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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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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끝나고 남은 저녁 시간, 인생에서 남은 날들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일말의 동요도 허용 않는 완벽한 집사, 품위 얻고 실존 놓치다
등록 2025-11-27 17:47 수정 2025-12-04 15:34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 스틸컷.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 스틸컷.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암살 시도로 총에 맞은 뒤 수술실에 누워 의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공화당원이길 바랍니다.” 농담을 적절하게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은 매력적입니다. 공기를 순식간에 바꿔놓는 재주가 있지요. 그런데 농담은 함께 만드는 마법입니다. 반드시 던지는 이와 받아주는 이가 함께 필요합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다른 사람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겁니다.

완벽한 품위와 맞바꾼 인간 실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농담 때문에 괴로운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스티븐스는 영국의 저택인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헌신해온 인물입니다. 요즘 그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시도 때도 없는 주인의 농담에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격식을 중시하는 영국 전통사회에서 살아온 스티븐스에게 주인어른이 던지는 미국 스타일의 농담은 매번 곤혹스럽습니다. 이 소설은 스티븐스가 농담의 의미를 통해 자아를 탐색하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링턴 홀의 미국인 새 주인 패러데이의 제안으로 스티븐스는 홀가분한 여행을 떠납니다. 이 여행의 중요한 목적은 과거 함께 일했던 켄턴을 데려오는 일입니다. 난생처음 여행을 떠난 스티븐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상에 젖습니다. 35년간 그의 모든 삶을 지배한 것은 위대한 집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설명하는 위대한 집사의 핵심 요건은 ‘품위’입니다. 스티븐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날 밤 켄턴에게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중요한 회의를 주관하느라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스티븐스는 지금도 그날 밤을 생각할 때면 뿌듯한 성취감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회고합니다. 식탁 밑에서 호랑이를 발견해도,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어도 결코 놀라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것이 위대한 집사들의 ‘품위’라고 말합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집사로 산다는 것은 무슨 팬터마임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슬쩍 밀거나 약간만 비틀거리게 만들어도 가벼이 떨어져 내려 가면 뒤의 배우가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 말에는 그가 생각하는 ‘품위’의 본질이 잘 드러납니다. 스티븐스가 들려주는 직업적 사명에는 숭고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어쩐지 쓸쓸해 보입니다. 스티븐스가 추구한 품위는 감정을 철저히 억제하는 자제력입니다. 아버지의 임종조차 직무보다 우선할 수 없었던 그의 모습은 직업적 완벽함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음을 암시합니다. 이 쓸쓸함은 켄턴과의 대비를 통해 절절하게 드러납니다. 어느 날 스티븐스와 켄턴은 주인어른의 유대인 하녀 해고 결정을 놓고 대립합니다.

“전 그런 일에 찬성할 수 없어요.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집에서는 일하지 않을 겁니다.”(켄턴)

“우리의 직업적 의무는 우리 자신들의 자만심이나 감정이 아닌 우리 주인의 뜻에 맞추는 것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지 않소?”(스티븐스)

결국 하녀들은 주인어른의 뜻대로 해고됐고 이 사건은 훗날 켄턴이 스티븐스를 떠나가는 하나의 계기가 됩니다. 스티븐스도 자기 일에서 도덕적 차원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을 적절히 표현하고 행동에 옮길 줄 아는 능동성이 결여돼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개인의 삶을 넘어서 한 시대의 어두운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 스틸컷.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 스틸컷.


