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9월18일 대만 16개 원주민 부족 가운데 하나인 아타얄족 학생들이 제1회 대만 국제아동도서전을 방문해 책들을 살펴보고 있다.
성인 독자 중심의 출판 시장에서 어린이·청소년 책은 종종 주변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아동기에 아이들이 책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건, 시민을 길러내고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대만 문화부는 ‘한 나라가 어린이와 청소년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그 나라의 문화와 문명을 결정한다’며 제1회 대만 국제아동도서전을 개최했다. 한겨레21이 그 현장을 방문했다. —편집자
그림책을 펼치면 한쪽엔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이, 다른 쪽엔 눈 하나에 팔이 여럿 달린 정원사 로봇이 있다. 노인과 로봇의 삶은 교차하며 펼쳐진다. 오래전 노인은 크고 낡은 집 식탁에 홀로 앉아 식사했다. 이젠 로봇이 그 식탁에 혼자 앉아 있다. 오래전 노인은 홀로 책상에 앉아 시계를 고쳤다. 이젠 로봇이 그 책상에 앉아 책을 읽는다. 로봇은 책에서 노인과 함께 찍은 사진들을 발견한다. 벤치에 앉아 쉬었을 때,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났을 때, 열기구를 탔을 때, 생일 초를 불었을 때…. 혼자였던 노인은 정원사 로봇을 만들었는데, 어느덧 노인이 떠난 자리에 정원사 로봇만이 남은 듯하다.

대만 국제 아동 도서전에 전시된 신예 작가 잉그리드 첸의 미출간 책.
이렇게 시작되는 책의 제목은 ‘한 삶의 메아리’(Echoes of a life)다. 어느 노인이 남기고 간 삶의 흔적을 되짚으며 살아가는 정원사 로봇의 이야기를 담았다. 아직 책으로 정식 출간되지 않은 잉그리드 첸 작가의 이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자주 발걸음을 멈췄다. 2025년 9월18일부터 21일까지 대만(타이완) 타이중 국제전시관에서 열린 제1회 대만 국제아동도서전에 전시된 작품이다. ‘도시를 넘나들며, 경계 없이 읽기’(Crossing Cities, Reading Without Border)란 주제로 열린 이번 도서전에는 첸 작가를 포함해 신예 그림책 작가 30명의 미출간 작품들이 전시됐다.

바이킹, 회전목마 등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구성된 대만 국제아동도서전
신예 작가들의 작품 부스가 어른들의 눈길을 끌었다면, 어린아이들에겐 ‘다양성’을 품은 부스가 인기였다. 예를 들면 대만 원주민 16개 부족 가운데 하나인 아미족 언어로 ‘아이들의 세계’라고 쓰인 부스에서 원주민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어린아이들은 전시관을 돌아다니다 말고 부스를 돌아보며 흥미를 보였다. 대만은 본래 오스트로네시아계 원주민의 섬이었지만 네덜란드, 스페인, 명나라, 청나라, 일본의 지배에 이어 국공 내전까지 거치면서 수많은 집단이 뿌리내리고 사는 ‘이민자들의 땅’이 됐다. 이에 토착민 출신 교사 등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해 부스에서 언어와 책을 홍보하고 노래하며 다음 세대에 그들의 문화를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에겐 대만의 다양한 토착신들을 모티프로 한 웹툰 부스, 대만의 지역별 다양한 식문화를 캐릭터화한 웹툰 부스도 인기였다. 아이들은 토착신들의 신전처럼 꾸며진 커튼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요괴로 변한 쌀국수·만두 등 캐릭터 앞에서 키득거렸다. 대만 문화부는 미끄럼틀, 회전목마, 바이킹 등도 전시관 내부에 설치해 도서전을 ‘아이들의 축제’로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속 비인간적 풍경을 그린 국립대만문학관 전시관도 주목받았다. 2023년 볼로냐 라가치상 ‘놀라운 책장’에 선정된 ‘불시에’(冷不防)는 전쟁상을 그린 문학가 양윈핑의 시를 바탕으로 한 그림책인데, 전시관 안에는 이 책의 그림들이 새겨진 거대한 탁자가 설치됐다. 부스를 방문한 어린이들은 전쟁 속 일상을 그린 장면들에 사인펜으로 따뜻한 색을 덧입히며 놀았다.

