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사회, 20대가 연출한 식탁 위의 연대… 연극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둘이 친하게 지내.”
중학교 3학년, 내야 할 돈을 제때 내지 못해 교무실에서 ‘흰 봉투’(체납 알림장)를 받던 두 학생에게 담임교사가 건넨 말이다. 가난한 이혼가정의 권진주와 고려인 4세 김니콜라이는 가나다순으로 매번 앞뒤로 앉았지만, 전혀 친해지지 않았다. 4년제 대학에 겨우 들어간 진주는 공무원 준비를 하며 마트 알바를 하며 지내고, 니콜라이는 자격증을 따고 외국인 근로자 실습을 하며 지낸다. 수년이 지나 그런 둘이 ‘전입신고’를 위해 찾은 주민센터에서 우연히 재회한다. ‘혼자’일 때는 즐길 수 없었던 ‘지글지글 보글보글’ 음식을 함께 나누며 둘은 비로소 ‘친한 사이’가 된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극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김성혁 연출. 오프프프(OFFF) 제공
2026년 9월2~6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연희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연극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2024년 동인문학상·전태일문학상·신동엽문학상 등을 받은 김기태 작가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김성혁(28) 연출은 원작의 펄떡이는 표현을 충실히 대사에 담아내되, 진주와 니콜라이의 입장에서 각각 진행되는 1장, 두 사람의 만남을 그린 2장, 두 사람의 관계가 전개되는 3장의 반복되는 순환구조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온 8월24일, 런스루(마지막 예행연습)에 한창인 성북구의 한 연습실을 찾았다. “요즘 20대도 ‘인터내셔널가’를 아느냐”는 물음에 배우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예전엔 시위에 나가 ‘인터내셔널가’를 부를 때 정말 ‘16세의 봉제공 엠마 리스가 체르노비치에서 예심판사 앞에 섰을 때…’로 시작하는 앞부분을 다 외워서 불렀느냐”고. “보통 동을 뜨는 사람이 ‘아지’(agitation)라고 칭하는 그 부분을 다 외워서 불렀다”는 대답에 배우들도 말했다. “‘인터내셔널가’를 몰랐는데, 이번 연극을 준비하며 유튜브에서 찾아 들었다”고.
원작 소설을 쓴 김기태 작가와 ‘고교 사제지간’이기도 한 김성혁 연출은 “(선생님) 수업을 듣진 않았지만, 저를 ‘연극반 만들어 연극을 하던 아이’로 기억하고 계셨다”며 “작가님이 연극화를 흔쾌히 허락해주시고, 출판사 쪽에 얘기해 (저작권 문제 등) 많이 도와주셨는데, 특별한 당부보단 응원을 해주셨다”고 했다.

연극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 김니콜라이 역의 정재우 배우(왼쪽)와 권진주 역의 이정은 배우가 연습하고 있다. 오프프프(OFFF) 제공
단 두 명의 배우가 무대에 서는 이 연극은, 역설적으로 역동적이다. 배우들은 계속해서 뛰거나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한다. 대한민국 평균소득인 연봉 ‘3800만원’을 찍어야 귀화 신청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고려인 4세 니콜라이(정재우)와 먹고살기 위해 마트(쏜살배송)에서 일하며 시급을 받고 시간을 파는 진주(이정은)의 노동은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주인공들이 몸으로 겪어내는 ‘노동 현실’을 좀더 치밀하게 그려낸 셈이다.
김성혁 연출은 “니콜라이가 범용 밀링머신 공작 운용법을 배우는 장면이나 자동차 전조등 하청 공장에서 일하는 작업 과정을 최대한 세밀하게 표현했다. 배우들에게도 이런 작업을 할 때, 어떤 작업 순서를 거치는지 알아보고 동작으로 만들어보라고 요구했다. 관객이 편하게 객석에 앉아 작품을 즐기는 게 아니라 이들이 겪어내는 세계를 좀더 생생하게 감각하도록 하기 위해 ‘마임’ 같은 느낌을 주는 동작을 많이 삽입했다”고 설명했다.
