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니…. 최근 발행된 책 제목을 보고 ‘편집자가 최소 천재’라고 생각했다. 스트레스 받을 때, 우울할 때, 만사 귀찮을 때, 그래서 살고자 하는 기운이 시들해질 때조차 절대 꺾이지 않는 ‘떡볶이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이리도 잘 표현할 수 있다니 그저 경탄할 뿐이다. 1980년대 초등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100원에 10개, 단골은 1개를 덤으로 주는 ‘고향의 맛 엠에스지(MSG) 밀가루 떡볶이’의 맛에 눈을 떴다. 그때부터 떡볶이는 30여 년 한결같은 ‘내 영혼의 닭고기 수프’였다. 대학에서, 회사에서 “서울내기 다마내기”라는 농담이 싫었지만, “깡촌에서 떡볶이를 모르고 컸다”는 두 선배의 충격 고백을 듣곤 처음 도시를 고향으로 둔 내 운명에 감사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 영혼의 떡볶이 </font></font>‘전정윤의 작심 4주!’라는 허랑한 홈트레이닝(홈트) 체험 기사를 시작한 이후 떡볶이와 내 관계가 소원해졌다. 탄수화물을 줄이려 참은 게 아니라, 떡볶이에 대한 에로스가 사라진 듯하다. 이전의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지인들과 즉석 떡볶이집을 찾아 볶음밥까지 풀세트를 해치웠다. 일이 많을 땐 지하철역 떡볶이 프랜차이즈 앞에 혼자 서서 야식으로 ‘밀떡 쌀떡 반반’을 접시째 흡입하는 일도 잦았다.
영원히 허니문일 것만 같았던 떡볶이와의 권태기 외에도 최근 생활의 변화가 잇따르고 있다. 마감이 몰린 6월22일, ‘기사 펑크’ 위기감에 아침밥도 못 챙겨먹고 출근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위장에서 평활근 수축하는 소리가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울려퍼졌다. 후배 책상을 어슬렁거리며 “꽈자”를 찾는 ‘사십짤’ 코스프레를 하다가 며칠 전 챙겨뒀던 ‘아몬드 ㅃㅃㄹ’가 떠올랐다. “맞다, 나 과자 있다~!” 오두방정을 떨며 자리로 뛰어왔다. 허겁지겁 종이상자를 찢어내고 비닐 속지를 “쫙” 뜯는 순간 “좌라락…”. 벗어둔 구두 속으로, 그 구두로 밟고 다니던 바닥 위로 과자가 쏟아졌다. 1분 전까지 엉덩이로 깔고 앉았던 의자 위에 떨어진 두 가닥을 간신히 건졌다. 길쭉이 과자를 똑똑똑똑 끊어서 입으로 밀어넣는데 생경한 긍정 에너지가 샘솟았다. 저혈당으로 손가락이 달달달달 떨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과자를 놓치고도 ‘훗! 하늘도 나의 홈트를 돕는군!’이라니.
홈트를 시작한 지 보름 만에 나는 확실히 달라졌다. 짜증이 줄었다. 편집장이 “전정윤의 작심 4주 끝나면, 전정윤의 4주만 더를 쓰자”며 주리를 틀어도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파르르르’ ‘부들부들’ 분노 게이지가 상승하는 대신 생존을 위한 아이디어가 솟구쳤다. 그리하여 한글로 된 ‘몸개그 문장’의 숨겨진 세계 최강자인 김소민 자유기고가를 꼬드겨 ‘김소민의 근육시대’를 가계약했다. ‘김소민의 아무거나’ 연재가 끝나면, 독자들은 스스로를 “근육 비율 제로에 도전하는 몸”으로 묘사한 적 있는 김 작가가 ‘근육 중년’으로 거듭나는 체험기를 읽을 수 있다. 김 작가를 또 꾀어 철인 3종 경기에 함께 나가고, 기사는 김 작가에게 쓰게 하겠다는 야심도 생겼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ㄴ’에 버금가는 ‘김소민의 근육시대’를 작명한 뒤, 스스로 너무 대견했다. 문득 며칠 전 싱겁게 끝난 ‘세기의 대결’도 떠올랐다. 사실 나는 우리 집 네 식구 중 기억력 3위다. 내 아래로는 칠순 노모가 계신다. 번번이 내 휴대전화며 열쇠며 옷가지 따위를 찾아주는 엄마의 순위 판정은 나와 좀 다를 수 있다. 나와 엄마가 엎치락뒤치락 하위권 다툼을 벌이는 사이, 상위권에선 남편과 딸이 각축하고 있다. 