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가 수준을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 최근 한국의 IT 마니아 주목해야
▣ 김동광/ 과학저술가 · 고려대 강사
마니아(mania)는 분명하게 정립된 개념은 아니지만 ‘열광주의자’ ‘광’(狂) 등의 의미로 널리 사용돼온 용어이다. 넓은 의미에서 마니아는 최근에 와서 새롭게 부상되는 현상이라기보다는 폭넓은 분야에서 오랜 역사에 걸쳐 이미 존재해왔다고 보는 편이 옳다. 실제로 음악이나 미술 등 특정한 문화적 영역이나 등산·오락 등 취미활동, 그리고 특정 기종의 오토바이 이용자 그룹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마니아 집단이 부침을 거듭해왔다. 그렇지만 최근에 와서 마니아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우리 사회의 중요한 집단으로 부상하게 된 데에는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특성들이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마니아는 단순한 애호가보다 좀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특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즐기는 취미나 애호 차원을 넘어서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해서 직접 연구를 하거나 개작 또는 제작을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지식이나 인공물에 대해서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소비자에 머물지 않고 해당 지식이나 그 산물의 생산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전문가와 거의 대등한 수준의 활동
애호가에서 마니아로의 전환이 비교적 용이해진 데에는 우선 경제적인 여유를 꼽을 수 있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은 기본 전제이다. 둘째는 지식과 정보, 간단한 장비나 부품들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이다. 특히 인터넷의 발전으로 집단 형성과 소통이 쉬워진 것은 마니아들의 활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셋째는 소비자들의 위상 변화이다. 이것은 마니아의 개념이 적극적 사용자(power user) 또는 개척적 사용자(early adapter) 등으로까지 확장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확산된 디지털 카메라와 노트북 컴퓨터 동호회 등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힘입어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도 아마추어 천문·곤충채집·모형항공기·과학소설(SF) 등 다양한 영역에서 많은 집단들이 활동을 벌여왔다. 이들의 활동 스펙트럼 역시 다양해서 단순한 취미활동이나 동호회에서 스스로 전문 지식을 습득하면서 거의 전문가들과 대등한 수준의 활동을 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년 전에 아마추어 천문가가 새로운 소행성을 발견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마니아는 그 나라의 과학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최근 과학문화 연구자나 과학기술 정책 수립자들도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마니아는 밑으로부터의 자발적인 문화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과학문화의 뿌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오다쿠’(おたく)라 불리는 마니아들은 집요하리만큼 철저하게 한 분야를 파고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부 마니아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과 거의 대등한 수준의 지식이나 전문성을 획득하기도 하며 천문·곤충·철도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두터운 층이 형성돼 있다. 한 예로 철도 마니아들은 철도 사진을 찍기 위해 직접 그 나라를 방문한다. 우리나라의 협궤 열차에 대한 자료가 국내보다 훨씬 많은 정도이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이 신약 개발의 지평을 연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다나카’에서도 표출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와 70년대에 활동했던 해커(hacker)들은 개인용 컴퓨터와 프로그램, 게임의 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요즈음에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변질된 ‘해킹’이란 말은 원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사용되던 학생들의 은어로, 실제 소용없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뜻한다. 차고에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 II를 만든 스티븐 워즈니악과 스티브 잡스도 ‘홈브루 클럽’이라는 해커들의 동호회에서 의견 수렴을 하면서 최초의 애플 II 설계를 완성했다. ‘홈브루’란 집에서 만든 술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마니아들은 대개 ‘차고’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차고는 자작(DIY)을 위한 작업장이며, 대개 웬만한 도구와 설비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특성은 SF이다. 미국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 중에서 성장 과정에 차고와 SF의 경험을 갖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아이작 아시모프로 대표되는 미국의 SF는 1950년대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기술적 낙관주의와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가 미국 과학문화의 주요 특성으로 자리잡은 것도 이 시기였다. 따라서 미국의 과학문화는 해커와 같은 컴퓨터 마니아들과 SF 마니아들의 합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도 이러한 문화적 전통은 미국의 과학을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이다.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마니아층이 매우 미약하고 그 전통도 거의 부재한 형편이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자생적 활동이나 문화로 형성되지 못하고, 해방 이후 일방적으로 수입됐고, 박정희 전 대통령 이래 오로지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수단이자 도구로 인식하는 경제주의적 관점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73년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창한 이른바 ‘전국민 과학화 운동’은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과학기술자들과 국민들을 총동원하는 국가적 기획이었고, 이후 과학대중화 정책의 근간을 이루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도전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대중들은 오로지 국가 차원에서 시행되는 과학기술 정책을 받아들이고 지원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간주됐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아마추어 천문 등 여러 분야에서 싹이 형성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과학실험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동해온 ‘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과 같은 과학교사들의 자발적인 모임과 지난해 결성된 전국과학교사협회는 그 의미가 매우 크다.
IT '고수'들의 조언 들을 수 있다
최근 관심을 끄는 중요한 경향은 정보기술(IT)과 연관된 사용자 모임의 활성화이다. 디지털 카메라와 노트북 컴퓨터의 경우, 사용자 동호회를 넘어서 상당 부분이 마니아 그룹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IT에서 두드러진 까닭은 IT 자체가 사용자와의 피드백이 빠른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필수품 목록에 오른 지 오래된 디지털 카메라는 ‘디시인사이드’, 최근 보급형 모델의 증가로 이용자층이 대학생으로까지 급격히 확산된 노트북 컴퓨터는 ‘노트북인사이드’가 가장 활발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특정 제조사나 기종별로 모임이 분화되기도 하는데, ‘아이비엠매니아닷컴’은 IBM의 싱크패드 노트북 이용자들의 동호회로 이른바 파워유저들이 가장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또 ‘노트기어’라는 사이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나오는 새로운 기종에 대한 수준 높고 적절한 리뷰(평)을 제공해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이러한 사이트들은 일반인들이 제품 정보를 얻고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급격히 부상하고 있다. 특히 ‘사용기’는 일반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동료평가’(peer review)의 장이다. 이 때문에 주요 제조업체들은 이러한 마니아 사이트를 예의주시하고, 사용자들의 평가를 후속 모델 설계의 근거로 활용한다. 그러다 보니 부작용도 있어서 일부 업체들은 아르바이트(알바)를 고용해서 유명 사이트에서 타사 제품을 헐뜯고 자사 제품의 이미지를 조작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폐인’이라고 부르면서 홀로 실력을 연마해서 이른바 ‘고수’로 인정받는 전문가급 사용자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자발적으로 초보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모습은 과학문화의 전통이 미약한 우리의 상황에서는 과학기술 문화의 새로운 움직임을 이끌어낼 하나의 맹아로 평가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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