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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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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 중에 하는 말들

“혁명조차 불가능한 곳에서 어떻게 낙하해야 하나요?”
등록 2025-12-04 23:33 수정 2025-12-10 15:01
이용백 작가의 ‘피에타’.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 지붕에 있다. 김영민 제공

이용백 작가의 ‘피에타’.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 지붕에 있다. 김영민 제공


 

조물주여 제가 요구했습니까, 진흙에서 나를 인간으로 빚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올려달라고?1

 

고층 빌딩 옥상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사랑에 빠지면 사람을 아래로 던지는 법이죠. 글쎄요, 사랑이라뇨. 우린 모두 섹스로 태어난 거 아닌가요. 꼭 그렇진 않아요. 우린 시술로 태어나죠. 유전자를 복제하지 않기엔 인생이 너무 짧아요. 그렇다고 사람을 저 아래로 던지면 되나요, 낙하할 사람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그래도 한 명쯤은 던져야죠. 아무도 아래로 던져놓지 않으면. 노년에 너무 쓸쓸할 거 같아요.

 

옥상층에서 출발합니다.

 

살아 있기 놀이 하자. 엄마가 아기를 세상으로 던지며 말했다. 갑자기 죽으면 반칙이야. 무병장수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아무도 이 낙하를 대신해줄 수는 없어. 자, 지상으로 내려가거라. 너는 이제 다시는 이 옥상으로 돌아올 수 없을 거야. 엄마는 아랫도리에 힘을 주었고, 의사는 탯줄을 잘랐다. 우앙! 우렁찬 고고성(呱呱聲). 엄마 몸에서 나오자마자 아기는 빠른 속도로 낙하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마침내 백일.

백일을 축하해요! 돌잡이하는 기분이 어떤가요? 뭐가 되고 싶은가요? 아니, 뭐가 될 운명인가요? 무엇을 움켜쥐었나 봅시다. 돈을? 실을? 쌀을? 펜을? 뭔가 되긴 되어야겠죠. 낙하가 끝나기 전에 뭔가 되는 게 좋죠. 쓸모없는 인생이란 생각이 얼마나 많은 노인의 마음을 갉아먹는데요. 뭐든 되세요. 자영업자, 언론인, 프리랜서, 학자, 행인, 법조인, 의사, 점술인, 기업가… 아니 역시 연예인이 좋으려나?

 

유년층을 지납니다.

 

안녕, 친구여 그대는 던져진 지 얼마나 되었지? 응 난 7살. 자네는 입에 금수저를 물고 있군. 나는 흙수저인데. 금수저는 아무것도 아니야. 다이아몬드 수저도 있다네. 저 멀리에서 던져진 이가 말했다. 한가한 소리들 하지 마. 난 무수저야. 더 멀리에서 던져진 이가 말했다. 난 수저를 물고 있을 힘도 없어. 그래, 이제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단다. 지금부터 인생의 숙제가 회전초밥처럼 밀려올 거란다. 때를 놓치지 말고 꾸역꾸역 입에 넣어야 한단다. 너는 운 좋게 부유한 부모가 있으니, 떠먹여줄 거야. 체하지 말고 소화하기만 하면 돼. 일단 학원부터 다니자.

옆에서 낙하하는 사람들이 싸우기 시작했다. 사과하세욧, 애 아빠가 화가 많이 나 있어요! 이 식당에는 아이와 함께 들어올 수 없습니다. 들으셨죠. 이곳은 아이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청년을 위한 나라도 아니죠. 이곳은 적응한 이를 위한 나라입니다. 적응해야 합니다. 적응하고 나면 기대할 것과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생깁니다. 조금이라도 기대할 것이 있으면 계속 낙하할 수 있어요. 단, 나태한 자세로 낙하하면 안됩니다.

 

소년층을 지납니다.

 

세상은 누군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끊임없이 움직여야 돌아가니까요. 낙하 중에 함부로 무례와 혐오와 나태와 회한과 탄식에 사로잡히지 말아요. 이제부터 당신은 아침 7시에 일어납니다. 전날 운동했든 게임했든 상관없어요. 무조건 아침 7시에 일어납니다. 학원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잠깐 좁니다. 그리고 정해진 건물에 들어가 저녁때까지 공부합니다. 주말이 올 때까지 이것을 쉬지 않고 반복합니다. 그 과정에서 깊이 상처 입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전처럼 살아갑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의 일을 해야 해요. 어떤 일도 쉽지 않습니다. 당신에게는 앞으로 진학과 취직과 결혼과 육아와 노인 부양이라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은 자신이 진정 누군지 모른 채로 이 과제를 해야 합니다. 말도 안 된다고요? 그게 인생이지요, 그게 낙하이지요. 울고 싶은가요. 울어도 괜찮아요. 모두가 울고 있거든요. 아이들은 보이는 곳에서 울고, 어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울고 있을 뿐. 울지 않는 사람이 강한 게 아니라, 울면서도 일하는 사람이 강한 거예요.

