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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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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산다 스타일을 마신다

적정한 소비로 시대정신을 실천하는 가장 쉬운 방법… 테이블에 종이컵 대신 텀블러 올려놓기
등록 2016-06-21 16:54 수정 2020-05-03 04:28
5g의 종이컵 1개당 11g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쓴다면, ‘지구를 구하자’는 구호를 수십 번 외치는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완벽하게 지구에 도움이 된다. www.wehatetowaste.com 갈무리

5g의 종이컵 1개당 11g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쓴다면, ‘지구를 구하자’는 구호를 수십 번 외치는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완벽하게 지구에 도움이 된다. www.wehatetowaste.com 갈무리

‘아이폰’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무수한 논문과 복잡한 분석들이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한 문장으로 축약해보면 결국 애플의 그 광고 슬로건이었다. ‘이런 아이폰이 있다는 건, 이런 아이폰이 있다는 것’. 애플은 과감하고 단호하게 아이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세상을 나눴다. 아이폰을 쓴다는 것 자체가 쓰지 않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스타일’(style)의 우위라는 점을 사실화하는 전략이었다.

애플이 세계를 지배한 전략

현대 소비사회에서 ‘스타일’의 우위는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다. 스타일은 단순히 어떤 멋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컨대, ‘라이프스타일’이란 개념에서 스타일은 한 개인이 세상과 관계를 맺어가는 양식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어떤 행동을 결정하는 주체로서의 의지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난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뜨겁게 달궜던 한 장의 사진을 환기해보자.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의 ‘낮은 자세’였다. ‘우리 들꽃 포토에세이 공모전’ 시상식을 진행하며, 어린이 수상자를 위해 그는 무릎을 꿇었다.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몸에 젖어 있는 ‘스타일’, 그가 세계와 관계를 맺어온 방식이 함축적으로 표출된 자연스러움이었다.

스타일이 방식이라면, 디자인은 그 표출이다. 전세계 거의 모든 미디어를 통해 전파된 애플의 그 ‘선전’을 다시 생각해보자. 당대를 선도한 애플의 하이테크 혁신은 분명 실제 세상이 그렇게 구획된다고 믿게 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 혁신은 애플만의 것은 아니었다. 그 우위의 스타일을 뒷받침한 건, 애플의 압도적인 ‘디자인’(design)이었다. 디자인 또한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굉장히 위력적인 개념이다. 을 쓴 영국의 시각예술학자 나이젤 화이틀리는 “한 사회의 디자인은 그 사회의 건강함과 직결된다. 디자인은 사회와 정치, 경제 상황의 현시이다”라고까지 말했다.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실천

스타일로 지배하고, 디자인으로 압도하는 애플은 미국 기업이다. 미국의 1960년대는 이른바 ‘자유분방함’(swinging)으로 들끓었다. 애플을 창업했던 스티브 잡스는 그 60년대 기운의 세례를 받으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는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이 엄청난 시대적 전환을 거칠게 축약하면, 표현의 쟁취 자체를 목적으로 하던 시대의 열기가 급속도로 냉정해져 이미지나 스타일 자체가 표현으로 읽히는 것으로 형질전환된 시기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투박한 투쟁의 시대가 저물고, 노련한 세렴됨이 우대받는 시대로의 이행기에서 스티브 잡스는 말하자면, 그 시대정신의 전환을 ‘소비’로 선취해낸 창의적인(creative) 사업가였다.

굳이 애플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엇보다 ‘디자인’이 중요한 시대에서 ‘스타일’로 거의 전부를 설명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육상 트랙을 형상화한 듯한 나이키의 로고 스우시(Swoosh)만을 보고 신발을 고르고, 얼핏 초록색 자유의 여신상 같기도 한 바다의 요정 세이렌이 새겨진 컵에 든 커피라면 기꺼이 마신다. 데카르트의 문법을 빌리자면, ‘나는 보여진다, 고로 존재한다’의 시대다. 복잡한 언어 표현은 직관적 이미지로 대체되고,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가 고유한 스타일로 구축된다. 이를 어떤 체계의 발현이라고 부르건, 우리는 어떤 디자인 혹은 스타일을 통해 삶의 상당 부분을 설명하고 이해하고 표현해야 하는 시대를 의심할 나위 없이 살아가고 있다.

디자인과 스타일의 시대는 전세계에 깔린 ‘마케팅’과 ‘상품 자본주의’ 체제 속에 바야흐로 인류가 통합적 세계관을 갖춰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두가 상품에 ‘현혹’되고,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소비하느냐를 두고 경합하는 시대. 이에 대해 제아무리 비판적 인식을 가져보려 해도 이제 그 대세를 원천적으로 거스르며 살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 인류 역사상 최고로 풍요로운 시대를 소비로 건너고 있는 우리 모두는 여전히 빈곤한 누군가들이 생산한 상품을 대량으로 휘발하며, 어쩔 수 없는 아니 필수 불가결한 한 명의 ‘소비자 정체성’으로 살아간다. 거창하게 얘기했지만, 이 대목에 너무 심란한 자기비판이나 사회적·윤리적 낙담을 할 필요는 없다. 소비자 정체성이란 말이 때론 이기적이고 편협한 개인들을 질타하는 용례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정치적 시민인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의 소비자이다.