대만 국제아동도서전의 국립대만문학관 전시관에서 ‘불시에’ 등 그림책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아이들.
도서전에 참석한 작가들은 어린이들에게 책이 ‘역사를 체득하는 매개’이자 ‘현실을 탈출하는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불시에’를 각색하고 그린 왕춘쯔 작가는 “아이들은 윗세대에 전쟁이 있었다는 건 알지만 그 구체적 일상이 어땠는지는 알지 못한다”며 “아이들이 시와 그림을 통해 문학적 감수성을 느끼는 동시에 전쟁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길 바랐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도 개인의 생활과 가족의 모습, 인간적 면모를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왕춘쯔 작가가 자신의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양윈핑 시인이 장을 보러 시내에 가는데 고기나 생선은 없고 파와 당근만 남아 있는 모습이다. 아이들은 구체적 장면을 통해 전쟁에는 폭격만이 있는 게 아니라 ‘장보기’ 같은 일상도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폭격 가운데 작은 돌멩이들이 소리치는 장면도 있는데, 이는 양윈핑 시인이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숨었을 때 파편이 지붕에 부딪히는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아이들은 이런 세밀한 묘사를 통해 ‘전쟁의 소리’를 상상하게 된다.

왕춘쯔 작가가 2025년 9월20일 대만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자신이 그리고 각색한 책 ‘불시에’를 들고 있다.
이번 도서전 이탈리아관 한가운데 전시된 ‘식물의 경이로운 세계’(Il favoloso mondo delle piante·식물과 지구에 관한 그림책)를 그린 작가 필리프 조르다노는 “책은 미래를 향해 열린 문”이라 말했다. 그는 “어린 시절 나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필리핀 사람이었고 아버지는 스위스 사람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외로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며 “책은 내 인생에서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현실을 탈출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줬고, 미래를 향해 가는 문이 됐다”고 말했다.

‘식물의 경이로운 세계’(Il favoloso mondo delle piante·식물과 지구에 관한 그림책)를 그린 작가 필리프 조르다노가 2025년 9월18일 대만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자신의 책을 들고 있다.
이번 도서전에선 한국과의 긴밀한 유대감을 드러낸 장면도 엿볼 수 있었다. 대만 문화부는 신예 그림책 작가 전시에 책자를 비치했는데, 대만어(중국어 번체자)판과 영어판에 이어 한국어판을 세 번째 언어로 포함했다. 대만 정부는 또 한국에 천쓰홍, 천쉐 등 대만 작가 작품을 알린 김태성 번역가에게 아시아인 최초로 3등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리위안 대만 문화장관은 “대만의 번체자 문학을 한국에 알려준 김태성 선생님에게 무척 감사드린다”며 “한국 독자들이 대만 작품을 좋아하는 건 무엇이든 쓸 수 있는 자유로움과 폭넓은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장르적 특성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태성 번역가는 이번 도서전을 둘러보며 “대만의 1인당 평균 독서율은 세계 11위인 반면 한국은 32위”라며 대만 정부의 독서 진흥 정책을 부러워했다. 대만 정부는 청소년·청년에게 도서 구매용 문화 포인트를 지원하고 독립서점에서 책을 사면 추가 지원금을 준다. 대통령과 행정원장 등 주요 인사가 추천도서 목록을 발표하는 것도 특징이다. 교육부의 적극적인 권장으로 이번 도서전에 많은 교사가 독서동아리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타이중(대만)=글·사진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2025년 9월20일 리위안 대만 문화장관이 천쓰홍, 천쉐 등 대만 작가 작품을 알린 김태성 번역가(오른쪽)에게 아시아인 최초로 3등 문화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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