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24일 저녁 7시30분, 경남 남해에서도 남쪽 끝, 상주면 은모래해변으로 반려견 몽덕이가 흰 궁둥이를 흔들며 달려갔다. 경기 고양시부터 7시간 운전해 내려왔다. 어스름이 깔린 해변은 텅 비었다. 이삿짐을 실은 1t 용달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배낭엔 아침에 엄마가 꾸역꾸역 넣어준 샌드위치가 찌그러져 있다. “짐 늘게 왜 이런 걸 싸줘.” 새치가 희끗희끗한 딸이 70대 노인 엄마에게 아침부터 짜증을 냈더랬다. 해변에 쪼그리고 앉아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먹었다. 손가락에 흐른 소스까지 싹싹 빨아먹었다. 허기졌다. 나는 왜 여기 있을까?
이삿짐 아저씨는 저녁 8시30분에 남해의 어두운 골목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불길했다. 큰 짐이 없어 아저씨와 부인 둘이 오기로 했는데 아저씨 혼자다. 부인은 남편 전화를 모두 씹어버렸다. 싸운 거 같다. 아저씨는 노끈 다발을 꺼내더니 책을 대여섯 권씩 묶기 시작했다. 족히 500권은 남았다. 나도 같이 앉아 책을 묶었다. 아저씨는 신세 한탄을 했고, 부인은 끝까지 화가 풀리지 않았다. 하세월이었다.
짐은 내가 미래에 ‘인간 AI’라고 부를 K의 손님용 원룸에 부렸다. 이사를 한 주 앞두고 계약이 어그러져 갈 집이 없었다. 5평 남짓한 방에 머물며 집을 구해보기로 했다. 이불 짐을 풀어보니 간장에 절었다. 이삿짐 차 안에서 간장통이 깨졌던 거다.
2023년 5월 남해는 아름다웠다. 돌이켜보면 아름다운 것들은 위험하다. 오목한 해안선을 따라 동그란 전구들이 반짝였다. 산자락과 해안선이 이어 달리고 그 사이사이 안긴 마을들은 저마다 색깔이 달랐다. 그때 이종수 동고동락협동조합 이사장을 인터뷰(제1466호 참조)했다. 그는 소비 대신 생태, 경쟁 대신 연대, 개인 대신 느슨한 공동체의 꿈을 얘기했다. 실제로 이 마을은 그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 거 같았다. 폐교 위기에 놓였던 상주중학교가 2016년 대안학교로 바뀌면서 부모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학부모들이 뭉쳐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방과후 아이들을 돌보는 상상놀이터를 꾸렸다. 아이들에게 다랑논 생태농업을 가르치고, 노인들의 마당에 작은 텃밭도 조성한다. 대한민국에서 이종수 이사장이 그리는 마을이 가능할까? 이 틈에 끼고 싶었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이종수 이사장을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라고 부르며 괴롭힌다. 그의 몸에 사리 몇 개쯤은 만든 것 같은데, 아직 분이 다 풀리지 않았다. 발목까지 내려앉은 그의 다크서클만 아니었다면 사리를 눈으로 확인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 그는 불과 넉 달 만에 난리 발광을 친 내 패악 덕분에 온화한 부인을 향한 감사의 마음이 더욱 깊어졌으니, 피해자만은 아니다.
1년 전 인터뷰 때 내가 꽂힌 건 사실 이 부분이다. “마을이 느슨한 확대 가족이 돼야죠. 혼자 살기 힘들어진 노인이 친구들, 마을 젊은이들과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요양원은 마을 단위로 만들어야 합니다.” 곧 50대가 되는 1인1견 가구인 나는 마을이 절실했다. 만나려면 족히 1시간은 지하철을 타야 하고 그나마 약속 잡기도 힘든 친구들은 관계의 자양강장제일지언정 일상적 밥은 되기 힘들었다. 급할 때 개를 맡기고 코로나로 뻗었을 때 먹을 걸 나눠주는 이웃을 갖고 싶었다. 혼자 사는 푸우는 만날 행복하다잖은가. 문만 열고 나가면 같이 놀 돼지 피글렛, 당나귀 이요르가 있으니까. 아무도 푸우한테 바지를 안 입을 거면 살이라도 빼라고 하지 않으니까. 그런 느슨하고 촘촘한 연결망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책 ‘타인에 대한 연민’에서 그랬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고. 두려움의 원인을 타자에게 투사하거나 통제해 풀려 한다고.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나는 무서워서 생떼로 타인을 통제하려 드는 어린아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늙어가는 나는 반드시 더 약해질 것이다.