요즘 20대답게 진주와 니콜라이는 휴대전화로 이모티콘이 섞인 문자를 많이 나누는데, 이 대목에서 둘은 ‘빨간색 공’을 주고받는다. 김 연출은 “쇼케이스 땐 이모티콘을 영상으로 띄우는 방법을 썼지만,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며 “서로의 연대나 관계 맺기라는 극의 핵심을 동작으로 표현했는데, 공을 주고받는 행위처럼 관계 맺기 역시 어려운 게 아니라는 뜻도 된다”고 말했다. ‘포즈’(Pause·잠깐 멈춤)가 느껴질 만큼 중간중간 시간이 뜨는 지점도 많은데, 이에 대해 김 연출은 “의도적으로 서사를 지연시키려 했다. 관객이 생각할 틈을 주려는 것”이라고 했다.
무대도 단출하게 구성된다. 중앙 벽면엔 흰색의 대형 봉투가 자리한다. 베이지 톤 조형물 5개가 무대 중간중간에 놓인다. 요구가 많아 미술팀의 원성을 많이 샀다는 김 연출은 “극 중 진주와 니콜라이가 ‘스물일곱 인생 평가’를 할 때 흰 봉투가 움직이도록 장치를 할 계획이다. 조형물 5개는 뚜렷한 형체가 없다. 때론 친구인 ‘앙맨’이 되기도, 때론 ‘더운 나라에서 온 이웃집 사람’이 되기도 한다. 배우들이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주변 사람들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배우 정재우(김니콜라이·왼쪽)와 이정은(권진주)이 연극 연습을 하고 있다. 오프프프(OFFF) 제공
진주와 니콜라이가 바라는 건 소박한 행복이다. ‘법을 어긴 적도 없고, 하루의 3분의 1에서 2분의 1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기에 큰 걱정 없이 잘 살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고 자문한다. 하지만 세상은 1인분 몫을 다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에게 ‘닥치고 공부해 시험에 붙든 돈을 모으든 했어야지. 남들 다 자리 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 네가 빡대가리’라며 시시때때로 냉혹하게 군다.
김 연출은 “심해진 양극화 속에 20대는 김니콜라이처럼 파견직, 권진주처럼 마트와 플랫폼 사이에 낀 비정규직으로 살아간다. 나 역시 연봉 3800만원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인 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웃음) 소박한 행복을 느끼다가도 불현듯 ‘계약 종료 통지’나 ‘낯선 병명의 진단서’가 담긴 ‘흰 봉투’를 받아들게 될까봐 불안해한다. 나 역시 20대라 주인공들과 같은 처지”라고 했다. 이어 “그러다보니 사소한 관계 맺기조차 주저하는데, 삶의 온기는 결국 ‘지글지글 보글보글’ 하며 ‘식탁’ 위에서 음식을 나눠 먹는 작은 관계 맺음에서 나온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연대란 거창한 게 아닌, 그런 사소한 관계 맺음이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단순히 20대가 처한 ‘현실’을 무대 위에 전시하는 게 아닌 ‘희망’을 말하고 싶었다는 김성혁 연출. 그래서 ‘친한 사이’가 된 둘이 손을 잡으며 변함없이 차가운 세상과 마주하는 장면으로 극을 마무리했단다.
김 연출은 “연극을 본 뒤 잠시 떠나보냈던 친구들을 생각해보거나 말 한마디, 메시지 한 통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좋을 것 같다. 또는 니콜라이와 진주처럼 ‘더운 나라에서 온 이웃’이 건넨 음식을 흔쾌히 비우고, 아이의 리코더 소리를 소음이 아닌 ‘공짜 라이브 음악’이라며 박수를 쳐주는, 딱 그 정도 ‘친한 사이’가 되려는 시도를 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김성혁 연출의 연극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김기태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교보문고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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