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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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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 하려거든 목숨을 걸어라

무엇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는 삶

탈주 자체만으로 삶의 의미가 돼줄까
등록 2018-05-26 02:51 수정 2020-05-03 04:2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묻지마 퇴사를 하고 한 달, 집 앞 편의점 앞에서 망설였다. 40대 주인 아줌마 얼굴이 판매대 사이로 얼핏얼핏 보였다. 유리문에 써 있다. ‘야간 알바 구함.’ 나이 제한이 없다. 드문 기회다. ‘아직 퇴직금이 있으니, 이 나이에 야간 알바는 무리 아닐까?’ 사표를 쓰겠다고 했더니 누군가 한국에서는 “숨만 쉬어도 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한 달 동안 생활비가 빠져나가는 속도를 보니 곧 내가 숨 쉬는 걸 저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퇴직금은 곧 이마트 차지다. 퇴직금이 네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네가 아직도 어른이 못 됐다는 증거다.’ 두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무엇보다 손님하고라도 얘기하고 싶었다. 적이 없고 보니 말 걸어주는 사람은 다 고맙다. 이렇게 1년이 가면 모든 인류를 사랑할 수 있을 거 같다.

엄마는 도망치려고 하는 중

체력과 퇴직금을 밀리그램 단위로 저울질하다 보니 어느새 ‘알바 구함’이 없어졌다. 물 한 병 사며 슬쩍 물으니 군대 막 제대한 청년을 하루 새 구했다고 한다. 왠지 모를 낭패감이 들었다.

아나가키 에미코가 책 에서 쓸데없는 자존심을 버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아직도 ‘왕년엔 말이야’에 묶여 있나보다. 선생님과 부모님과 회사에서 인정받으려 버둥거렸던 그 왕년에 정작 행복하지도 않았으면서, 아무도 관심 없는데 혼자 틀어쥐고 있다. 자존심은 자신을 배신하는 감정인 거 같다. 그걸 지키려면 타인의 룰에 따라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지키려다 내가 정말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자기를 조정하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망할 놈의 감정인데, 당최 놓을 수가 없다.

편의점 알바 자리를 놓치고 나니 싱숭생숭해져 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다. 듀나, 김보영, 배명훈, 장강명이 쓴 공상과학(SF) 소설집 를 든 까닭이다. 근데 이 SF, 너무 현실적인 거 아닌가? 때가 때이니만큼 소설집에서 가장 강렬했던 건 장강명의 이었다. 금성이 배경인 SF인데 지구 무직자인 내 고민이 뜨겁게 녹아 있다. 그렇다고 금성 실업자가 나오는 건 아니다.

리얼리티 티브이(TV) 쇼를 만드는 프로듀서와 광고주 대리인의 대화로 소설은 시작한다. 이번 에피소드는 금성 탐사선에서 일하는 연구원 유진과 그의 반항아 딸이 금성에서 딸의 결혼식을 함께 준비하며 서로 이해하게 되는 휴먼 드라마로 틀을 잡아간다. 엄마의 자기장 밖으로 뛰쳐나간 딸은 엄마와의 연결고리를 모두 끊으려 과학적 재능을 던지고 예술가로 살았다. 그 둘이 십여 년 만에 다시 주고받게 된 다정한 손편지가 이 휴먼 드라마의 계기가 됐다.

이 엄마는 왜 딸에게 손편지를 보냈을까? 이 딸은 왜 답장했을까? 손편지는 암호였다. 엄마는 도망치려고 하는 중이다. 무엇으로부터? 딸은 금성에서 ‘디지털 배우’ 로봇들이 대신 벌이는 결혼식 축하 공연을 짠다. 방송 제작자들을 눈속임하려는 연막이다.

오답을 위해 도망친 아이

4년 전 탄산음료 회사는 유진에게 금성에 보내주는 조건으로 리얼리티쇼를 제안했는데, 유진은 연구 욕심에 이를 받아들인다. 어차피 싫으면 1년 지나 계약을 끝내면 된다. 그런데 계약을 결정할 시기가 될 때마다 유진은 연구열로 진지해지며 ‘그래 좀더’를 결심한다. 카메라 돌아갈 때면 눈물바람이 절로 난다. 왜 이럴까? 그 비밀을 알게 된 건 “사흘째 폭풍우 치는 밤이었다.” 사흘째 폭풍우 치는 밤이 뭐! 그렇게만 던져놓고 작가는 딴청을 피운다. 이제부터 스포일러.

유진이 목숨을 건 탈주를 계획한 까닭은 감정을 조절하는 장치가 자신에게 장착된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순간 결정을 내린 주체가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유진의 생각을 빌려 말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과 자아정체감을 잃게 될 가능성이었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과 자신이 선택한 오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사람은 오답을 선택하면서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쌓아가는 것이다…. 유진은 처음으로 딸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오답을 선택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아이.”

이 문단에서 자유로운 지구인은 많지 않을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5학년인 조카의 친구도 생각난다. 그 애 엄마는 애가 한순간이라도 ‘멍 때리면’ 걔 인생이 폭삭 망할지 모른다는 공포증 환자다. 공포는 그 엄마 탓만은 아니다. 내가 닥치고 모범생이 되려고 노력했던 까닭은 사람대접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공포는 너무 힘이 세 다른 감정을 다 잡아먹어버린다. 일단 살고 봐야 할 것 아닌가. 때때로 그런 생각까지 든다. 국가건 회사건 일부러 사람이 사람대접 못 받는 제도를 고칠 수 있으면서 내버려두는 건 아닐까. 그래야 모두 공포에 질려 다른 꿍꿍이를 못 가질 테니까.

조카 친구 엄마는 더 좋은 학원이 빼곡한 분당으로 이사 가는 게 꿈이다. 나는 걔 엄마가 절대 대출을 받지 못하길 기도한다. 공포에 휘둘린 뇌는 이상한 결정을 내려버린다. 그 뇌가 내린 결정은 내가 내린 결정일까? 그 공포에서 벗어나 내가 내린 결정으로 사는 건 불가능할까? 퇴직금이 떨어지면 불가능하겠지.

직장상사에게 사소한 일로 욱해 막말을 하고 뛰쳐나온 날, 오랜 친구에게 왜 날 무시하냐며 관계를 끊자고 편지를 보낸 날, 왜 당신의 사랑은 변하냐며, 당연히 변하는 것에 변하지 말라고 발광했던 날, 그 분노로 부글부글 끓던 뇌를 떠올린다. 기억과 상처가 현재를 쥐고 흔든다면, 그에 따라 안전장치 없이 발사되는 뇌 속 온갖 호르몬 칵테일을 들이키고 감정이 횟칼을 어느 참에 휘두르고 있다면, 그건 내 인생일까? 아닐까?

탈주의 끝엔 뭐가 있을까

탈주는 정말이지 목숨을 건 일이었다. 탄산음료 탐사선을 ‘탈옥’한 유진은 금성에 있는 무인자동차 탐사선까지 GPS(위성항법시스템) 신호도, 나침반도, 별자리도 없는 길을 지형지물만 보고 걸어야 한다.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죽는다. 처절한 고독이 따라온다. 그렇게 다다른 무인자동차 탐사선이 결국 또 다른 탄산음료 탐사선이라면? 그럼에도 탈주 자체만이라도, 유진의 삶에 의미가 돼줄까?

김소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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