기억력을 동원한 각종 게임에서 나는 남편과 아이를 이겨먹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이” “그” “저” “걔” “쟤” “거기” “저기”를 입에 달고 다니며 ‘고유명사 치매’ 자가진단을 내린 지 오래라 의기소침할 일도 아니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홈트로 ‘고유명사 치매’ 개선</font></font>대이변은 사흘 전 이부자리에서 펼쳐졌다. 그날도 딸은 ‘소등’과 동시에 취침 시간을 늦추려 잔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시장에 가면’ 게임이 시작됐다.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귤도 있고” “시장에 가면 사과도 있고 귤도 있고 문어도 있고…” 순서대로 하나씩 명사를 쌓아가는 ‘기억력 게임’ 첫 판이 예상외로 나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내 잠자리를 중심으로 좌부우녀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솔직히 이긴 나도 놀랐다. 연이은 ‘방송국에 가면’ 역시 두 사람과 나는 ‘게임’이 되지 않았다. 나의 완승을 직감한 승부욕 강한 두 사람은 은근슬쩍 게임을 포기하고 꿈나라로 떠났다.
명색이 홈트 기사에 몸 쓰는 얘기가 너무 없었다. 사실 이 모든 변화는 보름간 꾸준히 몸을 움직이면서 시작됐다. 1년6개월 만에 ‘다노티비’로 홈트를 다시 시작했을 때, 처음 며칠은 동작과 동작이 이어지는 짧은 순간마다 고비가 찾아왔다. “와이드 스쿼트 갈게요. 무릎은 발끝이랑 같은 방향으로 굽히면서 내려가고, 일어날 때 ‘후’ 엉덩이에 힘 딱 주고” 친절로 완전 무장한 다노 언니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후” 대신 “욱”이 터져나왔다. 홈트가 지겹다며 쿠폰을 끊어 피트니스에 가서도 진득하게 사이클 30분을 참는 게 고역이었다. 2~3분마다 한 번씩 ‘당장 그만두고 싶다’는 마음과 ‘5분만 더, 10분만 더’를 외치는 머리가 사투를 벌이곤 했다. 고비마다 나를 버티게 한 건 8할이 ‘이건 일이다’라는 노예근성이었다. 나머지 2할은 자신이 등장하는 홈트 기사를 꼼꼼히 챙겨보는 딸의 ‘팩트체크’ 채찍질이었다. 한 번에 1시간, 주 4~5회, 운동이 싫으면 등산이라도 어떻게든 땀이 날 때까지 몸을 움직였다.
국제부 기자 시절, 미국 신경학회가 의사들에게 권고한 진료 지침에 대한 외신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가벼운 인지기능 장애 환자들이 일주일에 150분 동안 땀이 날 정도로 운동하면 인지기능 장애에서 치매로 진행되는 속도가 늦춰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사십 대 전후로 심해진 건망증을 가지고 인지기능 손상을 운운하는 건 건방이다. 다만 이제 막 노화로 가는 급행열차에 올라탄 나에겐, 운동을 재개한 뒤 나타난 자잘한 변화가 매우 고무적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신비의 갈색병을 바른 것도 아닌데</font></font>유산소운동이 항우울제와 비슷한 작용을 한다는 연구 결과 역시 너무 유명하다. 항우울제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활성화해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유산소운동을 하면 뇌에 혈액 공급이 늘어나 도파민과 세로토닌 활성도를 높인다고 한다.
이번주 내내 편집장의 출근길 인사는 “정윤씨, 얼굴 좋네” “정윤씨, 얼굴 밝네” “정윤씨, 기분 좋아 보이네” “정윤씨, 홈트가 효과 있나봐”였다. 시름시름 마감을 앓다가 누렇게 얼굴이 뜬 오늘 아침에는 ‘목례’로 때운 걸 보면 지난 나흘간 아침 인사가 빈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에땡땡땡땡 신비의 갈색병’을 바른 것도 아닌데, ‘훗!’ 물론 예리한 독자는 내가 아직 홈트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대망’(大望)이 될지 ‘대망’(大亡)이 될지 모르는 숫자의 비밀은 다음호 마지막 회에!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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