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레드 이발소’ 시즌4. 한국방송(KBS) 누리집 갈무리
한국방송(KBS)을 통해 방영된 인기 애니메이션 ‘브레드 이발소’가 방송을 위해 녹음한 성우의 음성을 당사자 동의 없이 상업광고에 사용해 논란을 빚고 있다. 해당 성우들은 “문제를 제기하자 제작사가 계약 해지를 통보하는 등 보복성 조처를 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제작사 쪽은 “음성 사용은 실무자 실수이며, 하차 통보는 새 시즌을 앞두고 캐스팅 권한을 행사한 것일 뿐”이라고 반박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성우 업계의 계약서 미작성 관행과 저작인접권 보호 문제가 다시 한번 표면화하고 있다.
한겨레21 취재를 종합하면, 2025년 10월 말 ‘브레드 이발소’에 출연한 성우 3명은 자신들의 음성이 삽입된 한 쿠키 광고가 유튜브에 공개된 사실을 알게 됐다. 제작사 쪽에서 사전 동의를 구하는 절차는 없었다. 성우 ㄱ씨는 “수금 대리 에이전시를 통해 (유튜브 광고에 대해) 문의했더니 제작사 대표가 ‘얼마인지 가격을 말하라’라고 요구하며 ‘다음 시즌(시즌5)부터 교체될 것’이라고 통보해 황당했다”고 말했다. 성우 ㄴ씨와 ㄷ씨도 ㄱ씨 교체 통보 사실을 알고 항의했으나 ‘캐스팅 권한에 관여하는 건 월권’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후 선배 성우인 ㄹ씨 등이 중재에 나섰지만 교체 통보는 번복되지 않았다. 2025년 12월 말이 돼서야 제작사 쪽은 ㄴ씨와 ㄷ씨에게 ‘다음 시즌 녹음에 참여할 것인지 알려달라’는 전자우편을 보냈다. ㄴ씨와 ㄷ씨는 ‘작품에 대한 애정이 깊고 시청자와의 약속이기도 해서 참여하고 싶지만, 우선 ㄱ씨 문제부터 해결돼야 한다’는 뜻을 전달했으나, 결국 두 성우도 교체 통보를 받았다.
성우들은 제작사의 하차 통보가 ‘저작인접권’ 문제 제기에 따른 보복성 조처라고 주장한다. 저작인접권이란, 성우들처럼 저작물의 실연(연기·연주·가창 등)에서 ‘매개·전달’ 역할을 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권리다. 예를 들어 티브이(TV) 애니메이션용으로 녹음된 음성을 극장·유튜브·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에 쓸 경우, 성우들은 ‘매체 이전료’ 명목으로 저작인접권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ㄴ씨는 “2025년 8월에 티브이용 에피소드를 편집한 극장판을 만들 때도 일의 절차와 비용 산정에 대해 항의하자 대표가 하차 통보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며 “당시엔 화해하고 넘어갔지만, 또다시 음성을 무단으로 사용하고 이를 지적한 성우가 하차 통보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단순히 돈이 아닌 성우의 권리에 대한 인식의 문제”라고 말했다. ㄷ씨는 “법적 문제를 떠나 창작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으로 함께해온 성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며 “처음엔 사과 한마디면 해결될 문제라 여겨 내부적으로 해결하고 싶었지만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ㄹ씨도 “애니메이션에서 목소리는 캐릭터의 정체성인데 시즌제 작품에서 이런 식으로 성우가 교체되는 건 처음 봤다”며 “선배로서 중재에 나섰지만 제작사가 입장을 바꾸지 않아 항의 차원에서 자진 하차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극장판 ‘브레드 이발소: 베이커리타운의 악당들’의 한 장면. ㈜브레드이발소 제공
