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매번 다정하진 않아도 우린 이어지고 있으니까요

회색지대에 놓인 생각을 언어화하는…<헤아림의 조각들> 임지은 작가의 플레이리스트
등록 2023-06-02 19:12 수정 2023-06-09 10:28
임지은 작가 제공

임지은 작가 제공

에스엔에스(SNS)에 자주 글을 쓰다 보면 좋은 얘기만 하게 된다.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싫어하는 것에 대해 얘기할까 싶다가도 참는다. 미움받기 싫고, 상처 줄까 겁난다. 무해한 사람이 되려 노력 중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실과 멀어지는 기분이다. 좋은 말보단 정확한 말을 하고 싶은데.

그럴 때면 임지은의 산문을 떠올린다. 그녀의 첫 책 <연중무휴의 사랑>(사이드웨이 펴냄)을 보고 있으면, 참 되바라졌네 싶다. 참고로 ‘되바라지다’는 ‘어린 나이에 어수룩한 데가 없고,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하다’는 뜻의 동사다. 어떻게 이렇게 솔직하게 쓰지? 무서운 게 없나? 싶다가도, 끝내 미운 상대의 가엾은 구석을 찾아내는 모습이 진드기 같다.

“‘연중무휴의 사랑’ 하면 사람들이 다정한 책으로 오해하는데, ‘연중무휴 열정적으로 사랑할 순 없다’는 뜻으로 붙인 제목이에요. 글이 안 풀리면 산책하는데, 그날은 물 사러 편의점에 갔어요. 근데 점원 아저씨가 너무 불친절한 거예요. 기분이 안 좋아서 한 바퀴 더 도는데 문득 편의점 간판 옆에 작게 적힌 연중무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어요. 연중무휴로 편의점이 열려 있으면 사람이 어떻게 친절해. 그래서 가족에게 연중무휴의 사랑을 전하고 싶다고 적었어요. 매번 다정할 순 없지만 이어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영원히 당신들 편에 있겠다고.”

그런 태도는 무언가 헤아릴 때 나온다. “가능성을 헤아려보는 걸 좋아해요. 어떤 이론 하나만으론 설명되지 않는 장면이 많아요. 아무리 헤아려도 다 알 수 없지만, 그 조각들을 모으다보면 나는 이 풍경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느낌을 받아요.” 혼자서는 원하는 모습에 가닿을 수 없다는 게 위안이 될 때가 있다.

책의 서문에서 그는 남자친구 영훈의 이름을 부르며 고백한다. 사랑이 제일이라는 걸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그 이름은 두 번째 산문집 <헤아림의 조각들>(안온북스 펴냄)에도 등장한다. 사랑은 연필로 쓰라고 했는데, 이렇게 활자로 남겼다가 나중에 지우고 싶으면 어떡하나.

“너랑 나랑 사귀면 이건 더는 나만의 얘기나 너만의 얘기일 수 없어요. 우리 얘기니까요. 영훈은 누구보다 저를 지지하는 사람이지만, 제가 저일 때 가장 부딪히는 사람이에요. 나를 나이게 하는 것, 너를 너이게 하는 것은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을 배반해요. 각자를 책임지는 방식만으론 우리가 될 수 없다는 게 제가 생각하는 관계의 전제이기 때문에, 나중에 이불킥을 하더라도 우리가 얽힌 이야기가 남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자주 솔직함에 대해 생각한다고 지은은 말했다. 후련함에 그치는 솔직함이 아닌, 내가 가진 빈틈을 정직하게 수긍하는 솔직함. 한 친구는 내게 말했다. 요즘 자신이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생각에 당당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그래서 남 앞에서 해도 괜찮다고 생각되는 말이 갈수록 적어진다고.

그럴 때 나는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여성 작가들의 산문을 읽는다. 그럼 세상에 못할 이야기가 없다고 느껴진다. 행여 자신에게 불리해지더라도, 자기 안의 위선과 거짓까지 보여주는 것. 임지은의 책을 읽은 사람은 자신의 훼손된 경험을 들여다볼 힘을 얻고, 쓰는 사람이 된다.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임지은 작가 (@uncommon__j)의 추천 플레이리스트

유튜브 채널 ‘심리대화 LBC’ 갈무리

유튜브 채널 ‘심리대화 LBC’ 갈무리

❶심리대화 LBC

https://www.youtube.com/@LBCKorea

처음엔 <나는 솔로>를 재미있게 봤는데, 이제는 이 유튜버의 해석 영상을 보려고 <나는 솔로>를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을 설명하는 영상에 관심이 많은 내게 퍽 흥미진진한 채널. 산책할 때 걸으면서 듣기 좋다.

❷로니 스미스의 <이츠 체인지드>(It's Changed)(1977)

https://youtu.be/5lsZb93rY8E

로니 스미스의 음악은 대체로 칠링(Chiling, 느긋함 여유)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데 It's Changed는 유독 그런 거 같다. 청소하는 밝은 오후나 어떤 전환점, 낮에 옅게 난 땀이 밤에 보송보송 마르는 계절이면 한 번씩 찾아 듣는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일 때마다 그것이 먼 과거에서 출발해 이제야 도착한 걸 상기하는데, 이 곡에 대한 내 감상도 비슷하다. 어쩌면 현재의 느긋함 역시 1970년대에서 출발해 지금 막 도착한 게 아닐까?

❸찌르레기떼의 군무(Flight of the Starlings: Watch This Eerie but Beautiful Phenomenon)

https://youtu.be/V4f_1_r80RY

지친 날엔 실내의 불을 끄고 이 영상을 재생한다. 이 영상이 아니더라도 유튜브에서 ‘Murmuration’이라고 치면 아름다운 영상이 연달아 이어지고, 모니터 안 빛나는 군무를 보면 짓눌린 마음이 서서히 차오른다. 자연은 경이를 만들어내는 게 여럿의 몫이라는 걸 알려준다.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