이종수 이사장, 다시 말해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는 인터뷰에서 마을에 책방을 만들려 한다고 했다. “제가 책방 알바 할게요!” 그때는 그 책방을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책방에서 커피 마시고 책도 읽고, 오후엔 해변에서 수영도 해야지, 최저임금 받으면서.’ 이런 알량한 꿈을 꿨더랬다. 1년 뒤 이 꿈 중에 실현된 건 커피밖에 없다. 커피는 정신을 두드려 깨우려고 퍼마신다. 넉 달 동안 책은커녕 뉴스도 못 봤다. 이제 내 롤모델이자 위인은 세상의 모든 자영업자다. 동네 슈퍼만 가도 경외심이 든다. 대체 이 사장님은 이 수많은 결정을 어떻게 했을까? 자영업자야말로 회계, 인테리어, 마케팅, 영업을 모두 아우르는 이 시대의 종합예술인이자 지식인이다.
남해로 이사 온 첫날 밤, 나는 낯선 방에 누워 휴대전화로 포털에 옛 고양시 주소를 쳤다. 지도 위 한 점을 바라봤다. 울컥 그리웠다. 거기 살 때, 외로웠다. 고립감이 엄습해온 어느 날, 선잠이 들어 꿈을 꿨다. 내가 물에 빠졌다. 머리 위로 살얼음이 끼었다. 그 위로 햇살이 어질어질 비껴들었다. 숨이 막혀 발버둥을 친다. 꿈에서 깨 생각했던 거 같다. “할 수 있는 걸 해! 얼음을 쳐! 그냥 살얼음이야!”
나는 얼음을 깨고 물 밖으로 나왔을까? 잠들려고 뒤척였다. 상주면 인구 1600여 명 중 내가 아는 사람은 ‘모든 돈 안 되는 것들의 대표’밖에 없었다. 친한 사이도 아니다. 나는 수도권 밖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싫건 좋건 익숙한 공간엔 체온이 있다. 퇴근 시간 후미등 붉은 불빛이 빼곡했던 거리, 만원 지하철에서 났던 짜증까지 익숙한 것들이 주는 아늑한 느낌이 있다. 밤이면 편의점도 문을 닫는 이 마을에서 첫날 밤, 나는 어느 때보다 혼자인 거 같았다. 반려견 몽덕이의 배를 만졌다. 몽글몽글했다. 4년3개월 전 몽덕이가 처음 내게 왔을 때, 태어난 지 두 달 된 이 개는 산책을 거부했다. 작은 개에게 세상은 너무 컸으니 무서웠을 거다. 간식을 깔아놔도 현관문 밖으로 한 발 내디디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현관문 앞에 가부좌로 앉으니 몽덕이가 그 안으로 들어왔다. 앉은 채 엉덩이로 밀며 조금씩 복도 쪽으로 이동했다. 몽덕이는 내 무릎에 의지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제 나는 이 개에 의지해 낯선 세상으로 나간다. 몽덕이가 아니었다면 남해행을 결정하지 못했을 테다. 누구에게나 다른 존재의 무릎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이 남쪽 끝에서 애증의 ‘무릎’들을 만나게 된다.
김소민 은모래마을책방 지기/희망제작소 연구위원
*‘인간관계 신생아’인 중년 여성과 간식 말곤 관심 없는 개의 도시 탈출 합동 도전기. 경남 남해에서도 남쪽 끝 작은 마을 상주에서 동네책방으로 망하지 않고 연결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4주에 한 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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