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과학연구소를 기초과학 산실로 만든 프랑스의 제도적 실험
과학자 주도로 ‘연구원의 공무원화’ 이뤄 안정적 연구기반 조성
황우석 사태 관련 검찰 수사가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다. 이번 사태의 원인에 대해 다양한 해석도 나오고 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한국 과학기술 연구의 허약한 구조가 사태를 키웠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더 이상 죽어가는 기초과학을 방치한다면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가운데 프랑스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김준형씨가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의 과학기술 연구 시스템’에 관한 자료를 <한겨레21>에 보내왔다. 이를 토대로 국립과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전개된 프랑스 기초과학의 어제와 오늘을 재구성했다. 편집자
▣ 정리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해마다 7월14일 프랑스 혁명기념일에 파리의 개선문과 콩코드 광장 사이에서 펼쳐지는 군사 퍼레이드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린다. 전투기들이 파리 상공을 가르는 가운데 군복 차림의 젊은이들이 행진하는 모습은 보는 이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이날 퍼레이드의 최선두에서 행진하는 이들은 놀랍게도 사관학교 생도나 직업 군인들이 아니다. 바로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Ecole Normale Superieure)와 함께 대표적인 이공계 그랑제꼴인 국방부 소속 국립공과대학 에콜 폴리테크니크(Ecole Polytechnique) 학생들이다. 과학 교육을 통해 사회 지도층을 양성하는 에콜 폴리테크니크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기대와 성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미와 다른 중앙집권적 체계 산물
이처럼 프랑스는 과학기술 교육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속열차 테제베(TGV)나 항공기 ‘에어버스’, 아리안 우주발사대 등을 개발한 저력이 여기에 있다. 물론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프랑스 과학 연구의 본산 구실을 하는 국립과학연구원(CNRS·원장 카트린 브레쉬냑)의 역사는 기초과학 육성을 위한 험난한 여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오늘의 CNRS가 있기까지 프랑스에서는 ‘한 국가의 과학과 기술은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가’ ‘과학기술자는 시장을 벗어날 수 없는가’를 화두로 제도적 실험을 해왔다. 이 과정에서 CNRS라는 기초과학의 든든한 버팀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난 2004년부터 프랑스는 과학 연구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진통을 겪었다. 정부의 연구비 지원 규모와 방법이 대표적인 논란거리였다. 정부 부처인 교육대학과학부가 해마다 20억유로로 책정한 연구비의 직접적인 수혜 대상에서 벗어난 프랑스 전역의 82개 대학은 독자적 연구체계를 수립하겠다며 추가 재정 지원을 요구했고,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국립과학연구청(ANR)이 과학 연구의 칼자루를 쥐게 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이 과정에서 연구원들이 ‘(과학) 연구를 구하자’(Sauvons la recherche!)는 단체를 한시적으로 결성해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CNRS도 예외는 아니어서 직제 개편을 놓고 내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현재 CNRS는 유럽 최대 규모의 기초과학 연구소로 평가받는다. 올해 연구비 예산이 2억3700만달러로 지난해에 비해 3.4% 상승했다. 모두 2만6천 명(연구직 1만1600명 포함)이 파리와 18개의 지방 분원 등지에서 근무하며 1260여 개의 소규모 연구팀을 구성하고 있다. 산학 협동에 바탕한 영미식 과학기술 풍토와 달리 전통적인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의 흐름을 따르는 셈이다. 이를 통해 ‘과학의 시장화’ 여파로 기초과학 연구원의 지위가 흔들리는 사태를 막는다. 만일 과학의 시장화가 대세였다면 연구팀이 과제의 85% 이상을 대학이나 다른 연구소 등과 협력하는 ‘개방형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기초과학에 뿌리를 둔 CNRS는 핵·미립자 물리학(PNC), 물리학·수학(SPM), 정보·통신의 과학기술(STIC), 공학수학(SPI), 화학(SC), 우주과학(SDU), 생명과학(SDV), 인간·사회과학(SHS) 등 8개의 대단위 연구분과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핵물리·양자물리국립연구소(IN2P3)와 우주과학 국립연구소(INSU) 등 두 개의 산하 연구소가 있다. 수십 개의 유럽 연구팀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면서 해외 연구소 설립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한국과의 교류도 빠지지 않는다. 생명공학 분야 연구를 위해 한국생명공학연구원과 함께 국제공동연구실을 마련하기로 한 데 이어, 올해에는 전라남도와 협력해 핵물리학연구센터를 세우기로 했다.
