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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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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예술을 창조한다

등록 2004-04-30 00:00 수정 2020-05-03 04:23

예술의 ‘부속품’ 위치를 뛰어 넘어 소프트웨어 등이 창조하는 독자적인 미적 세계를 구축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지난 4월22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관객들은 첨단기술과 예술의 ‘환상적 만남’을 체험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같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신비로운 영상이 4차원 연극 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연기자들은 무대에 쉴 틈 없이 등장하는 홀로그램과 더불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연기를 보여줬다. 때로는 자신의 영상 이미지와 함께 춤을 추면서 빛으로 만든 철창에 갇히기도 하며 순식간에 가상의 이미지로 바뀐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테크놀로지의 놀라운 성취는 새로운 예술 장르를 개척하기에 충분할 것으로 여겨졌다. 현실과 환각의 경계에서 관객들은 마치 최면 상태에 빠져 주술사의 주문에 따르는 것처럼 첨단기술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그리스 신화부터 키네틱 아트까지

‘아니마’는 라틴어로 ‘영혼’ 또는 ‘생명’이란 뜻으로 인류의 역사를 테크놀로지를 통해 재창조한다는 의미에서 붙은 작품 이름이다. 공연은 연극과 춤, 음악 등이 어우러지는데 그 중심에 테크놀로지가 자리잡고 있다. 테크놀로지는 무대 예술과 영상 이미지를 엮고 장르의 벽을 넘는 도구로 쓰이면서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적 성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보았던 멀티미디어가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연극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다. 관객들은 공연시간 내내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되뇔 수밖에 없다. 의 연출가 미셸 르미유는 “나에게 기술이란 화가의 붓 같은 것이다. 붓이 어떻게 움직였는가가 아니라 그 결과 드러난 색상과 조형이 중요하듯 나의 예술에서도 기술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학과 예술은 어떻게 만났을까. 멀리는 그리스 신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못생긴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의 결혼은 상징적 의미의 만남이라 하겠다. 20세기 들어 과학과 예술은 구체적인 접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1905년)만 해도 한 시점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본 모습을 한 면에 중첩해 그리는 피카소의 ‘큐비즘’(Cubism)에 적지 않게 기대었다. 미술에서 발견한 기하학이 물리학에서 4차원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통찰로 이어졌던 것이다. 과학기술의 세례를 받은 대표적인 예로는 근대에 대한 숭배와 기술적 역동성을 표방한 미래파와 과학기술의 힘으로 구시대의 억압에서 벗어나려 했던 러시아 구성주의, 공업문명 시대의 디자인 미술운동을 펼쳤던 바우하우스 등을 꼽을 수 있다.

20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기계미학에 확신을 가진 전위 예술가들이 폭넓게 활동하기도 했다. 전자음악이라는 장르가 생겨나고 네온을 이용해 작품을 만드는 ‘라이트 아트’, 영상기술의 발달에 따라 ‘비디오 아트’ ‘홀로그래피 아트’ 등이 속속 나오면서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만남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들은 작품 자체가 움직이거나 움직이는 부분이 조립되는 ‘키네틱 아트’(Kinetic Art)를 형성했다. 빛·움직임·소리 등의 전통적 구성에 물·안개·연기·불 등을 더하는 생태학적 키네틱도 나왔다. 1980년대에 성행한 디스코 클럽의 라이트쇼 등도 키네틱 아트의 맥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바일이나 위성항법장치(GPS) 등의 신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만남이 이뤄지기도 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휴대전화나 웹사이트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면 그 내용이 거리에 설치된 박스에 디스플레이되는 식이다.

이제 과학기술은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과학이 예술가의 창조성을 넘보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에 등장한 ‘컴퓨터 예술’(computer art)에서 컴퓨터는 화가들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사용자가 조작하는 대로 이미지를 변형하는 데 컴퓨터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컴퓨터에 소프트웨어적으로 자율성을 부가하면서 예술적 자질을 선보이게 됐다. 미국 UC샌디에이고 해럴드 코헨 교수가 1973년에 개발한 ‘아론’(aaron)이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은 기계장치를 이용해 사람이 없어도 손으로 그린 듯한 그림을 그린다. 초기에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추상적 이미지를 그렸지만 요즘에는 구체성을 획득해 세밀한 표정까지 묘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컴퓨터가 소프트웨어로 심미안을 키워 예술가의 자질을 발휘하는 셈이다. 아론의 작품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국제전에도 초대받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프로그램된 결과’일 뿐이었다.

최근 컴퓨터는 작가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려고 한다. 아무리 전자붓을 움직여도 작가가 입력하지 않으면 점 하나 찍을 수 없던 컴퓨터가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컴퓨터에게 예술적 재능을 부여하는 인공생명이나 진화적 계산론 등의 첨단 기술이다. 생물의 적응·진화 전략을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적용하는 ‘진화적 예술’(evolutionary art)이 바로 그것이다. 진화적 예술은 토머스 레이의 디지털 생태계 ‘티어라’(tierra)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기복제하는 프로그램으로 전자생물을 만들 수 있다. 한정된 중앙처리장치와 메모리 공간을 차지하는 싸움을 벌이면서 소프트웨어의 진화를 이룬다. 하지만 이는 전자현미경으로 미시 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한 신비로움이 있을 뿐이어서 작품성을 평가받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진화적 예술의 대표주자로는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칼 심스가 있다. 그는 인공진화 시뮬레이터에서 컴퓨터상의 3차원 세계에 여러 블록으로 이루어진 가상생물을 만들었다. 가상생물은 센서 입력을 하면 방향 그래프에 담긴 유전정보에 따라 적절히 행동한다. 블록을 제어하는 신경망이 입력에 대한 자극 반응계로 작용하는 것이다. 영국의 조각가 윌리엄 레이텀이 만든 ‘뮤테이터’(mutator)는 심스의 가상생명 형상을 떠올리게 하는 예술적 진화 프로그램으로 복잡기묘한 돌연변이 형상을 만든다. 끊임없이 증식하는 무정형의 괴물을 연상시키는 3차원 이미지로 달리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자기표현 욕구를 지원하는 소프트웨어적 방법도 있다. 일본 ATR 인간정보통신연구소 시스타 소메르와 로라 미농노는 컴퓨터그래픽 아트와 인공생명을 조합한 ‘에이 볼브’(a-volve)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간단한 2차원 형상을 입력하면 소프트웨어적으로 3차원적 수중 인공생물을 보여준다.

인간 감성의 확장

지금까지 과학과 예술은 수동적인 관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뉴미디어를 이용한 예술 장르들 역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어설픈 ‘만남’을 가졌을 뿐이다. 홀로그램 영상만 해도 오랫동안 완결적인 구조를 갖지 못한 채 예술 장르에서 부속품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이제 4차원의 홀로그램 영상은 실제 배우와 함께 무대에 올라 물오른 ‘연기’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수준에 이르렀다. 머지않아 홀로그램이 무대를 독차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컴퓨터 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창조성마저 습득해가고 있지 않은가. 진화적 예술과 테크놀로지 아트가 결합한다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예술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자리가 좁아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물론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감성과 의식이 확장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감성을 자극받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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