라도 비행승무원이나 상용고객은 다중 선원 노출을 고려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한양대학교 이재기 교수는 “고위도 지방으로 갈수록, 태양 활동이 약할수록 방사선량이 많아진다. 해외여행의 빈도가 많아지는 상황에서 체계적인 방사선량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특히 비행고도의 우주 방사선은 생물학적 손상에 관련된 ‘선형에너지전이’(LET·linear Energy Transfer) 방사선이 상대적으로 많은 만큼 가임기 여성 승무원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주 방사선을 떠올리며 비행기 탑승을 보류할 일은 아니다. 매달 북극항로로 미국 중동부 지역에 다녀온다 해도 연간 방사선량은 유럽 기준치에 미치지 않는다. 게다가 북극항로 취항 계획을 세우는 대한항공은 미국 해양대기관리청(NOAA)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방사선 조사량을 사전에 측정해 고위험 상황일 때는 고도를 낮추거나 항로를 바꾸는 식으로 위험을 회피할 예정이다. 만일 승무원이나 승객이 비행 간 우주 방사선에 의한 누적 선량을 확인하고 싶다면 ‘CARI-6’(jag.cami.jccbi.gov/cariprofile.asp)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 비행 시간과 고도, 위도 등에 따른 노선별 피폭량을 확인할 수도 있다.

‘막연한 공포’를 제거하라

그동안 여객기를 이용한 사람들은 우주 방사선에 알게 모르게 노출됐다. 우주 방사선 피폭량이 인체에 악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체계적인 피폭 관리 시스템을 서둘러 도입해야 할 것이다. 이는 항공사만의 과제가 아니다. 독일처럼 항공승무원의 방사선량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려면 법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예컨대 건교부나 보건복지부 차원에서 우주 방사선량 계측 체계를 수립하고 승무원과 상용승객의 방사선량을 관리하도록 하는 법률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주 방사선량 관리는 잠재적 위험을 확대하기보다는 조종대에 앉아 있어야 하는 정씨가 느끼는 ‘막연한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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