 

청년층을 지납니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야 해요. 이 막막한 낙하의 과정을 사랑과 일을 통해 평범한 행복과 불행으로 바꿔나가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분주히 만나고 부대껴야 해요. 같이 낙하할 사람을 찾아야 해요. 말을 너무 많이 해도 후회가 깃들지 않을 사람을 찾아야 해요. 우리 좀 걸을까요, 라고 말할 상대가 나타나길 바라요. 사랑해. 사실 많이 좋아했어. 당신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사람 같았어. 나 너무 힘드니까, 거짓말로라도 사랑한다고 해줘.

그러나 적이 늘어나겠죠. 모든 거절은 적을 만드는 법인데, 당신은 거절을 안 할 수 없죠. 거절당한 사람들이 당신을 키워주진 못해도 망하게 할 순 있다고 을러댈 겁니다. 해코지하지 않을 테니 고마워하라고 할 겁니다. 고마워하지 않으면 말하겠죠. 걘 좀 그래. 부지런히 당신을 평가하겠죠. 그러나 그들이 당신에 대해서 무엇을 얼마나 알겠어요? 그들은 당신의 고통을 모르고, 안다고 한들 당신의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 신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 당신에게 느닷없는 친절을 베풀 거예요.

댓글은 그만 달고 이만 집을 나서세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헌신할 일을 찾으세요. 당신은 이제 출근해야 합니다. 물론이죠! 인생 따위는 한 손으로 제압해주겠어! 좋은 아침입니다! 월요일입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삶이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라고요? 여기 석 잔 만들었습니다! 근거 없이 매일매일 행복하세요! 그래, 고생 많았네! 언제든 들르라고! 고마웠습니다! 꼭 다시 연락드릴게요!

 

장년층을 지났습니다.

 

여전히 아파트값은 계속 오르고, 주식은 계속 떨어지네요. 난 틀렸어. 먼저들 가요. 왜 이렇게 사람이 매사에 부정적이야? 혹시 매일 출근해? 아뇨, 전 유괴됐습니다. 자아실현이라는 꾐에 빠졌다가 정신 차려보니 직장에 감금당한 상태예요. 노동하지 않으면 돈을 주지 않는데요. 인생 스쾃 중인데 한번 앉으니 다시 못 일어나겠어요. 이 인생, 엿같음이 멈추질 않아! 스승님, 저 좀 살려주세요. 그 정도로 알 수 있겠느냐. 인생의 번뇌는 더 깊은 곳에 있느니라. 아, 그렇습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다시는 부정적 감정이 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미모보다는 실력으로 인정받겠습니다!

거울에 피곤에 전 사람이 비치는군요. 이제야 깨달았나요? 이 정도 낙하해보면 알게 되죠. 누군가는 일등석에서 낙하 중이고, 누군가는 비즈니스석에서 낙하 중이고, 누구는 이코노미석에서 낙하 중이고, 누구는 짐칸에서 낙하 중이죠. 짐이 무거울수록 빨리 낙하하는 법이죠. 부자들이 오래 살고 빈자들은 일찍 죽죠. 그래도 무소의 뿔처럼 도도히 낙하하세요.

아닙니다! 오직 혁명뿐입니다. 사회와 약속 대련 중인 줄 알았는데, 정말 때리더라고요. 사회가 나를 패니까 나도 사회를 패려고요. 내가 아직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남길 거예요. 전직 혁명가로서 인생의 조언 하나 해줄까.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 그러다 외로우면 무소의 뿔처럼 박혀 있어라. 발각되면 무소의 뿔처럼 혼자 뽑혀라. 고문으로 손톱이 무소의 뿔처럼 뽑히더라도 동지의 소재를 발설하지 마라.

 

중년층을 지납니다.

 

혁명조차 불가능한 곳에서 어떻게 낙하해야 하나요? 매일 조금씩이라도 운동하며 버텨봐요. 그래도 못 버티겠으면 피해자인 척하세요.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 오늘도 반복되는 산책, 상쾌한 캐치볼 같은 대화, 마음을 안정시키는 심호흡,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포옹, 함부로 넘겨짚지 않는 상담, 활기찬 새벽 시장에 대한 상상, 자신을 다스리는 명상을 통해서 오늘 하루도 버티세요. 그러다보면 약간 권태롭기까지 한 나날이 깃들 거예요. 애태우지 않고 사람을 풍경으로 바라보게 되는 날, 그날이 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거죠. 점심 뭐 먹을 거예요?