해당 성우들은 2026년 1월 초 한국성우협회와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에 중재를 요청했다. 협회와 노조 쪽은 제작사 쪽에 공식 사과와 전원 복귀를 요구하는 공문을 수차례 보냈으나, 사태는 몇 달째 답보 상태다. 최재호 한국성우협회 이사장은 “제작사는 ㄴ씨와 ㄷ씨 역할에 대체 성우를 투입해 녹음을 마친 상태로 안다”며 “어린이가 보는 애니메이션을 이런 업체가 제작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보여 노조를 통해 사실상의 원청인 KBS 쪽에도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제기했다”고 말했다. ‘브레드 이발소’에 출연 중인 협회 소속 성우 10여 명도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의미로 새 시즌 녹음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브레드 이발소’ 제작사 관계자는 “광고 음성 사용은 신입 피디가 미숙해 내부 보고가 잘 안 돼 발생한 일로 추후 정산도 해줬고 2026년 2월 ㄱ씨를 만나 오해를 풀고 사과했다. 다만 ㄱ씨 교체를 언급한 것은 새 시즌에 해당 배역의 노래 비중이 커지는데 ㄱ씨의 가창력이 부족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ㄴ씨와 ㄷ씨의 경우도 새 시즌을 앞두고 캐스팅을 논의하던 시점이므로 ‘계약 해지’나 ‘일방적 하차 통보’라고 할 수 없다”며 “특히 ㄴ씨는 3월까지 출연을 기대하며 기다려줬지만, 6월 방영 일정을 고려했을 때 더는 미룰 수 없어 대체 성우를 투입해 녹음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작사 쪽은 “성우협회가 소속 성우들이 새 시즌 녹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강제해 제작사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의 중심에 ‘계약서 미체결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공식적인 계약서가 없는 탓에 저작인접권도 잘 보호되지 않는데다 일방적인 하차 통보 사태까지 발생했다는 것이다. 성우 업계에는 아직 표준계약서조차 없는 실정이다. ‘브레드 이발소’는 2019년 시즌1부터 성우들과 서면계약 없이 구두로만 협의해왔다. ‘브레드 이발소’ 제작사는 “그간 관행에 따라 (녹음실을 통해) 구두계약을 해왔지만, 이번에 문제를 인식하고 새 시즌부터 계약서를 도입하기로 했다”는 입장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22년 11월 발표한 ‘대중문화예술산업 불공정 계약 실태조사’를 보면, 성우 109명이 참여한 설문에서 방송 외 작품에 참여할 때 ‘구두로 계약했다’는 응답이 16.1%였고 ‘어떠한 계약도 하지 않았다’는 응답도 19.5%나 됐다.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성우의 56.3%는 ‘계약 상대방 쪽에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경력 10년 미만인 성우 ㅈ씨는 “10년차를 기준으로 한 ‘방송사 조견표’에 따라 ‘출연 단가’를 정하는 관행이 오랫동안 유지돼 따로 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방송뿐 아니라 OTT, 유튜브, 게임 등 매체가 다양해지고 인공지능(AI) 음성 변조까지 문제가 되는 마당에 분쟁을 막을 계약서의 필요성이 커졌음에도 업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경력 15년 이상인 성우 ㅇ씨는 “제작사가 계약서를 내밀지 않는데 나서서 요구했다가는 찍혀서 다음 작품 캐스팅에 영향받을 수도 있다”며 “현실적으로 게임, 광고, 홍보, 오디오북, 영화, 애니 등 성우의 활동 범위가 너무 넓다보니 모두 포괄하는 표준계약서를 도입하는 게 그간 쉽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의식이 공유되면서 최근 성우협회와 문화체육관광부는 업계 표준계약서를 만들기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다. 최재호 이사장은 “‘브레드 이발소’ 사태를 계기로 업계에서도 계약서 작성 문화 정착과 표준계약서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더 높아질 것으로 본다. 문체부가 방송사·제작사 등과 마지막 조율을 진행 중인 만큼 조만간 최종안이 나오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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