주인어른 향한 신뢰가 후회로 돌아와

스티븐스의 옛 주인 달링턴 경은 외교정책을 좌우하던 사교계의 중심인물입니다. 스티븐스는 그림자처럼 그를 돕는 집사의 직무를 통해 세상의 중심에 가까이 있다는 내밀한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훗날 달링턴 경의 결정이 인류를 나치의 위협에 빠뜨린 판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스티븐스는 혼란스럽습니다. 주인어른의 잘못된 행위를 돕기 위해 충성을 바친 나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스티븐스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항변해봅니다. 자신은 세상의 거창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현명하다고 판단되는 주인을 열과 성을 다해 모시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었다고요. 나는 누구보다 성실한 집사였노라 말합니다. 그러나 곧 주인의 영광과 자신을 동일시하다가 주인의 과오에는 눈감는 이율배반을 발견합니다. 정당화와 후회 사이에서 동요하던 스티븐스는 결국 눈물을 터뜨립니다.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

위대한 신사를 섬긴 위대한 집사의 노고가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더욱 비참한 것은 사과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입니다. 사과도 반성도 자유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스의 세계관이 흔들립니다.

자제력은 생각과 행동 사이의 공백입니다. 자제력이 강한 사람은 좀처럼 실수하지 않습니다. 매사에 신중함을 잃지 않는 평정심이 있지요. 훌륭한 집사는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제력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은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직업적 의무에 충실했던 스티븐스는 유대인 하녀들이 해고될 때도, 연모하던 켄턴이 달링턴 홀을 떠나갈 때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직업적 의무와 사적 감정 사이에 번민하면서도 주체적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켄턴은 스티븐스와는 다른 삶의 궤적을 만들었습니다.

스티븐스는 품위란 무엇이냐는 한 남자의 질문에 “결국 사람이 공중 앞에서 옷을 벗지 않는 것으로 귀착된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스티븐스의 삶은 ‘옷을 벗지 않는 것’만으로는 인간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합니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삶의 깨달음조차 ‘역할 수행’ 다짐으로

여행을 마칠 무렵 스티븐스는 깨닫습니다. 농담은 자유로운 인간의 특권이라는 것을요. 평생 남 앞에서 ‘옷을 벗지 않으며’ 감정을 억압하고 살아온 스티븐스에게는 주인어른의 농담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격식의 세계에는 농담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조심스럽습니다. 실수할까봐 항상 긴장하게 됩니다. 이런 관계는 정해진 대본을 따르는 것처럼 경직 있습니다. 농담의 아이러니를 이해하려면 관습에서 벗어나 창의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품위’와 주체성을 맞바꾼 스티븐스는 누구의 농담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농담도 사과도 할 수 없는 삶이라면 품위가 다 무슨 소용일까요.

문제를 깨달았으니 비로소 희망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티븐스의 자아 탐색은 인간성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주인어른을 기쁘게 하기 위해 농담을 더욱 잘 연습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스티븐스의 여정은 끝이 납니다. 지나간 날을 후회하지만 새로운 시작점을 찾지 못합니다. 오랜 세월 다져진 그의 자제력은 새로운 삶으로의 도전마저 자제하게 합니다. 인간성 회복이 아닌 더 나은 집사가 되는 것으로 귀결되는 이 결말은 삶의 비가역성을 보여줍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스티븐스는 켄턴을 다시 만납니다. 켄턴은 결혼생활이 만족스럽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스티븐스 곁에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내비칩니다. 스티븐스는 자신도 켄턴을 그리워했다고, 함께 달링턴 홀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입을 열지 못합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에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인생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스티븐스가 가지 못한 길을 안내하다

소설의 제목 ‘남아 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루가 끝나고 남은 저녁 시간, 그리고 인생에서 남은 날들입니다. 여행 중 만난 남자는 저녁이야말로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라고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니까요. 스티븐스에게도 아직 남은 나날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시간을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작가는 스티븐스의 실패를 보여주며 독자를 그가 도달하지 못한 삶으로 안내합니다. 후회를 감당할 용기를 가진 켄턴과 후회를 용납할 수 없었던 스티븐스의 대비 속에서, 직업적 성공과 인간적 삶 사이의 긴장이 드러납니다. 스티븐스가 끝내 배우지 못한 것은 삶이란 미숙함을 인정하는 용기 위에 세워진다는 진실이 아니었을까요.

“직업적인 성공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지만 추운 밤에 그걸 베개 삼아 잠들 수는 없는 일이다.” —매릴린 먼로

 

정주식 팟캐스트 ‘발굴독서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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