끝없는 사회적 합의가 계속됐다
CNRS는 과학 연구의 ‘허브’ 구실을 하면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4181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기업과 2800여 건의 산업 계약을 체결했다. 최근 7년 동안 CNRS 연구원들은 100여 개의 벤처기업을 창업하기도 했다. 기초과학 연구가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은 ‘학제 간 연구’가 활발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요즘 CNRS가 중점적인 학제 간 연구과제로 설정한 것은 생물과 그 사회적 역할, 정보·통신·지식, 환경과 에너지의 지속 가능 발전, 나노과학·나노기술·물질, 천체입자: 입자에서 우주로 등 5개의 테마다. 에너지 세부 연구에는 우리 고유의 난방인 ‘온돌’도 포함돼 있다.
여전히 CNRS는 기초과학 연구를 디딤돌로 삼아 첨단과학을 일구고 있다. 여기엔 오래된 전통에 기반한 ‘역할 분담’이 밑거름으로 작용한다. 일반 대학과 그랑제콜이 교육을 전담한다면 CNRS는 박사과정 이후의 연구원들이 교직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국가공무원 신분으로 연구활동에 매진하는 구조다. 그러면서도 교육과 연구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거대한 투자가 필수적인 기초과학은 정부 차원에서 중앙집권적으로 CNRS를 지원하면서 대학 연구팀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프랑스 대학들이 독자적 연구체계를 주장하다 한 걸음 물러선 것은 연구의 질로 CNRS를 비롯한 공공연구기관에 맞서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가 작용했다.
이렇게 프랑스 과학기술을 대표하는 CNRS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국가기관이 아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장 페렝이 지난 1939년에 CNRS를 창립한 것은 40여 년 동안의 사회적 토론과 제도적 실험의 결과였다. 예컨대 1901년에 설립된 ‘과학연구기금’은 연구자금 보조를 위한 공조직 구실을 했고, 1930년에 창설된 ‘국가과학기금’은 대학에 자리잡지 못한 젊은 연구자들을 고용해 연구비를 지원하는 데 쓰였다. 게다가 통계학자 출신의 교육부 장관 에밀 보렐의 제안으로 노동자들의 월급에서 ‘연구소 세금’(1924)을 거둬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하는 방안도 마련됐다.
기초과학 육성을 위한 사회적 합의는 끝없이 지속됐다. 1930년대 들어 과학연구고등회의(1933)가 구성돼 기초과학 연구와 관련된 기관들을 통제할 수 있었고, 산하에 과학연구국가기금(1935)을 만들어 각종 연구기금을 일원화했다. 1937년 만국박람회가 열렸을 때 장 페렝의 제안으로 ‘(과학) 발견의 궁전’이 건설되면서 연구자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토론을 활발히 벌인 뒤, 국립응용과학연구소(1938)가 설립돼 국가 연구기관 일원화의 토대를 다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CNRS는 연구 환경의 현대화와 연구원의 독립성을 축으로 삼아 ‘연구원의 공무원화’의 결실을 보게 됐다.
연구원의 신분을 공무원으로 규정
CNRS는 창립 뒤에도 몇 차례의 구조조정으로 조직을 혁신했다. 주로 연구원의 지위와 연구소의 구실에 관한 것이었다. 우선 연구원의 신분을 ‘과학 연구에 참여하는 공무원’으로 규정해(1959) 안정된 지위를 갖게 했으며, ‘CNRS-대학 협정’(1966)으로 기관 독립성을 강화하면서 자체적으로 대학의 개별 연구소를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CNRS에 속한 연구원의 지위가 보장되면서 사회적 책임도 강화돼왔다. 기존의 기초과학 연구를 기본으로 하면서 국내·국제적 과학 동향의 분석 임무(1982)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정부가 연구자를 대우하면서 국가주의 과학의 테두리에 가둔 셈이다.
그렇다고 프랑스의 CNRS로 상징되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주의 과학을 몰아세울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중앙집권적인 구조는 어디에나 있다. 미국만 해도 국립과학재단(NSF)을 비롯해 숱하게 많은 국립연구소가 있고, 독일도 막스프랑크연구협회나 헬름홀츠연구협회 등에 ‘국립’이라는 꼬리표가 달리지 않았지만 정부의 과학정책을 따르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시장의 압력’에 견딜 수 있는 ‘자율적인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국내에서 성급한 시장 논리에 죽어가는 기초과학을 살리려는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것을 미룬다면 ‘또 다른 황우석’을 통해 과학의 죽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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