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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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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라, 차라리 아름다운

비구름이 절경을 가릴지라도 그 순간 그 자리… 거대한 폭포수, 환호하는 나뭇잎, 따뜻한 차 한잔
등록 2016-02-06 02:08 수정 2020-05-03 04:28
소백산 도솔봉에서 묘적령 방향. 구름이 능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김선수

소백산 도솔봉에서 묘적령 방향. 구름이 능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김선수

산행 일정을 잡았는데 비가 오면 계획을 취소해야 할까? 명산(名山)을 찾는 산악회는 대부분 취소하지만, 백두대간이나 정맥을 타는 산악회는 기후에 관계없이 진행한다. 폭우로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면 굳이 취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웬만큼 비가 와서는 그런 정도로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호젓하고 여유 있는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조망을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을 수는 있겠다. 설악산 공룡능선, 가야산 만물상, 월출산 암봉능선 등을 탈 때 짙은 비구름으로 인해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걸은 적이 있다. 전에 직접 또는 사진으로 봤던 절경을 가늠하면서 걸을 수밖에 없다.

이런 아쉬움은 340여 년 전에 고산 윤선도도 경험했다. 월출산 천황봉에 올랐을 때 구름이 모든 것을 가려버렸다. 고산은 그 아쉬움을 시조로 표현했다. “월출산이 높더니만 미운 것이 구름이로다/ 천황 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는구나/ 두어라 해 퍼진 뒤에는 안개 아니 걷히랴.” 해 퍼질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릴밖에.

우중산행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장관도 있다. 다산 정약용이 과거에 급제하고 서울 명동 근처에 살 때인 1791년(정조 15년) 여름. 먹구름이 몰려들고 천둥소리가 울려 당장 소나기가 쏟아질 기세였다. 다산은 급히 말을 몰아 자하문을 넘어 세검정(洗劍亭)을 찾았다. 가는 동안 소나기가 퍼부었고, 세검정에 도착했을 때 계곡은 거센 물살로 소용돌이쳤다. 비가 그치면 바로 물이 줄어 그 광경을 볼 수 없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 찾아야만 그 장관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한산에 백운대폭포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백운대폭포는 폭우가 쏟아지는 그 시간대에만 존재하고 폭우가 그치면 바로 사라진다. 2009년 6월20일 백운대폭포를 알현할 수 있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동료들과 함께 구기동에서 시작해 비봉능선으로 거쳐 문수봉을 지나 대남문에서 내려올 예정이었다.

비봉능선을 지날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번 발동이 걸리니 중간에 그만둘 수 없어 계속 능선을 탔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노적봉 하단을 지나 암벽 구간을 가는데 군데군데 폭포가 만들어졌다. 백운대가 눈에 들어오는데 정상에서 서쪽 방향으로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굵은 빗줄기가 뿌리는 순간 그 자리에 있어야만 볼 수 있는 백운대폭포다.

나뭇잎들의 환호하는 함성을 들은 적이 있는가? 2012년 6월30일 예봉산∼운길산 구간을 걸을 때였다. 당시 가뭄이 심했는데, 그날 대지를 촉촉이 적실 정도의 굵은 빗줄기가 뿌렸다. 나뭇잎들이 반들거리는 푸름으로 생기를 띠고 빗줄기를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 기쁨에 넘쳐 환호했다. 너무도 흥겹게 외치는 소리에 충만한 원기를 흠뻑 받았다.

우중산행의 고행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 2007년 9월1일 속리산을 갈령에서 시작해 천왕봉을 거쳐 법주사로 내려왔다. 7시간 내내 빗줄기가 굵게 뿌렸다. 앉지도 못하고 선 채로, 빗물로 씻은 족발 안주에 막걸리 한잔 마셨다.

이성부 시인은 ‘서서 밥 먹는 나를 굴참나무가 보네’라는 제목의 시에서 썼다. “지금은 차라리 아름다운 식사시간이라/ 쫓기지 않아도 되고 총알 튀기지 않아도 되는/ 서서 먹는 밥이니까.” 온몸이 흠뻑 젖은 상태에서 세심정(洗心亭) 매점에 도착했다. 종이컵에 믹스커피 한잔 사서 마셨다. 지금까지 맛본 커피 중 최고다. 오들오들 떨리는 몸을 데워주었던 그 맛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2010년 5월22일 덕유산 중봉 계단을 오를 때 가는 빗줄기가 강풍에 날려 얼굴을 때렸다. 바늘로 찌르듯이 따갑고 얼얼했다. 몸이 너무 떨려서 향적봉 정상에도 오르지 못하고 백련사로 바로 내려왔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백련사 찻집에 들러 따뜻한 쌍화차 한잔 마시니 온몸이 나른해지며 몽롱한 행복감에 취했다.

비 그친 직후의 운해(雲海), 능선을 경계로 구름이 한쪽 사면에서 반대편 사면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선을 그어 맞서는 형국, 비몽사몽 환상적인 분위기의 연하선경(煙霞仙境) 등등. 우중산행에서 만날 수 있는 장면들이다.

김선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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