알다시피 자본은 ‘이윤 추구’라는 단일한 목적성을 갖는다. 소비자 정체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채롭다. 어떤 때 정의로울 수도 있고, 흔치 않지만 저항적일 수도 있다. 정치적 각성만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는 시대라면, 그래서 어쩌면 소비자 정체성에서의 합리적 저항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거창한 정치적 구호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하지만 구체적인 일상에서의 실천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거나 혹은 개선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말해야 하는 지속적인 얘기다.

1년 종이컵으로 나무 1500만 그루 사라져
환경운동 시민단체 ‘녹색연합’이 진행한 ‘나도 사랑하고 지구도 행복한 캠페인’에서 텀블러 사용은 두 번째 과제로 지목됐다. 녹색연합 홈페이지 갈무리

환경운동 시민단체 ‘녹색연합’이 진행한 ‘나도 사랑하고 지구도 행복한 캠페인’에서 텀블러 사용은 두 번째 과제로 지목됐다. 녹색연합 홈페이지 갈무리

이는 결국 습관을 교체하는 문제다. 익숙한 소비의 습성에서 최소한의 윤리적 각성을 찾는 과정으로 삶은 정당해진다. 예컨대, 텀블러(tumbler)라는 물건이 있다. 음료수를 마시는 데 쓰는 밑이 편평한 잔을 뜻한다. 6온스(180mℓ들이), 8온스(240mℓ들이), 10온스(300mℓ들이) 등이 있는데, 8온스가 국제 표준이다. 더 이상 설명할 것도 없는, 누구나 아는 바로 그 시시한 물건이다.

하지만 텀블러는 꽤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물건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한데, 우선 어떤 상품이 전 생애에 소요되는 에너지와 배출 오염물질 데이터를 총괄하는 ‘전 과정 평가’(LCA·Life Cycle Assessment) 개념을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 상품이다.

텀블러의 가장 편리한 대체 상품은 종이컵이다. 테이크아웃 카페 등이 성행하는 우리나라의 한 해 종이컵 소비량은 120억 개 이상으로 추정된다(2012년 기준). 오직 종이컵 생산만을 위해 한 해 8만t의 천연펄프가 수입되는데, 이는 50cm 이상 자란 나무 1500만 그루의 목숨값이다(녹색연합 자료 참조).

일회용 종이컵은 ‘펄프→종이→컵’ 공정을 거쳐, 배달되고 사용한 뒤, 태우거나 묻힌다. 각 과정에는 당연히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고, 화학약품이 사용된다. 종이컵의 전 생애에 걸쳐 소요되는 에너지와 배출 오염물질 데이터를 총괄해 ‘전 과정 평가’를 해보면 5g의 무게가 나가는 종이컵 1개당 11g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종이컵을 만들기 위해 펄프를 생산하고 표백하는 과정에선 200ℓ의 물이 필요한 건 별도의 문제로 하더라도 말이다.

텀블러는 우리의 익숙한 소비 습관이 얼마나 생애 주기적으로 지구를 오염시키는지를 단적으로 환기해내는 상품이다.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쓴다면, ‘지구를 구하자’는 구호를 수십 번 외치는 것보다 훨씬 깔끔하고 완벽하게 지구에 도움이 된다.

또 한 가지 측면은 대량소비 사회의 재활용 문제다. 종이컵은 질 좋은 천연펄프를 사용하고, 가공 과정에서 어떤 접착제도 사용하지 않는 최상급 기술이 적용된 물건이다. 하지만 재활용률은 14%에 그친다. 비단 종이컵만의 문제가 아니다. 생산공정 효율화로 모든 것이 너무나 흔해져 재활용이 더 이상 미덕으로 권장되지 않는 시대다. 일회용품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 일회적으로 버려지는 시대, 하루 스물세 명이 종이컵을 1개만 덜 쓰면 20년생 나무 한 그루가 1년을 더 살 수 있다.

종이컵에 대한 환경개선 부담금 운동을 주도해왔던 국내외 환경단체들은, 그래서 “내 컵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먹지 말자”는 캠페인을 제안하기도 했다. 성인 한 걸음당 한 개씩 세상에 버려지는 종이컵을 사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지구에 엄청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정치의 지리멸렬함과 하루라도 냉소를 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든 각박한 ‘헬조선 지옥불반도’에 바야흐로 여름이 왔다. 테이크아웃 음료를 앞에 두고 두런두런 얘기 나누기 딱 좋은 계절이다. 그 잔을 일회용 컵이 아닌 당신만의 텀블러로 교체해보는 건 어떤가. 익숙한 편리함 대신 다소 성의가 필요한 그 행위의 실천을 통해 테이블 위에 ‘스타일’을 올려놓아보면 어떻겠느냔 말이다.

여름, 아이스아메리카노는 텀블러에

스타벅스 등 유수의 글로벌 브랜드들이 텀블러 시장에 뛰어든 이후 굳이 윤리 선생님 같은 권유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소비해볼 만한 ‘디자인’의 텀블러가 세상에 차고 넘친다. 단순히 또 하나의 물건을 사라는 권유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적정한 소비를 통해 시대정신을 ‘구매’하는 비범한 실천가가 쉽게 될 수 있음을, 뭣이 중한지 잊지 말자는 얘기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멋있든.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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