아니에요, 뭔가에 미치거나 중독되거나 홀리지 않고는 못 버티겠어요. 교주든 피겨든 미남미녀든 장르물이든 민주주의든 덕질 할 게 필요해요. 연예인 팬사인회에 가서 돈을 내고 싶어요. 사랑하지만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를 견디기엔 연예인만 한 게 없어요. 이만한 사랑이 또 어디 있겠어요. 아니, 그러지 말고 당신답게 낙하하세요. 뭐? 대체 나다운 게 뭔데! 나는 나일 수밖에 없다는 게 이렇게 원통한데.

피곤하십니까. 이쯤 되면 누구나 아침저녁으로 고혈압약, 고지혈증약, 혈당약, 그리고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먹습니다. 흑염소도 먹습니다. 닳아가는 육신을 수선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죠. 예전엔 당연했던 것들이 이젠 당연하지 않기 때문이죠. 상처는 오랜 시간을 들여 간신히 아물죠. 좋아하는 것을 예전만큼 좋아할 수 없게 됩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요. 낙하 중인 사람은 낙하해야죠. 오직 정신승리뿐입니다.

 

노년층을 지납니다.

 

낙하지점이 저 멀리 보이네요. 더 늦기 전에 저속노화, 아니 저속낙하가 필요해요. 인생에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군요. 인생의 목적은 인생보다 큰 어떤 것입니까, 아니면 인생 자체입니까. 인생은 출마선언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잡담 같은 것입니까. 인생의 목적은 당선되는 것입니까, 소일하는 것입니까. 낙하의 목적은 아름다운 낙하 자체입니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 낙하입니까.

이 정도 낙하했으면, 의사 볼 일이 많아집니다. 의사를 만나기 전 채혈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야 합니다. 이른 새벽 병원에 도착하면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은 눈빛이 가득할 거예요. 그 낙하하는 눈빛 속에서 침착하게 대기 번호표를 뽑으세요. 간호사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고, 직원에게 시비 걸지 말고, 얌전하게 차례를 기다리면, 당신의 피는 합법적인 주사기에 담기게 됩니다. 이제 당신은 너무 걱정하지는 않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면 됩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낙하입니다.

은퇴를 고려하신다고요? 요즘 같은 백세시대에 하루라도 빨리 세컨드 라이프를 준비해야죠. 요즘엔 기술이 발달해서 낙하 중에 장기를 갈아 끼우기도 한다죠. 산 사람은 살아야죠. 어쩌면 영원히 낙하할지도 모르겠어요. 어느 정치인이 그랬대요. “인간의 장기는 계속해서 이식될 수 있다. 당신은 오래 살수록 젊어지고 심지어 불멸에 이를 수 있다.” 글쎄요, 어차피 관으로 낙하하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조금만 더 낙하하면 당신의 머리는 땅에 닿을 것입니다. 인생 화무십일홍입니다. 꽃이 지기 전에 거국적으로 바람을 피우십시오. 사양하겠어요. 그냥 내 다리로 걷는 것만 한 쾌락이 없어요.

치매가 두려우십니까? 네, 두렵습니다. 아이 때 못했던 욕지거리를 늙어서라도 하려는 저 노인을 보세요. 죽고 싶어 하면서도 겁에 질린 채 삶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저 노인을 보세요. 두려워요. 나이 구십이 넘어 육십이 넘은 딸을 보고 누나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요. 돌봄의 공백 속에서 외롭게 죽어가기 싫으십니까. 안락사를 생각 중이신가요. 낙하지점으로 스위스를 고르셨나요. 이렇게 귀하게 자란 당신이 죽어도 될까요. 당신이 죽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낙하는 깔끔한 슬픔을 남겨줍니다.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낙하가 아니라 더럽고 거짓된 낙하죠. 자기 인생은 자기가 구원하십시오. 물과 밑반찬과 구원은 셀프.

 

지상에 도착합니다.

 

쿵! 홍시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낙하하던 사람이 마침내 지표면과 만났습니다. 모든 죽음은 낙상으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낙하해서 결국 흙이 되지요. 목이 꺾이고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시간은 여기까지입니다. 사람들이 모여 장례식을 준비합니다. 내세를 믿지 않는 성직자가 선언했습니다. 낙하가 끝났습니다. 더 이상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삶의 불확실성은 해소됐습니다.

 

1. 메리 셸리는 소설 ‘프랑켄슈타인’ 도입부에서 이와 같은 존 밀턴의 ‘실낙원’ 문장을 인용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 달에 한 번씩 상상의 여행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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